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800원이 어디 없을 까요?" "그건 왜?" "그냥요." 한참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등 뒤에 대고 막내아들 녀석이 뜬금없는 제안을 해온다.
"아빠, 그럼 200원 드릴 테니 천원 주시면 안 돼요?" "아니 왜 그러는지 말해보라니까." "내가 원하는 장난감 사려면 800원이 모자라서요." "그럼 좀 더 기다려서 돈 모으면 되겠네." "아이 아빠, 내일 사고 싶어요." 사실 그동안 누나로부터 용돈 받은 것과 동전 통(우리 부부는 막내아들에게 따로 용돈을 주지 않고 동전 통에다가 남은 동전을 넣어두면 막내아들이 모아서 쓰고 싶을 때 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어디에다 쓰든 무엇에 쓰든 전적으로 아들의 마음이다. 다만 어디에 썼는지를 물어볼 때만 대답해주면 된다)에 채워진 동전을 합해서 4700원이 된 게다. 그러니까 사고자 하는 장난감은 5500원인 것이다. '유희왕'이라는 카드 한 세트의 값이란다. 이렇게 나에게 거절당한 아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아내가 집에 돌아오니까 아내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나 몰래 비밀 이야기를 모자지간에 한다. 안 들어도 불을 본 듯 뻔한 이야기를 굳이 나 없는 데서 하려고 한다. 그러더니 아들이 내게 다시 온다. "아빠, 지금 이 돈은 학용품 등 더 소중한 걸 살 때 쓸 테니까 아빠가 장난감 사주셔요." "야. 이거 너의 생각이니?" "히히히히. 아뇨. 엄마의 생각인데요." "바다야. 너에게 소중한 건 장난감이니 학용품이니?" "그야 물론 장난감이죠." "그럼 그 돈으로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난감을 사거라." 이 말이 끝나자마자 아들은 "네"라며 얼굴에 미소를 하나 가득 뿜어낸다. 이 정도면 나의 주머니에서 800원이 나갈 법도 하지만, 그래도 아들 녀석이 어떻게 처리하나 두고 볼 심사다. 자기 스스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세상 살아가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능력이라는 걸 잘 안다는 나의 소신 때문이다. 이런 깊은(?) 뜻을 알 리 없는 아내는 역시 엄마의 모정을 발휘한다. 아들 녀석과 협상안을 놓고 협상한 것이다. 설거지를 하면 그 대가로 800원을 주겠다는 협상을 아내가 제시하고 아들 녀석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평소에 설거지나 방청소의 대가를 아이들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
하여튼 그제야 800원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길이 생긴 아들 녀석은 신났다. 평소 심부름을 시키면 잘하던 아이지만, 이번에는 그 질이 다르다. 자신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는 기쁨에 손놀림이 사뭇 가벼운 것이다. 초등 1학년 머슴애가 10년 살림꾼처럼 의젓하게 일을 잘해낸다. 문제가 생겼을 때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능력, 자신의 것을 쟁취하고 싶을 때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것보다 주위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능력, 타인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협상하는 능력, 자신의 정당한 노동과 노력으로 대가를 얻어내는 능력 등을 기르는 시험에서 막내아들 녀석이 통과한 셈이다. 오늘 따라 막내둥이가 참 커 보이는 것은 자신의 '새끼'이기 때문일까. 그동안 아들 녀석이 워낙 소심하여 종전까지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좀체 이야기하는 걸 어려워했다는 걸 잘 아는 우리 부부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아들 녀석의 생애 최초 협상과 타결이라는 열매를 앞에 둔 부모의 즐거움이라 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설거지에 한참인 막내둥이의 등 뒤에서 이런 행복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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