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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선전물, 일명 '삐라'는 추억이다 '삐라 한장에 공책 한권'. 삐라는 어린시절 추억의 물건이다. 공책을 얻기 위해 하루종일 삐라를 줍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너무 많이 모아서 경찰아저씨에게 오해받기도 했었다.
▲ 불온선전물, 일명 '삐라'는 추억이다 '삐라 한장에 공책 한권'. 삐라는 어린시절 추억의 물건이다. 공책을 얻기 위해 하루종일 삐라를 줍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너무 많이 모아서 경찰아저씨에게 오해받기도 했었다.
ⓒ 계룡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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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를 아시나요? 삐라는 일본말로 불온 선전물이라고도 부른다. 사전에는 북한에서도 삐라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전단'을 삐라라고 부른다고 한다. 삐라에 나타나있는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문구와 그림이 그 시대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시대상을 반영하는 추억의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북에 삐라를 보낸다?

최근에는 삐라를 구경하기도 힘들지만 내가 군생활하던 90년대 말까지만해도 전방부대에서는 가끔 접해 볼 수가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북으로 보내는 삐라도 있었다.

한 번은 비가 억세게 내린 후의 어느 여름날 북에서 내려온 부유물을 확인하기 위해 한탄강 수문으로 내려갔는데 봉지에 싸여 있는 물건 하나를 발견한 적이 있다. 탐지기가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폭발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물건을 건져 살펴보았더니 그 안에서 약간의 쌀과 과자 등 먹을 것과 심리전단이 들어있었다.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결과 우리 측에서 북으로 풍선을 통해 날려 보낸 것으로 강으로 떨어져 다시 우리 측으로 떠내려 온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나라에서도 북한에 삐라를 보내는구나. 북한에서만 뿌리는 줄 알았는데.'

전방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우리도 삐라를 보낸다는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대대본부에서 근무하다보니 중대급에서 보고되는 북한 삐라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빳빳한 종이에 사진이 곁들어진 칼라풀한 삐라도 있었고, 노란종이에 흑백으로 그림이나 글씨가 새겨진 단순한 삐라 등 다양한 형태의 삐라를 접해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도 여러 형태의 삐라를 보면서 가끔은 삐라를 줍던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기도 했었다.

심리전의 상징인 삐라와 얽힌 추억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만 해도 반공교육을 중요시하던 시기라 반공교육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승복을 내세워 이승복 추모 웅변대회, 글짓기대회, 표어 포스터 대회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공교육을 했다. 심지어 수학여행 코스에도 강원도 평창에 있는 이승복 기념관이 꼭 포함될 만큼 반공교육을 중요시했었다.

특히나 북한이 이러한 반공교육을 방해하고 심리전을 펼치기 위해 우리나라로 보낸 삐라는 그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공책과 연필을 받기 위한 어린이들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반공의식만 더욱 고취시켜주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삐라에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비하하고 미국을 마치 민족해방을 저해하는 악마로 표현하는 글과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으며, 북에서 뿌린 삐라의 양도 엄청나 바람을 타고 날아와 마을 여기저기에 많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학교나 관할 경찰서에서는 학생들에게 공책을 미끼(?)로 삐라 한 장당 공책 한권씩의 대가를 제공해 주기도 했었다.

한번은 초등학교 시절 시골 친구들과 함께 지금은 사라진 마을 앞 금강변에 하얗게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백사장에 놀러갔다가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는 삐라를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줄 알고 그 종이를 주워들었는데 자세하게 내용을 살펴보니 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전두환 대통령과 신군부세력을 비하하는 내용이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정권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 나와 있어 바로 삐라임을 직감하고 백사장을 돌며 삐라들을 줍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1km가 넘는 백사장을 전부 샅샅이 돌며 흩어져 있던 삐라를 줍던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친구들 제 각기의 손에는 수십여 장의 삐라가 들려져 있었다.

"이거 같다주면 공책도 많이 받겠다. 그치?"
"한 장에 공책 한권 준댔으니까 난 30권은 받겠다."
"나두 그 정도는 되는 거 같은디?"
"나두 나두."

다음날 공책 받을 생각을 하며 기분 좋게 학교에 등교했다. 때마침 그날 그동안 학교에서 모아놓았던 삐라를 회수해 가기 위해 학교와는 조금 떨어져 있던 관할 경찰서의 경찰관들이 학교로 왔다.

"애들아! 학교에다 (삐라)내면 공책도 얼마 안주니께 경찰아저씨한테 내자."
"그러자. 지난번에 보니까 ○○도 10장 주워서 냈는디 공책 3권 밖에 못 받았대잖어."

너무 많은 삐라를 신고해 경찰로부터 오해받기도

그렇게 해서 전날 같이 삐라를 주워 온 친구들은 경찰아저씨에게 직접 삐라를 전달하기로 합의하고는 이내 경찰아저씨에게 달려갔다.

"경찰아저씨! 삐라 주워온 거 신고하믄 한 장당 공책 한권 줘유?"
"그럼. 한 장에 한권 주지."
"그래유?"

(친구들이 모두 삐라를 한 움큼 건넨다)

"여기유 삐라. 한 삼십장쯤 될 건디유?"
"……."
"왜유? 얼렁 공책 줘유."
"니들 잠깐 아저씨 좀 보자."
"예? 왜유?"

친구들이 건네는 삐라를 보고 경찰아저씨의 인상이 갑자기 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들은 모두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경찰아저씨가 왜 그러는지 이유도 모른체 말이다.

잠시 후 경찰아저씨가 담임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우리 방향으로 다가오며 나와 친구들을 잠시 보자고 했다.

"니들 이거 다 어디서 났어?"
"우리 동네 백사장에서 주웠는데유."
"동네가 어딘데? 그런거 아직도 많아?"
"어제 우리가 다 주웠는데유. 지금은 별로 없을거에유."

간단하게 경찰아저씨가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을 하고는 별 일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경찰아저씨에게 물었다.

"근디 공책은 안 줘유?"
"니들이 주워온 게 너무 많아서 삐라 한 장당 공책 한 권씩은 못 주고 전부 다 공책 열권식은 줄게. 앞으로도 이런 거 있으면 곧바로 신고해라?"
"예. 고맙습니다."

너무 많은 삐라를 주워 와 잠시 오해 아닌 오해가 있었지만 나와 친구들은 전날 하루 종일 주운 삐라로 공책 열권씩 받았고, 학교가 끝난 뒤에는 집에 가서 부모님께 자랑하기도 했다.

문득 삐라 사진을 보고 삐라에 얽힌 어린 시절을 회상해봤지만 지금은 아무리 보려고 해도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을 만큼 보기 어려운 삐라가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일부분으로 기억될 것이다.


#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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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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