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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적으로 불어오는 자연 태풍은 우리에게 가끔씩 시련을 안겨주지만, '태(상)풍' 선생님은 우리 제자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를 깨우쳐주신 존재의 빛이었다.
▲ 지난 8월 교장직에서 정년퇴임하신 태상풍 선생님 주기적으로 불어오는 자연 태풍은 우리에게 가끔씩 시련을 안겨주지만, '태(상)풍' 선생님은 우리 제자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를 깨우쳐주신 존재의 빛이었다.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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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중등 교장직에서 정년 퇴임한 은사님께서 퇴임 후 한 달이 지나 저녁을 좀 먹자고 하셨다. 기쁜 마음에 달려가 퇴임 후 근황을 접했다. 일주일에 한번 대학에 강연을 나가고, 아침 저녁 규칙적인 운동으로 건강 관리도 잘 하고 계셨다.

맛나게 식사를 마치고 나자 은사님께서 무척 신중하게 말씀을 건네셨다.

“병춘아! 내가 부탁 좀 하나 하려고 한다.”
“아, 네에. 무슨 말씀이든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분부만 하십시오.”
“지금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이건 말야, 내가 혼자 결정한 사항도 아니고 가족회의를 다 거친 일이야. 내 둘째가 한 달 후에 결혼을 하는데 병춘이가 주례 좀 서 줘야겠다!”
“네에? 아이구 선생님, 다른 건 몰라도 주례만은 안 되겠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가족이 결정한 일이라니까!”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의 사회적 지위가 있잖아요. 제자가 예식을 집전하는 건 뭔가 모양새도 안 좋고 선생님 주변에 훌륭하신 분들이 섭섭해 하실 수도 있어요.”

“병춘아! 결혼을 내가 하나? 내 아들이 하는 거야. 내 아들이 동의하고 추천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해? 솔직히 내 주변에 대학 총장이니 국회의원이니 말만 하면 들어줄 친구들 많은데 결혼이란 게 무슨 과시하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좋아하는 제자가 주례를 선다는 데 뭐가 어떻다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 제 마음 안에서 선뜻 수용이 안 됩니다. 시간 많이 남아 있으니까 일주일 정도 고민할 시간을 주세요. 혹시라도 선생님께서도 마음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럼 잠정적으로 결정한 걸로 알고 일주일 후에 만나세. 부담 줘서 미안하네. 자네 알지? 난 맘 먹으면 쉽게 안 변한다는 거?”

그랬다. 필자의 고교 시절, 태상풍 선생님은 해병대 장교 출신에 체육 교사로서 ‘의리 빼면 시체다!’를 강조하시며 초창기 교내 기강을 확립하고 소위 문제아들이나 나쁜 쪽으로 힘깨나 쓴다는 제자들을 바른길로 인도해 주신 분이다.

성함에 걸맞게 태상풍 선생님의 카리스마는 ‘태풍’이 지나간 듯 웬만한 문제아들이 기를 못 폈다. 묘한 것은 선생님의 손길과 발길을 거쳐간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의리 넘치는 제자로 거듭났다는 사실이다.

지난 8월 정년퇴임식 때는 평일인데도 수많은 제자들이 참석해 명예롭게 은퇴하는 선생님을 환송했다. 퇴임식도 치르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교직원과 제자들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하셨다. 영광스럽게도 필자는 교직원을 대표하여 송별사를 해드렸다. 거의 보름 동안 송별사를 다듬고 고쳤다. 퇴임식 전날 마지막으로 송별사를 연습하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신기하게도 선생님의 가르침 안에는 참된 스승의 교육 철학을 전하는 마력이 존재했습니다. 그 마력은 다름 아닌 제자들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셨습니다.
▲ 지난 8월 29일 은사님 퇴임식 때 송별사를 드렸다. 신기하게도 선생님의 가르침 안에는 참된 스승의 교육 철학을 전하는 마력이 존재했습니다. 그 마력은 다름 아닌 제자들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셨습니다.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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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식 때 선생님은 아주 간단한 퇴임사를 하신 뒤 지난 교직 생활을 영상물로 제작하여 하객들에게 선보였다. 일반적으로 퇴임식장은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인데 선생님의 퇴임식은 달랐다. 선생님은 눈물을 애써 참으시며 가급적 웃으셨다. 틀에 박힌 의식이 아니라 색다른 퇴임식이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아들 결혼식 주례도 그랬다. 사회 저명 인사를 끌어들여 과시하거나 생색내는 듯한 주례보다는 평소 자신을 존경하는 제자이자 아들이 맘에 들어한다는 나에게 주례를 청했다.

일주일 후, 은사님의 전화가 왔다.

