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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부야오 사우스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필리핀 국립대학 문화인류학 박사과정의 정법모 씨.
 카부야오 사우스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필리핀 국립대학 문화인류학 박사과정의 정법모 씨.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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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한 시간, 저녁에 한 시간 물이 나온다는데 시간을 예상할 수가 없네요... 집은 처음에 본 것보다 훨씬 좋고 아늑해요... 동네아이들이 와서 함께 청소했고요, 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큰 걱정하지 말아요!"

카부야오 사우스빌에 월세 4만원짜리 방에서 이번 달부터 살아가고 있는 필리핀 국립대학 문화인류학 박사과정의 정법모 씨.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의 필진인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한국 사람 누구도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필리핀에 대한 이야기들을 여러 매체 등을 통해 쏟아내고 있다.

1994년, 난곡 공부방에 자원봉사를 하면서 도시빈민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지금 * 카부야오 사우스빌에서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정법모 씨, 그는 왜 필리핀인조차 가기를 꺼려하는 척박한 빈민촌, 카부야오 사우스빌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했을까?

필리핀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면서 저의 관심사는 도시 빈민이었습니다. 처음 필리핀을 방문하기로 결심했을 때는 '** 피플 파워 Ⅱ(People Power Ⅱ)'로 에스트라다 전 필리핀 대통령이 물러날 때였고, 도시빈민 문제가 필리핀 내에서 이슈화되기 시작할 때 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활동들이 계층간 이해관계가 제각각이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행동도 제각각 인 점이 궁금해서 필리핀에 오게 된 것이죠.

그 후 '(필리핀)개발사업에 주민참여와 NGO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이루어진 공적개발원조(ODA :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로 인해 도시빈민들의 생계가 위협당하는 것은 물론, 개발지의 터를 잡고 살아가던 빈민들이 사업의 주체에서 제외당하는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슴아픈 현실이지만 한편으론 좋은 경험이었지요. 그 때 필리핀에 위치한 아시아 NGO 센터(현 아시안브릿지)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요.
(이 후, 정법모씨는 아시아 NGO 센터의 사무국장으로 2년간 일하게 된다)

아시아 NGO 센터의 사무국장 일을 2년간 맡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문화인류학자로서의 길을 고민하면서 시민사회 활동에 동참하고 싶단 생각을 계속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일단 시민사회 일을 경험해본 뒤 공부를 해도 늦지 않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서 덜컥 필리핀으로 오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사무국장이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게 되고,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됐습니다. 필리핀의 사회와 다양한 계층에 대해 볼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관심있어하던 도시빈민 문제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센터가 재정난에 시달리고, 항상 센터일에 매달려 있는 나를 바라볼 때마다 힘든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센터로 연수를 온 연수생들과 여행을 가게 됐는데, 며칠간 핸드폰에 문자 하나가 오질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이곳에 모인 사람들 말고는 내가 연락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을 그 때서야 깨닫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할 때보다 더 활동반경이 좁고 사람들을 못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죠. 때때론 그렇게 일을 해나가면서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는 센터가 필리핀 사회 내에서 여러 역할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으로 힘들어하고, 센터운영을 위해서 한국에서 오는 활동가나 학생들의 교육에 치중해야 할 때도 많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센터가 있음으로써 많은 한국인들이 아시아에 대해 배워가고 깨달을 수 있어서 보람을 느꼈지만, 한편으론 필리피노들과 함께 호홉하며 활동하는 역할에 대해 센터가 주로 고민해야 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 것이죠.

아시안브릿지로 이름이 바뀐 뒤에도 여전히 센터는 힘들지만 이런 문제들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이번 카부야오 사우스빌에 자리잡을 수 있게 아시안브릿지가 많이 도와주었고, 앞으로도 미약하나마 힘을 보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센터 일을 그만두신 후에는 필리핀 국립대학(UP : University Of The Philippines)에 입학하셨네요?
2006년, 센터의 일을 그만둘 때쯤 필리핀 국립대학 문화인류학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신자유주의 노선 아래에서 계층이 갈라지고 그 속에서 양산되는 문제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나라 중 하나가 필리핀이라고 생각을 하게 됐고, 역동적인 필리핀 시민사회에도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다른 나라를 가더라도 필리핀을 주제로 연구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게 돼서 문화인류학 박사과정이 있는 이 곳 대학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이쯤 그는 POSCO에서 아시아지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모한 장학금 사업에 선정되어 금전적 문제를 해결하게 됐다)

민주주의나 사회운동 등에 있어서 필리핀의 심장부로 불리는 필리핀 국립대학은 필리피노(따갈로그어로 '필리핀인'이라는 뜻)의 관점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고, 문화인류학과 관련된 이들이 한국에서보다 사회참여에 더 적극적이어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특히 몇몇 교수들이 자신이 활동하는 단체에서 보고 듣고 느낀 빈민지역에 대해 경험을 가지고 강의를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죠.

