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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가끔 졸음을 참고 100분 토론을 끝까지 보게 되는 날이 있다. 내용이 궁금해서 보기 시작한 나는 30분 정도 지나면 어느 정도의 내용을 파악하게 되고, 나의 생각과 처지에 따라 한쪽 편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오기로 본다.

 

누가 어떤 식으로 핑계를 대는지, 그리고 누가 나를 대신해 제대로 반박을 해줄지를 지켜본다. 때로는 '아, 저기에 구멍이 있었군. 나도 다음에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할 때는 저런 식으로 얘기하면 설득이 되려나?' 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

 

법과 이해관계와 관례와 상대방의 약점까지 총동원된 논쟁 판은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은근슬쩍 대답을 안 해 버리기도 한다. 요즘에는 오히려 진행자인 손석희씨의 진행에 집중한다. 못들은 척 넘어가려는 사람을 챙겨 대답하게 만들고, 이야기가 논점을 잃고 먼 길을 떠나 버릴 때, 그는 토론이 방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게 한다.

 

100분 토론을 2시간, 혹은 3시간 내내 지켜보고 잠자리에 들 때는 가슴이 답답하다. 대개의 경우 서로의 입장차이만 확인하고 판단은 국민들에게 맡기고 끝이 나기 때문이다. 나의 판단은 이미 1시간 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내지 못하는 패널들이 야속하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잠자리에 누운 나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왜 금배지만 달면 다들 바보가 될까?' '내일은 나도 머리를 깎아야 될까?' '아, 정말 다음 번 선거 때는 선거운동이라도 해야 될까?'에서부터 '대의 민주주의의가 좋은 제도일까' 등등의 오만가지 생각으로 뒤숭숭해진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든다. '괜히 봤다. 잠이나 푹 자든가, 내일 아침 회의 준비나 할 것을.'

 

여기 결과 없는 토론에 진저리 난 두 명의 청년이 있다.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환경을 지키고, 빈곤한 사람들에게도 먹을 수 있고, 치료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며, 힘이 없더라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다. 너무도 당연하여 토론이 필요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막상 이 문제들은 손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문제이든 이해관계의 당사자들이 끼어들어 논쟁을 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토론에 허탈함만이 남는다. 뚝딱 법을 고친다거나 누군가의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의해 손쉽게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생업과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당하는 느낌이 들면 사람들은 바로 외친다.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인류를 구하라고?"

 

지구에게, 실천가들에게 부담주지 않겠다!

 

'실뱅'과 '바튜'는 토론을 접고 사람들을 찾아 세계 일주를 떠났다. 이 책은 프랑스의 전도유망한 20대 청년들이 2003년에서 2004년까지 15개월 동안 세계일주를 하며 대안기업가들을 만난 학구적인 여행기이다. 여행기이면서, 경영서이기도 하고, 대안기업의 구체적 성공사례를 담은 인문사회서이기도 하다.

 

'실뱅'은 그랑제꼴 석사 출신으로 '피아트' 브라질 지사 재무담당 직원이었고, '매튜'도 경영학 석사출신으로 브라질 향수 무역업체의 직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성공한 사회적 기업에 깊은 관심을 자기고 있던 바, 브라질에서 만나 의기투합하여 전 세계 82인의 놀라운 기업가 들을 만나는 여행을 기획하게 된다.

 

우선 꼽을 수 있는 이 책의 미덕은, 그들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선정 기준과 그들 스스로에 대한 여행의 규칙에 있다. 먼저 그들의 여행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들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그들의 여행 규칙은 지구와 취재 대상자에게 부담지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천가들을 취재하기 위한 여행이 환경에 부담을 준다거나 후원금을 필요 이상으로 낭비하는 여행이 되어서는 본래의 취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엄격한 규칙을 부여한다. 비행기는 원칙적으로 이용하지 않으며, 최소한의 비용에서 먹고 자고 이동한다. 힘든 여행길을 가면서도 잠자리나 식사를 취재 대상인에게 제공받지 않는 이유는 한 푼이라도 그들의 사업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제대로 된 한 끼의 식사면 가난한 나라의 여러 사람이 하루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봉고차 짐칸에서 침낭을 덮고 누워 뒤돌아보며 활짝 웃고 있는 그들의 사진이 이 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신은 환경이나 나라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소한 행동이나 잘못은 괜찮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환경 심포지엄을 위해 전용기를 타고 날아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특급호텔의 회의장에 모여, 이미 준비된 영양가 없는 선언서를 낭독하고 다시 전용기로 돌아온다. 이러한 행태는 지난 번 국내에서 열린 국제 행사에서 국가 정상들이 제대로 보여준 바 있거니와, 그 언행불일치한 선언서의 내용 또한 빈축을 사기도 했다.

