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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7월 호찌민에서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이남원씨(사진 왼쪽)와 신랑 김인회씨-신부 헝데이 김 윙양 담샘공원에서 야외 촬영을 했다.
ⓒ 마동욱
레곡휴씨집에서 하룻밤을 묶은 다음날인 7월 31일. 호찌민 담샘공원에서 결혼식이 있어 우리 일행은 호찌민으로 돌아왔다.

우리를 안내한 이남원(60)씨는 전남 장흥이 고향이며 베트남에서 7년을 살고 있다. 이씨는 여행사를 하면서 베트남 여성과 한국 농촌총각의 결혼식도 주선하고 있다. 그는 본업이 여행업이고, 결혼은 종종 봉사하는 차원에서 조금씩 알선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하는 결혼식 못지않게 베트남 전통식 결혼을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하루에 70∼80쌍의 결혼식이 호찌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한국의 언론이 종종 국제결혼의 부정적인 기사를 내보내면서 어려움이 있기도 하다"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결혼을 하는데 모두가 다 만족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이씨는 "자신이 성사시킨 결혼은 실패를 보지 않았다"며 "정직한 결혼이 행복의 가장 큰 조건"이라고 말했다.

▲ 2007년 19살 신부와 36살 새 신랑은 무척 즐거움에 젖어있다.
ⓒ 마동욱
담샘공원 식당에서는 한국인과 베트남 여성의 결혼식이 끝나고 베트남 가수의 한국노래가 연주되고 있었다. 이씨가 주선한 충청도 당진에서 온 김인회(36)씨와 헝데이김 윙(19)양의 결혼식이었다. 먼저 담샘공원에서 결혼식의 야외촬영이 끝나고, 베트남식 전통 결혼식을 식당에서 했다.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된 김씨는 포크레인 일을 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싶었지만, 결혼 적령기가 끝나서인지 노총각이 (한국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여성들의 요구조건을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명절 때만 되면 가족들이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자꾸 되물어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결혼을 하겠다고 한 여성들도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여성들과 맞선도 들어오지 않아 주변에서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한 친구를 보면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 2007년 7월 새 신랑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 신부는 "한국인 신랑이 무척 착하다는 것을 단 하루만에 알았다"고 말했다.
ⓒ 마동욱
김씨는 어머님께는 말했지만 친구들이나 친지들에게 알리지 않고 왔는데, 기사가 나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는 기사가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었다.

그의 결혼식의 야외 촬영을 한 베트남 사진기사와 비디오기사는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을 사진 촬영했는지 한국말로 포즈를 유도하면서 촬영을 하였다.

베트남 전통 결혼식은 베트남 전통 의상을 입고 시작되었으며, 신랑 측에서는 이남원씨가 신랑 아버지역을 하였다. 단신으로 베트남에 찾아와 단 하루만에 결혼식을 혼자서 올리는 쓸쓸한 김인회씨는 베트남 남녀 가수들이 불러주는 한국노래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결혼식을 겨우 마쳤다.

쓸쓸한 한국인 신랑과는 달리 헝데이김 윙양은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으로 신랑을 위로하고 있었다.

▲ 2007년 7월 베트남 사진기사와 비디오기사는 한국인 신랑을 얼마나 많이 촬영했는지 야외촬영내내 한국말을 섞어가며 연출을 했다.
ⓒ 마동욱
결혼식이 끝났지만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함께 살 수 있다

결혼식이 끝난 부부는 빠르면 3개월 늦으면 1년까지도 기다려야 한다. 결혼식은 했지만 서류를 만들어 베트남 정부와 한국영사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국제결혼을 주선하는 중개업소에서는 상당히 많은 수수료를 신랑에게 받는다고 말했다.

지난 4월 24일 이남원씨의 소개로 호찌민에서 결혼식을 했다는 전남 신안군 비금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전성호(45)씨는 한국대사관에 인터뷰를 하기 위해 다시 베트남을 찾아왔으며, 하루라도 빨리 신부 누엔 티우(25)씨를 데리고 한국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아 결혼을 서둘렀는데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에게 어쩌면 신부를 보여 드리지 못할까 그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 2007년 7월 전남 신안에서 건너온 새 신랑 전성호씨와 신부 누엔티우씨가 3개월만에 다시 만났다. 그들은 4일 동안 결혼식 서류일로 호텔을 잠시 나갔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호텔방에 머물고 있었다. 신랑은 신부가 너무 좋다며 매우 만족해 하였다.
ⓒ 마동욱
전씨 역시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고향인 신안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어서인지 도무지 결혼을 할 대상이 없어 결국 베트남 여성을 선택했다고 한다. 전씨는 "결혼을 하고 몇 번 만나보니 베트남 신부가 마음에 든다"며 "호텔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고 며칠을 방 속에 갇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신부를 데리고 한국에 가면 정말 행복한 가정을 이루겠다고 다짐을 했다.