때론 내가 학위를 위해서 단순히 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회의가 들기도 했지만, 어디서든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베가시키기 위해선 고유의 언어나 과정이 필요하단 생각을 가지면서 그것의 좋은 방편이자 내가 성장하는 밑걸음이 지금의 과정이라 고민하게 됐습니다.

다만 공부하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과 토론하고 생각을 공유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에서보다 이 곳에서 그런 기류가 적은 편이어서 아쉬울 때도 있었지요.

인근학교를 찍고 있는 정법모 씨의 모습.
 인근학교를 찍고 있는 정법모 씨의 모습.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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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들어보니 필리핀 시민사회와 관련되서도 많은 경험을 하신 것 같습니다. 필리핀 시민사회는 어떤 곳일까요?
필리핀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풀뿌리 조직화를 중시하고, 주민자치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곳의 한 활동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은 이슈를 위해 주민들이 조직화 되고, 이슈 후에 조직들이 와해된다면 필리핀은 조직화를 위해 이슈를 이용하고 이슈가 사라져도 조직은 남는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때때로 한국의 시민사회 속에는 시민이 없다고 비판을 받곤 하는데, 활동가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만큼 조직화를 중시하는 곳이 필리핀 시민사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시시때때로 듭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리를 잡으신 카부야오 사우스빌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죠?
2005년 센터에서 일을 할 때, 처음 이 지역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한국 정부의 ODA 자금이 메트로 마닐라 중심부에 있는 빈민들을 카부야오 사우스빌로 집단 이주시키게 됐는데, 이들의 처우에 대한 고민이 그 속에는 없다는 점을 주의깊게 보개 됐죠.

그러면서 주민들이 어떻게 저항하고 조직화를 하는지, 한국이 ODA를 할 때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하는지, 도시빈민들은 도심에서 왜 계속 밀려나야만 하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게 됐습니다.

실제 한국에선 카부야오의 사례가 언론에 회자되고 인용되면서 많이 언급되게 됐습니다. 여러 공청회와 토론회를 통해 국내의 관련 법제화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고도 생각이 들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카부야오 사우스빌의 주민들이 느끼는 삶의 무게가 어떨지는 모를 일이죠.

가게에서 저녁거리를 사는 정법모 씨의 모습, 이방인의 출연을 많은 이들은 신기해하고 있었다. 특히 익살스런 안경을 쓴 가게 주인은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게에서 저녁거리를 사는 정법모 씨의 모습, 이방인의 출연을 많은 이들은 신기해하고 있었다. 특히 익살스런 안경을 쓴 가게 주인은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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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곳에 들어와서 살기로 결정하시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박사과정 논문을 작성할 때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 곳에 짧으면 반년, 길면 1년여를 머물면서 이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의 언어를 배워서 이들과 함께 소통하고, 가까이에서 이들을 관찰하며 도시빈민지역과 이주지역의 비교, 주민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일들 등에 대해서 지켜볼 생각입니다.

최근 들어 한국에 ODA 예산 및 활동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실증적 자료는 부족한 편인데, 문화인류학 관점으로 ODA를 통해 벌어지는 사회문화적 양상을 잘 기술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실제 이들은 카부야오에 있는 일자리에서도 채용이 되지 않고, 지방정부 정책의 수혜도 못받는 이른바 '왕따'로 전락하고 있고, 원래 주변에서 살아가던 이들과 융화되지 못하는 악순환을 겪고 있습니다. 도시빈민으로 살아갈 때에는 그나마 생계와 희망이라는 단어가 이들에게 잡혀있었지만, 이 곳으로 이주 후에 나아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을뿐더러 그나마 잡고 있던 가치들도 놓쳐버린 셈이죠. 이런 모습들을 저의 연구과정 속에서 반영시키고 싶은 바람입니다.

