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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토요일 아침, 까치 울음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우편배달부가 반가운 우편물을 전해주고 갔다. 적도를 건너온 그 우편물에는 ‘대한민국우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고 10월 1일 날짜가 선명했다. 발송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남반구의 작은 섬나라까지 날아든 그 우편물의 발신인은 강구원.

 

드디어 왔구나! 반가운 마음이 왈칵 손끝으로 몰려서 봉투를 뜯는 손길이 나답지 않게 급해졌다. 서둘러 개봉한 봉투 속에서 나온 것은 CD 3장. 최근 작업을 마친 자신의 세 번째 앨범 2장과 함께 2년 전 ‘uncle k’ 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던 2집 앨범 1장을 보내온 것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앨범 자켓 표지 속 그의 얼굴들이 몹시도 반가웠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얼굴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다니! 그 시절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났는데도 살이 좀 오른 것 말고는 거의 변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일부러 연출하고 분장을 한 탓도 있겠지만 이번에 내는 세 번째 앨범의 얼굴은 오히려 더 어려져서 개구쟁이 악동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얼굴 밑에 자필로 쓰고 서명한 그의 글을 읽고 있자니, 그의 묵직하면서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나를 부르는 호칭이 ‘정 선배’에서 ‘철용 선배’로 바뀌기는 했어도, 퇴근 후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던 그 시절이 기억 속에 아련히 떠올랐다.

 

2.

 

그를 처음 만난 것이 1988년이니, 벌써 거의 20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모재벌그룹 산하 손해보험회사의 교육부에 근무하면서 교육 기획과 진행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담당했던 대졸신입사원 입문교육과정 교육생이었다.

 

대졸신입사원 입문 교육의 기획과 진행은 내게는 다소 버거운 업무였다. 당시 나 자신이 직장 생활 1년을 아직 채우지 못하고 있던 신입사원이었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6개월 방위로 병역을 마친 나는 남들보다 2~3년 앞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기에, 대졸신입사원 입문교육의 교육생들은 거의 대부분 나보다 최소한 두세 살 위였다.

 

그런데도 내 직속 과장은, 갓 입사한 대졸 신입사원들을 직장인으로 무장시키는 중차대한 업무를 내게 맡겼다. 다행스럽게도 제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내 노숙한 얼굴 덕분에 나는 제법 고참 선배 행세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달에 걸친 교육 과정이 끝나갈 때쯤 해서는 그들 역시 내가 새파란 신입사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무서운 것이 ‘짠밥’이라고 6개월 정도 일찍 회사 밥을 먹었지만 나이는 더 어린 나를, 그들은 교육을 마치고 부서로 배치받은 후에도 꼬박꼬박 ‘정 선배’라고 불러주었다. 나보다 두 살이 위였던 강구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꺼려했던 교육부에 자원해서 기꺼이 나의 ‘쫄따구’가 되어 주었다. 경험도 별로 없고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선배의 밑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 많이 찜찜했을 텐데도, 그는 내가 있는 교육부를 선택한 것이다. 덕택에 나는 직장 생활을 한 지 6개월도 안 되어 부서의 막내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회사 업무를 처음부터 배워나가는 신입사원이라는 처지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그나 나나 마찬가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깍듯하게 나를 선배로 대우했다. 이제 그냥 너나들이로 지내자고 해도, 그는 나를 ‘정 선배’라고 불렀다.

 

우리가 맡은 교육부 업무 중에는 보따리 장사꾼처럼 교재와 교육기자재를 싸 들고 사무실과 연수원을 들락날락거리며 합숙 교육을 진행해야 하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연수원에서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야근 아닌 야근을 해야 하는 합숙 교육과 하루도 쉴 여유가 없이 밀려드는 빡빡한 회사 업무에 우리는 진저리를 쳤다.

 

늦은 퇴근 후에 회사 근처 생맥주 호프집과 돼지갈비집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시인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던 나였다. 이런 식의 월급쟁이 직장인으로는 도저히 시인의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서 나는 그 해 여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사표를 냈다.

 

그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목소리가 저음인데도 참 맑은 목소리여서 노래를 부르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들어보니 그의 노래는 아마추어의 솜씨를 벗어난 것이었다. 기타도 제법 잘 쳐서, 언젠가는 롯데호텔 뒤편의 노천 카페에 마련된 무대에 올라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 기억도 난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나자, 서로 자주 연락하면서 지내자고 했던 약속과는 달리, 그의 호소력 있는 노래도, 묵직하면서도 나긋하게 ‘정 선배’라고 부르던 그의 목소리도 금세 잊혀지고 말았다. 몇 년 후, TV 화면에 비친 그의 얼굴을 흘낏 보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 ‘떠나가 볼까’를 듣고서야 그 역시 회사를 그만두고 가수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정식 앨범을 낸 가수가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여전히 시인지망생이었던 나는 열패감 비슷한 것을 느꼈지만 행운과 성공을 비는 마음으로 그의 노래 테이프를 하나 사서 들었다. 그러나 꽤 괜찮은 노래 ‘떠나가 볼까’는 잠깐 히트를 치는 듯하더니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그 노랫말처럼 ‘내 뜻대로 살다 보면 한숨도 나고 어쩌다가 하늘 보면 웃음도 나’는 한국에서의 삶이 지겨워져서 ‘나만의 세상 찾아서’ 이곳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다. ‘저 멀리 젊음 실은 파도 타고’ 그의 소식이 이곳까지 들려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살고 있었다.