 

어떤 일을 하던 원칙과 세부적인 규칙을 세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실뱅과 바튜는 그러한 원칙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그들이 만난 사람들이야 말로 윤리적인 원칙과 실천의 대가들이다.

 

 

그들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의 홈 페이지(www.80hommes.com)에서 볼 수 있는 프로젝트 제안서의 첫 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들은 예언자가 아니고(No prophets of doom), 희생적인 영웅도 아니며(No sacrificed heroes), 이론적인 전문가도 아니고(No theoretical specialist), 이상주의자도 아니다(No ideologue)."

 

이 책에 소개된 기업가들은 정상적인 기업 활동과 지구를 살리는 일이 서로 공존 불가능하다는 우리의 편견을 기분 좋게 깨뜨린다. 그 선두에 방글라데시 빈민은행의 '무하마드 유누스'가 있었으며, 두 청년은 여행을 준비하는 6개월 동안 지구와 인류를 위해 훌륭한 업적을 쌓아가고 있는 자본가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음을 알게 된다.

 

실뱅과 바튜는 그들을 찾아 가서, 그들이 애초에 어떤 생각과 의도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안정적인 이윤을 내기 위한 사업의 구조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에 따라 필요했던 내부적 조치와 변화들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쉽고, 자세하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확언하건데,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좋은 사례를 접하는 즐거움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기분 좋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가까운데 두고 100분 토론을 보고 나서와 같이 무력감이 밀려올 때. 아무 때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펼쳐보더라도 기분 좋은 그 지점으로 정신 상태를 데려다 준다.

 

1편 유럽 편에서는 주로 환경 문제에 귀감이 될 만한 사례가 많다. 스웨덴 스톡홀름 '스칸딕 호텔'의 '얀 페터 베르크비스트'는 호텔의 인테리어에서부터 난방, 소모품까지의 모든 시스템을 친환경 시스템으로 교체하여, 망해가던 호텔 체인을 가장 윤리적이면서도 품위 있는 호텔 체인으로 성공시켰다. 약간의 지각이 있는 비즈니스맨이나 관광객이라면 일부러라도 '스칸딕 호텔'을 예약한다.

 

덴마크 '칼룬보르 생태산업단지'의 '요르겐 크리스텐슨'은 인체의 메커니즘을 환경에 적용했다. 공장에서 사용하는 용수나 전기를 100% 재활용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아울러 독한 화학 약품을 수거하여 100% 재활용 가능한 시스템을 만든 기업가도 성업 중이다.

 

또 '알터 에코'의 사장 '크리스탕 르콩트'는 제 3세계 생산자들에게 물건을 직접 사들이는 '공정무역'으로 유명하다. 이제는 많이들 아다시피 '공정무역'은 현지 농민들이 다국적 기업의 횡포로부터 벗어나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커피 농장이 마약 밭으로 바뀌는 사태나 과도한 농약의 사용을 방지하여, 인류 전체의 범죄를 줄이고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게 한다.

 

아시아의 사례를 모은 2편에는 나라가 해주지 않는 복지, 빈곤 문제를 위해 고분분투하는

사람들이 주로 소개되어 있다.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 총재 '무하마드 유누스'는 다만 1만원, 10만원, 100만원이 필요하지만 담보나 신용이 없어 대출을 받지 못하는 빈민들에게 무담보 저리로 대출을 해주었다. 그런데 일반은행보다 훨씬 높은 상환율과 수익을 올려, 지금은 인도 곳곳에 지점을 가진 거대은행이 되었고, 그 자신은 노벨상을 받았다. 빈민은행은 빈민의 양심이 냉정한 자본주의 질서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며 현재 순항 중이다.

 

돈을 더욱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고, 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담보가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단순한 사실이다. 담보는 없지만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자본을 제공해 주어 성공을 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고 금융제도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사례이다.

 

부모의 노동으로 방치된 어린 아이들, 혹은 육아와 노동을 병행해야 하는 빈민층 여성들을 위한 네팔의 '술로 슈레스타 샤'의 공장 내 탁아소 사업도 인상적이다. 가난한 여성들을 모아 카펫을 만들어 공정무역을 통해 거래하는 사업을 시작한 그녀는, 여성들의 가장 큰 문제가 육아 문제임을 발견, 월급에서 일정비용을 받고 공장 내에 탁아소를 운영한다.