또한 앞으로 카부야오 사우스빌에서 살아갈수록 지금 저의 생각이 어떤 식으로 변할지는 솔직히 저 자신도 알 수 없네요.

카부야오 사우스빌을 조사하고 다니는 정법모 씨의 모습, 집 넘어 보이는 언덕은 인근에 위치한 쓰레기장의 모습이다. 지하수는 오염됐고, 파리 뗴가 온 동네를 주름잡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카부야오 사우스빌을 조사하고 다니는 정법모 씨의 모습, 집 넘어 보이는 언덕은 인근에 위치한 쓰레기장의 모습이다. 지하수는 오염됐고, 파리 뗴가 온 동네를 주름잡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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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과거에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았나요?
그렇죠. 사실 얼마 전 벌어진 용산사태가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도시가 끊임없이 개발되면서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고층빌딩이나 생활환경이 도저히 국내 노동자의 임금으로 살아갈 수 없는 구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일부 상위계층이나 외국인만이 그 공간을 사용하게 되고, 이로써 벌어진 계층 간의 간격이 공고화 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필리피노 한 활동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한국의 용산사태는 우리 도시빈민 문제와는 다르지 않느냐? 그것은 상인이 문제 아니냐? 그들이 사실 빈민은 아니지 않느냐?"

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원래 살던 삶의 터전을 뺏기고 생계를 위협당하고, 그 개발사업 속에서 주체가 아닌 피해자로 전락해버리는 과정은 도시빈민 문제와 같다. 그들이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벌어지는 현상의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1990년대 한국의 집단 이주정책은 실제로 지금 필리핀에서 벌어지는 대대적 이주정책과 비슷했고, 얼마 전 용산사태는 도시에서 빈민들이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시빈민, 어떻게 보면 생소한 개념일 수 있는데, 직접 정의하신다면요?
(한참을 망설이다가) 정말 어려운데요. 아직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의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인류가 문명을 만들고 살아가면서부터 도시빈민이 생겨나고, 이 도시빈민들은 도시를 작동하게 하는데 누구보다 중요한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 도시밖으로, 그 도시의 또 밖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더럽거나 무서운 존재로 바라보곤 합니다.

지금도 우리 곁엔 수많은 도시빈민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이들은 항상 사회의 주체로 나서질 못하고, 자신의 권리를 정당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모르겠네요. 나중에, 나중에 정의할 수 있길 바라야겠죠?

3시간 남짓, 그와의 인터뷰가 끝난 뒤 카부야오 사우스빌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아이들이 떼를 지어 쫒아오면서 낮선 이방인의 출연을 반가워 했고, 주변 쓰레기장의 영향으로 파리가 새까맣게 앉아있는 가게에서 저녁거리를 사고 인근 슈퍼에서 식수를 한 통 사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았다.

누구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연구,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의 연구에 희망을 걸어봄직한 것은 이미 나 역시도 도시빈민으로 살아가는 또다른 주인공이어서가 아닐까?

* 카부야오 사우스빌(Cabuyao Southvile) - 카부야오 사우스빌(southville), 한국 공적개발원조(ODA)로 만들어지는 메트로 마닐라 남부통근철도 개선사업 탓에 그 곳에 있던 빈민촌이 철거되고, 그 빈민들이 집단으로 이주된 마을. 민영화된 전기와 수도의 살인적 가격과 주변 지역에서 직업을 보장하지 못하는 탓에 주민의 40% 정도가 직업이 없는 상태이다.

** 피플 파워 Ⅱ(People Power Ⅱ) - '의적'의 이미지를 가진 배우출신 에스트라가 민중적 인기에 힘입어 대통령이 되었지만, 취임 이후 구체제 지배집단들과 결탁해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두 번째 민중봉기로 축출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두 번째 봉기를 성공시킨 시민사회운동의 역량은 한층 강회되기도 하였지만, 민중세력 중 일부가 에스트라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었고, 이후 들어선 아로요 대통령 역시 부정부패와 선거부정으로 얼룩졌지만 효과적인 축출운동을 전개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점을 낳게 됐다
(자료 참고 : 이영환 저 '필리핀 사회복지와 NGO')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casto와 푸타파타의 세상바라보기(http://blog.daum.net/cast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법모, #필리핀, #카부야오 사우스빌, #도시빈민, #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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