 

3.

 

그의 소식을 전해준 것은 <오마이뉴스>였다. 나는 이곳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시민기자로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에서 활동중인 시민기자들이 쓴 기사들을 눈여겨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에서 활동중인 강구섭 기자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마흔셋에 첫 라이브 콘서트를 하는, 왕년의 가수였던 자신의 형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사에 사진은 없었어도 나는 그 주인공이 바로 20년 전 나와 함께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바로 그 강구원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기사를 쓴 기자와 성도 같고 이름의 가운데 돌림자도 같으니 맞을 확률 99%였다.

 

그래도 그 모자란 1%가 조심스러워서 나는 강 기자에게 쪽지를 보내 확인을 했다. 형이 운영하는 다음 카페 주소를 함께 적은 답신이 왔다. 카페를 방문해 보았더니 그 강구원이 맞았다. 다시 보게 된 그의 얼굴이 몹시 반가웠다.

 

하지만 그 동안 연락 없이 지냈던 오랜 세월만큼이나 지리적으로도 떨어져 있는 처지라 그저 그의 동생 강 기자 편에 안부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반가움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넉 달 후, 자신의 형이 마흔셋에 첫 라이브 콘서트를 하게 된 숨은 사연을 밝히는 강 기자의 후속 기사가 올라왔다.

 

사연인즉, 왕년에 앨범까지 낸 가수랍시고 형이 동네 노래자랑 대회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미리 감정을 잡는답시고 무대에 오르기 전에 소주 한 병과 포도주 반 병을 마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마흔을 넘은 그의 체력은 그 정도 주량을 맨 정신으로 감당해내기에는 무리였고 결국 무대에서 흐느적거리다 노래 한 곡도 제대로 못 끝내고 진행요원의 부축을 받고 내려오는 망신을 당했다는 것. 그걸 만회하기 위하여 정식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라이브 콘서트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는 아주 코믹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내용이었다.

 

나는 그 기사에 댓글을 달아, 망신을 성공적인 라이브 콘서트로 훌륭하게 만회한 것을 축하해 주었다. 그저 그것이 그에게는 훗날 즐겁게 되돌아볼 수 있는 한때의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로부터 약 2년 뒤에 뒤늦게 찾아 읽은 강 기자의 후속 기사는 그런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일회성 라이브 콘서트에 그치지 않고 2집 앨범까지 제작하는 등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선 형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마흔 넘어서도 아직도 젊은 날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이가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새로 발표한 그의 노래가 듣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는 마흔 중반에 다시 젊은 날의 꿈을 찾아 새롭게 시작하는 자의 뜨거운 열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나는 그의 다음 카페 <uncle. k의 음악이야기>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지난해 10월의 일이었다.

 

 

4.

 

그렇게 해서 20년만에 다시 소식을 주고 받게 된 그가 이번에 새로 발표하는 그의 세 번째 앨범을 멀리 이곳까지 보내준 것이었다. 그런데 앨범 표지에는 3집이 아니라 2.5집이라고 적혀 있다. 거의 신곡으로 채워졌던 1집과 2집과는 달리 이번 앨범에는 신곡 반, 리메이크 곡이 반이라 그렇게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2.5집이라는 의미에는, 2집에서는 재기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조바심 내지 말고 욕심도 내지 말고 그저 반 걸음만 내밀어서 조금씩 조금씩 다시 나아가보자는 다짐과 결의도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 것이다. 앨범 내지의 마지막 페이지에 그가 쓴 에필로그를 읽으면서 나는 그의 그런 다짐과 결의를 분명하게 읽었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여전히 무명인 내가 세 번째 앨범을 만든다는 사실에 진심 어린 우려를 표해 준 많은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아니, 내 나이가 어때서?”


사십대란 나이는 어떤 일을 시도하기에 여전히 멋지고도 아름다운 때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그림을 그리고, 또 다른 이는 글을 쓰듯이 나는 노래한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나의 음악들은 계속될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토요일 오후, 나는 그의 앨범들을 오디오 세트에 걸어 넣고 1집부터 2.5집까지 차례대로 들었다. 삼십대 초반부터 사십대 중반까지 걸쳐 있는 그의 목소리는 아, 여전히 청춘이었다.

 

우리에게 꿈이 있는 한, 꿈을 이루려는 도전이 있는 한, 우리의 청춘에는 유효기간이 없음을 그의 목소리는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가 나이 들면서 슬픈 것은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꿀 꿈이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의 노래는 들려주고 있었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나는 마음 속에서 마흔이 넘은 무명가수에게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아니, 그는 적어도 내게는 더 이상 무명가수가 아니었다. 이번 앨범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열렬한 박수갈채로 기억되는 가수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세 시간 정도 그렇게 그의 음악을 듣고 있는 동안, 올해 문예지 두 곳에 그 동안 쓴 시들을 골라 자신만만하게 응모했으나 보기 좋게 낙방해서 빛이 바래져 있던 내 오랜 시인의 꿈이 다시 내 마음 속에서 환한 불꽃이 되어 피어 올랐다. 마흔을 넘은 무명가수에게 보낸 박수갈채는 내 스스로에게 보내는 격려의 박수갈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친구여, 이제 더 이상 나를 ‘선배’라고 부르지 말게나.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함께 가는 동무일 뿐, 꿈의 내용은 달라도 아직도 젊은 날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은 청춘일 뿐이니 말이다.


#강구원#마흔의 꿈#오클랜드 하늘에 뜨는 무지개#엉클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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