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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 치고 지리산 화엄사를 모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학창 시절 남도 땅으로 수학여행을 가면 빠지지 않는 필수 코스인데다, 국사나 미술 교과서에 삽화로 심심찮게 등장하고,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지리산 종주의 출발점인 까닭입니다.

화엄사는 전라남도 동부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로, 규모도 클 뿐더러 내로라는 수많은 국가 지정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의 대표 사찰입니다. 국보 제67호로 지정된 각황전을 비롯해,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4사자 3층석탑(제35호), 영산회괘불탱(제301호) 등 일일이 헤아리기도 벅찰 정도입니다.

워낙 유명한 절이다보니 사시사철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입구는 물론 주변은 일찍부터 '화엄사로 먹고 사는' 관광지로 탈바꿈되었습니다. 경내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약숫물이 대낮에도 얼어있을 만큼 추운 계절인데도 절 안 곳곳이 공사로 어수선합니다.

화엄사를 찾아온 이들 중에 불교의 교리나 문화재에 대한 심미안을 지닌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저 유명하다기에, 볼거리가 많다기에 들른 '장삼이사'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그러 하기에 문화재 앞에 '자상하게' 적혀있는 소갯글이 관광객 입장에서는 별로 '자상하게' 느껴지지 않고, 외려 애써 읽는 이를 기죽이는 현학적인 '행세'로 보일 뿐입니다.

그저 다녀갔다는 흔적이라도 남길 양으로 유명하다는 문화재 앞에 서서 셔터 몇 번 누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곤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찾아온대도 그런 모습은 별반 달라지지 않을 테고, 심지어는 관람 동선마저 같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가보니 그게 그거'라는 말과 함께.

새달의 첫날, 저 역시 '또' 화엄사를 찾았습니다. 내로라며 뽐내는 것 말고, 숨어 있는 볼거리를 찾아볼 작정이었습니다. 천 년 '묵은' 고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독특하면서도 보면 볼수록 정겹고 친근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광객들에게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그들을 (제 맘대로) 화엄사의 '마이너(minor) 8경'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일 뿐이지만, 화엄사를 식상해하는 분들에게 그 나름대로의 재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1경은 '보제루의 나무기둥과 주춧돌'입니다. 절 안마당에 오르기 전 만나게 되는 보제루는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아 부재의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예스러운 맛이 있습니다. 그 중 바닥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다듬지 않고 원목 그대로의 형태를 살려 무심하면서도 묵직한 느낌을 줍니다.

'그렝이 공법'이라는 당대 첨단 건축기술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 제1경. 보제루의 나무기둥과 주춧돌 '그렝이 공법'이라는 당대 첨단 건축기술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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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단연 압권은 기둥과 주춧돌이 만나는 면에 있습니다. 이른바 '그렝이 공법'이라는 당시 최첨단 기술이 동원된 작품입니다. 이는 주춧돌의 고르지 않은 면을 나무기둥에 그대로 반영해놓은 것으로, 웬만한 지진도 견딜 만큼 튼실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멋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습니다.

제2경은 '감각이 돋보이는 게시판의 이름'입니다. 여느 곳 같으면 멋없이 '게시판'이라고 이름 붙였을 텐데, 단청 곱게 입힌 단정한 기와 건물 벽에 '천안통(天眼通)'이라고 적힌 간판이 달려 있습니다. '천안통'이란 세상의 모든 현상을 꿰뚫어보는 초인적인 능력을 일컫는 불교 용어로, 곧 여기에 내걸린 게시물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바로 읽어낼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런 안내판에도 '의미'를 담으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무심한 필체도 멋스럽지만, 내건 게시물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제대로 읽으라는 뜻을 담고 있어 자꾸만 눈이 갑니다.
▲ 제2경. 화엄사 게시판 '천안통' 무심한 필체도 멋스럽지만, 내건 게시물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제대로 읽으라는 뜻을 담고 있어 자꾸만 눈이 갑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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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경은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떠올리게 하는 대웅전 석축'입니다. 석축의 면은 조그만 잡석 하나 없이 네모반듯하게 잘 다듬어 낸 장방형의 돌로 채워져 있는데 빈틈없이 쌓은 성벽 같습니다. 높이를 일정하게 하기 위해 크기가 제각각인 네모진 돌의 아귀를 맞추려다 보니 모서리를 각이 지게 깎아놓았는데, 워낙 정교해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습니다.