“내 맘에 변화 없으니까 부담 좀 가더라도 준비해 주게! 그리고 결혼 닷새 전에 신랑 신부와 상견례를 하세! 다시 말하지만 나보다는 내 아들을 위해 자네가 필요하다네.”
“선생님! 제겐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혼인 닷새 전에 한식당에서 은사님 내외와 신랑신부랑 상견례를 했다. 은사님은 환하게 웃으며 “어서 오십시오, 주례 선생님!”하시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지난 28일(일) 1시 50분, 주례를 서기 위해 예식장으로 갔다. 수많은 하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식장을 찾은 동료교사들, 제자들이 주례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가운데 제자인 내가 단상에 올랐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놀랐을까?

그동안 여섯 차례 제자들 주례를 선 경험이 있어서 크게 떨리진 않았지만 적당히 긴장하며 경건하게 예식을 집전했다. 염려했던 뒷자리 소란도 없었다. 예식을 마치자 은사님과 사모님께서 주례사 전문을 아드님께 꼭 전해달라고 하셨다. 마음이 통한 걸까? 성혼선언문 안에 이미 주례사를 넣어둔 뒤였다.

살다보면 뒤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많다. 주례는 대표적으로 자아성찰을 하게 한다. 교장직에서 물러난 은사님께서 아들 결혼식에 제자인 나를 주례로 선정한 것은 또 하나의 가르침이라고 믿는다. 더욱 견고하게 열정과 사랑으로 아이들 잘 가르치라는 선문답이 아니고 무엇이랴!

주례사 전문

오늘 신랑 태혁준 군과 신부 박성민 양의 성스러운 결혼식을 맞아 이렇게 왕림해주신 하객 여러분께 양가를 대신하여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아울러 이 복된 결혼이 있기까지 원만하게 준비해주신 신랑신부와 가족 친지 여러분께 하객을 대신하여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저는 신랑 태혁준 군의 아버님이신 태상풍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신랑의 아버님이자 저의 은사님이신 태상풍 선생님께서는 대전대신고등학교에 근무하시면서 극진한 제자 사랑으로 스승의 참모습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장장 35년 동안 대전대신중고등학교에 재직하시다 지난 8월에 교장직에서 정년 은퇴하신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감히 이 자리에 섰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신랑 태혁준 군과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도 하고 더욱 끈끈하게 인간적 교류를 하면서 살아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교직자로서 더욱 견고하게 잘 살아달라는 가르침도 담겨 있다고 믿어 더욱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오늘 주례를 맞아 신랑 신부에게 평생 잊지 못할 주례사로 답례하는 것이 도리이나 아직 삶의 경륜이 미흡하여 며칠 전 신랑 신부와 나눴던 대화를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하객 여러분!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하객 여러분들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 이 질문에 신부가 답했습니다. “사랑이란 배려와 책임”이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신랑이 말했습니다. “사랑이란 서로 믿는 것”이라고요.

신랑신부가 규정 지은 사랑의 의미를 합쳐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 배려하고 남편과 시부모께 책임감을 지니며 영원히 서로 믿고 사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신랑 신부는 이러한 사랑의 의미를 깊이 간직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리라 확신합니다.

신랑신부는 초등학교 동창생으로 졸업 후에 친구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의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지난 2년 전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마음 안에 평생 동반자라는 느낌을 단 한 차례도 지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객 여러분! 저는 신부에게 어머니의 의미에 관해 물었습니다.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신부의 어머니는 어려운 순간마다 더욱 강해지셨던 분이고 외형적으로 약해 보이지만 내면이 강한 분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주례로서 신부에게 제안합니다. 어머니가 주신 그 메시지를 잘 받들어 아내와 며느리 역할을 수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신랑에게 부모님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신랑이 대답했습니다. “존경합니다. 본받고 싶습니다. 자식으로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분입니다. 모든 면에서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나의 태양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천하장사보다 듬직한 신랑에게 제안합니다. 오직 한길 열정과 사랑으로 교직에 몸담아오신 부모님의 자취를 따라 자식으로서 효행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객 여러분! 지금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선남선녀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건실하게 교육 받은 신랑신부가 둘이 걸어도 하나의 발자욱으로 가는 곳마다 영향력 있는 삶의 향기가 넘쳐나리라 확신합니다.

하객 여러분! 이제 박수를 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훌륭하신 부모님의 뜻을 받들고 섬기며 신랑은 공직자로서 신부는 유치원 교사로서 우리 신랑신부가 소망하는 일들이 알차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례사를 맺으려 합니다. 저에게 자식이 셋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랑신부! 7인승 9인승 자동차를 타고 가족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힘 있는 데까지 분발하여 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오늘 지상에서 가장 신성하고 복된 모습으로 신랑신부가 아름다운 동행을 시작합니다. 이제 둘이 걸어도 한 발자욱입니다.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 두 분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10월 28일 주례 박병춘


태그:#퇴임식, #송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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