 

결국 아이들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여성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되자 노사 관계도 안정되었고, 생산성도 높아졌다. 공장 규모가 작아서 탁아소를 갖출 수 없는 곳에서는 작은 공장들을 모아서 탁아소를 만들었다. 또 그로인해 아이들을 교육할 여성들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다.

 

일이나 잘하고 나머지 개인적인 일은 월급을 받아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대부분의 사업주들, 사원의 복지를 배려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귀찮아하는, 아까워하는 사업주들의 태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며, 그것이 효율적이도 않음을 증명해 보이는 사례이다.

 

가장 놀라운 사례 중 하나는 인도의 '고빈다파 벤카타스와미'라는 의사이다. 백내장 전문의인 그는, 정해진 진료비를 낼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사람은 내도록 하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진료비를 받지 않는다. 또한 진료비를 다 낼 수 있는 형편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그 결과, 35% 정도의 사람이 일반적인 치료비를 부담하고 65%의 가난한 사람이 앞을 볼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비싼 가격에 수입하던 인공각막을 연구하여 자체 생산에 성공, 이전의 10분의 1 가격으로 대중화시켰다. 그로인해 환자가 더욱 많이 찾아오게 되자 시설을 현대화하는 대신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를 늘림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하는데 힘썼다. 그의 병실에는 한 의사를 두고 수술대가 양쪽에 있는데, 의사가 한 사람을 수술하고 나서 돌아서서 앉기만 하면 이미 대기 중이던 환자를 곧바로 수술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제 인도에는 적어도 백내장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작고 초라하지만 저렴하고 실력 있는 그의 병원이, 병원까지 올 차비가 없는 사람들을 찾아 시골 구석구석으로 번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높게 올리는 대신 낮지만 넓게 뻗어가는 그의 사례는 놀랍기만 하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태양력 집열판 소자를 개발하는 과학자, 박테리아로 플라스틱을 만드는 화학자, 천적을 이용한 완벽한 병충해 방지 시스템을 만들어 낸 농부 출신 기업가, 바다거북을 관광자원으로 만들어 자연과 경제를 동시에 살린 정치인, 캠페인 드라마로 아프리카의 위생관념을 바꿔나가는 프로듀서 등...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해 사업을 성공적으로 지속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 모든 사업은, 만약 그들이 더욱 쉽게 많은 돈을 벌려고만 생각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사업들이다. 윤리적 사명감과 사업적 확인이 없었다면 이겨내기 어려웠을 고비도 많았다는 사실이 인터뷰 곳곳에서 발견된다. 모두들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며, 나아가 성공 해야만 하는 사업'이라는 생각이 어려울 때마다 결정적인 힘이 되어주었다고 말한다.

 

누군가 "난 가난이 싫었고 그래서 성공했다"는 말을 한다면, 그에게는 그것이 성공신화일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가 부자가 되기 위해 부당하게 고통 받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랑스러운 성공신화가 아닐 것이다.

 

지구 방위대의 말단에 서다

 

이 여행기를 읽고는 너무나도 자명한 원칙들을 나부터도 잊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나는 관계의 기본을 잊고 살고 있었다. 의사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 은행은 돈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농민은 좋은 먹거리를 위해, 과학자는 자원과 환경을 살리기 위해, 사장은 직원들과 소비자를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고 다시, 환자는 의사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은 은행을 위해, 소비자는 농민을 위해, 직원은 사장과 회사를 위해,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도.

 

100분이건, 200분이건 토론은 실천을 위해 존재한다. 애석하게도 이 책에는 우리나라의 대안 기업가가 소개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도 대안 기업들이 있다. 이 책을 읽는다고 당장 내일부터 대안 기업가나 대안 기업의 직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올바른 소비는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 시작되고, 시장경제는 소비자의 소비에 따라 변화한다.

 

다음 선거는 아직 4년이나 남았지만, 나는 오늘도 소비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윤리적인 기업을 알아보고 가급적이면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을 사는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도전의 가장 말단에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여행기중독자 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

실벵 다르니 외 지음, 민병숙 옮김, 마고북스(2006)


태그:#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 #마고북스, #실벵 다르니, #바튜 르 루,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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