큼지막한 장방형 돌을 빈틈없이 끼워 맞추었는데,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 제3경. 화엄사 대웅전 석축 큼지막한 장방형 돌을 빈틈없이 끼워 맞추었는데,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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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경은 '원통전 앞 사자탑 안 돌사자의 표정'입니다. 각 귀퉁이 네 마리의 사자 표정이 모두 다른데, 특히 화엄사 안마당 쪽을 향한 사자의 그것은 집을 지키는 맹견의 컹컹거리는 모습을 조각한 듯 생동감이 넘칩니다. 표정도 그렇지만 사자의 몸이 약간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옆을 지날라치면 달려들어 물 것만 같습니다.

집을 지키는 맹견처럼 표정과 자세로 법당에 다가서는 관광객을 잔뜩 을러대고 있습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 건물이라는 각황전(국보 제67호)입니다.
▲ 제4경. 원통전 앞 사자탑의 돌사자 표정 집을 지키는 맹견처럼 표정과 자세로 법당에 다가서는 관광객을 잔뜩 을러대고 있습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 건물이라는 각황전(국보 제67호)입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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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경은 '각황전 앞 석등 지붕돌과 지리산 능선의 어울림'입니다. 6m가 넘는 이 석등은 곁에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웃한 각황전 기둥에 기대어 먼발치로 석등을 찬찬히 뜯어보노라면 지붕돌과 지리산 능선의 산세가 다른 듯 닮은 듯 잘 어울립니다. 육중하면서도 부드러운 산세를 뚫고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연꽃 봉우리 하나하고나 할까.

석등의 지붕돌은 부드러운 지리산 능선 사이로 피어오르는 한 떨기 연꽃입니다.
▲ 제5경. 지리산 능선과 각황전 앞 석등 지붕돌의 어울림 석등의 지붕돌은 부드러운 지리산 능선 사이로 피어오르는 한 떨기 연꽃입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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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경은 '4사자 3층 석탑 안의 인물상'입니다. 화엄사의 창건주인 연기조사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인물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두 팔로 아이를 정성스럽게 안고 있습니다. 네 마리의 사자의 호위를 받으며 품에 아이를 보살피고 있는 모습이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탑을 향해 무릎 꿇고 앉아 경배하는 공양상이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를 가슴에 품어 안은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어, 절인데도 흡사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 제6경. 4사자 3층석탑 안 인물상의 자애로운 모습. 어린 아이를 가슴에 품어 안은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어, 절인데도 흡사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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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경은 '구층암 암자의 뒷면 기둥'입니다. 구층암은 화엄사 대웅전 뒤로 난 길을 따라 100여 미터쯤 오르면 만나게 됩니다. 터가 제법 넓은 데다 많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잘 생긴 석탑 한 기와 번듯한 천불전과 요사채도 갖추고 있어, 웬만한 절 못지않은 규모입니다. 구층암 현판이 걸린 건물은 옹이가 곳곳에 드러난 기괴한 모양의 고목(枯木)이 떠받치고 있어 이채롭습니다. 자연스러운 멋을 소중히 여긴 선조들의 감각이자 지혜라지만, 매끈하게 다듬은 둥그런 기둥과 함께 쓰이고 있어, 도무지 그 의도를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왜 굳이 이런 고목을 기둥에 썼는지 의도를 알 수 없지만, 보면 볼수록 독특한 모습입니다.
▲ 제7경. 구층암의 고목 기둥 왜 굳이 이런 고목을 기둥에 썼는지 의도를 알 수 없지만, 보면 볼수록 독특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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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경은 '구층암 천불전 처마 밑에 매달린 토끼와 거북'입니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토끼와 거북 이야기는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중국, 일본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다 존재하는 공통 설화입니다.

천불전 처마 아래에 매달린 토끼와 거북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그 아래에 서서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 제8경. 구층암 천불전의 토끼와 거북 조각 천불전 처마 아래에 매달린 토끼와 거북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그 아래에 서서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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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의하면 불교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의 전생 관련 이야기 중에서 용왕의 부인이 원숭이의 염통을 먹고 싶어 했다는, 이른바 '용원(龍猿) 설화'가 그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천불전을 지은 목공이 왜 굳이 이 토끼와 거북을 새겨놓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교 교리에 문외한인 까닭이지만, 단지 익살맞은 조각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웃음 지을 수 있으니 애써 찾아볼 만하다 하겠습니다.

분명 지리산 화엄사는 한 번 가고 말, 그런 절은 아닙니다. 언제고 다시 찾은 기회가 있을 것이고, 그때 이전과는 다른 화엄사를 느끼려 한다면 이 '마이너 8경'을 참고하시길 권합니다. 하긴 지금 절 곳곳에 '새단장'이 한창이라 분위기가 어떻든 많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만.

덧붙이는 글 | 경내 울타리 공사 등 지리산 화엄사 곳곳이 조금 어수선하긴 해도, 아마 설 연휴에 찾아올 관광객을 맞이하려는 배려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화엄사, #지리산, #8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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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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