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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집을 짓기에 앞서 격식없는 땅제를 지냈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집을 짓기에 앞서 격식없는 땅제를 지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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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내 안의 욕심들이 분출되는 것

집짓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아내가 그린 설계도면을 펼쳐놓고 아침부터 부부 싸움을 벌였습니다.

"민박집을 하는 건 더 이상 말리지 않겠는디 방이 너무 비좁잖어. 우리가 잘 방이면 몰라도 그런 방에 어떻게 손님들을 재울 수 있어."
"좁지 않다니까 그러네. 방 두 칸은 있어야지."
"그래두 그렇지, 그렇게 좁으면 여인숙이나 다름없지."
"두 가족이 놀러 오거나 단체 손님들이 온다고 생각해봐. 남자여자 따로 쓸 수 있는 방 두 칸은 있어야지."

건축허가가 떨어지기도 전에 아내는 설계도면에 욕심을 덧붙여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 놀러 올 건디 뭘 그려, 방 부족하면 돈 안 받고 그냥 우리 방 내주면 되잖어."
"그래도 민박집을 하려면 방 두 칸은 있어야 해."
"욕심은 끝이 없는 겨. 우리 형편에 삼십 평짜리 집도 분에 넘쳐. 자꾸 욕심 부리다가는 탈난다니께 그러네.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것도 그렇고."
"작은 방 한 칸 더 늘리자는데 그게 뭐가 욕심이라고."
"에이 몰라! 자꾸만 욕심 부리면 민박집이고 뭐고 그만둘 거니께 당신 혼자 하든 말든 맘대로 혀!"

불안하게 지켜보던 눈치 빠른 큰 아이가 은근슬쩍 중재에 나섰습니다.

"아빠 땅 제사 지내러 언제 가는 겨."
"며칠 있다가."
"오늘 가자."
"지금 밖에 비 오잖어."
"고흥에는 비 안 올 겨, 오늘 가자. 엄마도 가고 싶지?  거봐 엄마도 간데잖어."

화를 죽이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나는 아이들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집을 나섰습니다. 고흥으로 향하는 호남고속도로에 접어들 무렵 화가 풀렸습니다.

내 화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땅을 구하러 다니고 보금자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내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뭔가를 좀 더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못해 아내의 욕심에 이끌려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안에는 이미 큰 욕심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최소한의 것으로 소박하게 살겠다는 더 큰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화는 내 안에 감춰져 있던 욕심들이 분출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화를 내고 나면 늘 그렇듯이 어금니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잇몸이 부어오릅니다. 잇몸이 부어오르면 육 고기를 먹기가 힘들어집니다. 내 식탁은 점점 육식에서 씹기 편리한 음식물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 끝에 문득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성치 않는 치아를 통해 갓난아이 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것이 또한 자연의 섭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갓난 아이 때는 씹을 필요가 없는 모유에 이유식을 먹고 점점 자라면서 먹기 쉬운 채식과 생선 등을 섭취하고 성성한 치아가 형성되면 육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 늙어 치아가 성치 않게 되면 다시 이유식 같은 씹기 좋고 소화기관에 부담이 적은 음식물을 섭취하게 됩니다. 그게 자연스런 현상일 것인데 아마도 나는 다 늙어서까지 육식을 놓지 않게 될지 모릅니다. 자연의 섭리를 어기고 죽을 때까지 욕심껏 씹어 댈지도 모릅니다.

길한 날이라고 하니 기분은 좋네

석고대죄 하듯 머리채를 풀어헤쳐 봉두난발로 앞으로 이 땅에서 우리 식구가 저지르게 될 죄를 낱낱이 고했다.
 석고대죄 하듯 머리채를 풀어헤쳐 봉두난발로 앞으로 이 땅에서 우리 식구가 저지르게 될 죄를 낱낱이 고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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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에 도착하자 비가 그쳤습니다. 새 터 한 가운데에 조촐하게 준비한 제물을 놓고 격식 없는 땅 제를 올렸습니다. 새 터에 깃든 생명들에게 집을 짓게 된다는 사실을 고했습니다. 사방팔방에 깃든 생명들에게 큰 욕심 없이 살다 가겠노라 큰 절을 올렸습니다.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 술잔을 올리며 평화로운 터에 갑자기 들이닥쳐 소란을 피우게 될 것에 대한 사전 양해를 구했습니다.

제 몸뚱이 편히 간수하겠다며 본래 땅 주인인 온갖 생명들을 밀어내고 끔직한 장비들을 동원해 온갖 해괴한 짓을 준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은 말없이 받아 주었습니다.

"좋은 날 지네요이."

새 터를 구하면서 알게 된 근처 암자에서 홀로 지내는 스님이 불쑥 찾아와 손가락을 꼽더니 오늘이 호랑이의 날이라고 합니다. 아주 길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류? 고맙습니다. 나는 그런 거 좋고 나쁜 거, 믿고 안 믿고 하는 것도 없지만 기분이 좋네요. 좋은 날이라니께. 어? 그러고 보니께 우리 집사람이 호랑이 띠고 큰 놈 태몽이 호랑이, 또 집이 완성되는 게 호랑이 해니께… 오늘이 묘하긴 묘한 날이네요."
"거기다가 저 앞산이 호랑이 아니것소."
"나는 그냥 보이는 그대로 풍만한 젖가슴으로 보이는 디요."
"잘 보소. 호랑이요 호랑이, 딱 보면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 아니오."

호랑이가 인간을 보호해 줄 것인지 잡아먹을 것인지는 호랑이 맘에 달려 있겠지만 결국은 인간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질 것입니다. 아무튼 흉한 날이라 말하는 것보다 길한 날이라고 하여 기분은 좋았습니다.

인간들이 손가락을 꼽아 따지거나 말거나 땅은 말없이 인간들을 받아 주고 있었습니다. 땅은 언제나 생명을 품어 안습니다. 그것이 해롭거나 해롭지 않거나 미생물이든 곤충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두 다 넉넉하게 껴안아 줍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든 어떻게 어떤 형태로 누리고 살든 다 받아 줍니다. 모든 것을 내주고 스스로 침묵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침묵하면서 주는 만큼 되돌려 줍니다. 땅은 단순한 진리 그 자체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살면 좋은 것을 내 주고 나쁜 마음으로 살면 그만큼 나쁜 것을 내 줍니다.

우리 식구가 저지르게 될 죄 낱낱이 고하고

누구한티 절해야 돼? 니들은 그냥 이 터에 사는 주인들에게 앞으로 사이좋게 잘 지내겠다고 절하면 돼.
 누구한티 절해야 돼? 니들은 그냥 이 터에 사는 주인들에게 앞으로 사이좋게 잘 지내겠다고 절하면 돼.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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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따라 생각 없이 사방팔방에 큰절을 올리다가 큰 아이가 물었습니다.

"아빠! 근디 누구한티 절해야 돼?"
"이 터에 사는 주인들."
"그게 누군데?"
"여기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들. 개미 벌 새 나비 곤충, 해충 익충 그 어떤 생명 모두 다."
"이 터 주인은 우리 아녀?"
"그 생명들이 먼저 이곳에서 살았으니까 주인인 셈이지. 니들은 그냥 그 모든 생명들과 앞으로 사이좋게 잘 지내겠다고 절하면 돼."

속 깊은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최대한 덜 짓겠노라 고했다. 하늘 땅 사람, 세상에 깃든 모든 생명들과 더불어 평화를 기원했다.
 속 깊은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최대한 덜 짓겠노라 고했다. 하늘 땅 사람, 세상에 깃든 모든 생명들과 더불어 평화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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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땅에 엎드려 제문도 없이 속으로 읖조렸습니다. 석고대죄 하듯 평소 묶고 다니던 머리채를 풀어헤쳐 봉두난발로 앞으로 우리 식구가 저지르게 될 죄를 낱낱이 고했다.

'모든 땅은 사원입니다. 경건한 사원입니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생명을 먹이고 길러주는 신성한 사원입니다. 이 신성한 사원 앞에서 절을 올리고 또 올립니다. 사방팔방에 무릎 꿇어 큰절을 올립니다. 나와 우리 식구들을 비롯해 이 신성한 터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잠시라도 욕심을 내려놓고 하루 세 끼 먹는 것으로 만족해 제자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 아무리 욕심을 줄이고 살겠노라 머리 숙여 고하고 있지만 이 신성한 땅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을 알게 모르게 함부로 대할 것입니다. 내 욕심은 땅에 깃들어 사는 모든 생명들에게 해코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내게 도움을 주는 진정한 땅의 주인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온갖 변명과 핑계로 그들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그래왔듯이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불경죄를 저질러야 할지 모릅니다. 그 죄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 죄 또한 얼마나 크겠습니까? 어찌 그 죄업이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보다도 크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죄의 무게가 벌써부터 내 어깨를 짓누릅니다. 부디 용서하소서. 이 심약하고 사악한 불쌍하기 그지없는 중생을.'

"아내와 싸움 좀 덜하게 보살펴 주십시오"

아내와 싸움을 덜하게 보살펴 주실 것을 빌었다.
 아내와 싸움을 덜하게 보살펴 주실 것을 빌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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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집짓기에 앞서 속 깊은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최대한 덜 짓겠노라 고했습니다. 하늘 땅 사람, 세상에 깃든 모든 생명들과 더불어 평화를 기원했습니다. 이것저것 바라지 않고 사심 없이 고하려 했지만 본래 불쌍한 중생인 걸 어쩌겠습니까? 욕심을 덧붙여 '바람 좀 덜 불게 해주십사' 빌었습니다. 거기다가 '이 땅에 깃들어 살면서 아내와 싸움 좀 덜하게 보살펴 주십시오' 라고 소리 내어 말했더니 아내가 빙그레 웃습니다.

고해성사 뒤끝의 홀가분한 기분으로 아이들과 너른 바다의 품에 안겨 축구를 하다가 밤늦게 공주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민박집은 두 칸을 만들되 찾아오는 손님들이 편히 쉬어가며 토론도 할 수 있을 만큼의 큰 방 하나에 조그만 다락방 하나를 올리기로.

땅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해변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했다.
 땅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해변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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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땅제, #죄업, #생명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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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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