8월 5일 돌아오는 길에 호찌민 공항에는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부부가 베트남 가족들과 옹기종기 앉아 있는 모습들이 많았다. 한 부부에게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터뷰를 요청하며 명함을 내밀자, 그는 갑자기 인상이 달라지면서 인터뷰를 사절했다. 충남 천안에 살고 있다는 그는 '언론'이라는 말에 자신의 아내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다며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는 말까지 하면서 극구 사절을 하여 공식 인터뷰는 하지 못했다. 그의 표정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자주 그와 마주치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 2007년 7월 신랑은 신부의 손에 준비한 반지를 끼어주었다.
ⓒ 마동욱
베트남 정부에서는 불법적인 국제결혼을 법으로 단속하기도 한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처녀의 독신자증명은 단 한 번 발행하기 때문에 독신자증명서를 잊어버린 신부는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 또 신랑 신부의 건강을 병원에서 검사하고 난 후 결혼을 인정한다고 한다. 특히 한국영사관에서는 신랑과 신부를 불러 인터뷰를 하는데 부정한 결혼일 경우 허가를 해주지 않아 한국으로 영영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

베트남 정부는 중개업체에서 베트남 신부감을 40∼50명씩 한 곳에 모아놓고 한국인 남성을 초청하여 맞선을 보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중개업체에서는 농촌에서 베트남 처녀를 물색하여 한 곳으로 모으는 역할을 하는 마담들이 있고, 한국에서는 결혼을 못한 노총각들을 모집하여 집단으로 결혼식을 하기도 한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그런 사례가 발견되면 엄청난 벌금을 물리고 쇠고랑까지 찬다고 하여 결혼 중개업소에서는 공식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러나 얼굴과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 2007년 7월 신랑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남원씨가 신랑의 아버지역할을 했다.
ⓒ 마동욱
베트남 농촌 여성과 한국 농촌의 노총각들이 베트남을 오가며 결혼식을 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이주 여성에 대한 문제에 새롭게 접근하여 결혼 이후의 안정된 정착을 유도하고, 서로 다른 문화 차이와 언어의 장벽을 해결하는 데 지속적인 교육과 관심이 잇따랐으면 하고 바라본다.

베트남에서 만난 교민들은 국제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특히 교민들은 대부분 결혼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은 한국 남성에게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여성들의 근면성과 착함, 그리고 가족에 대한 희생이 한국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베트남 여성들이 일을 하려는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며, 한국인 남성의 지나친 우월감에서 나온 욕설과 폭행이 국제결혼을 파행으로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 2007년 7월 베트남 전통식 결혼에서는 꼭 공연이 진행된다고 한다.
ⓒ 마동욱
결혼 중개를 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만난 어떤 분은 "캄보디아와 중국, 몽골여성들을 한국 남성에게 소개하다가 이제 베트남 여성만을 소개하게 되었다"며 "베트남 여성들의 성공률이 가장 좋고, 수백 쌍을 결혼시켰다"면서 실패한 두 사례를 말해주었다.

실패의 한 원인은 남성이 성불구이며, 또 하나는 거짓으로 자신의 이력을 전해 들통이 난 사례라고 했다. 그래서 그 역시 한국 남성을 선택할 때 무척 세심하게 알아본 후 소개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한국인 남성이 장애인일 경우도 중매를 알선했다고 말했다. 먼저 베트남 신부 측에 신랑의 장애 사실을 알리고 상당한 금액을 신부 측에 지급하고 베트남 신부를 데려오기도 한다고 말해 주었다.

▲ 2007년 7월 신랑 신부는 잔에 결혼 축하주를 따랐다. 신랑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 마동욱
베트남에서 국제결혼에 관련된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결혼이 상품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스치면서 마음이 아파졌다. 그러나 외국인 여성과 행복한 결혼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한국 남성들이 많아지고 있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곳 장흥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농촌 지역엔 머나먼 나라에서 오직 남자 한 사람을 믿고 시집온 이주여성들이 점차 늘어난다. 이제 그분들에게 따뜻한 시선과 2세들에 대한 보이지 않은 차별을 했다면 이제라도 따뜻한 눈빛으로 그들을 감싸주면 참 좋을 것 같다.

▲ 2007년 7월 결혼식이 끝나고 가족들과 함께 결혼사진을 촬영했다. 결혼사진은 베트남 정부와 우리 영사관에 반드시 제출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진을 꼭 촬영한다고 했다.
ⓒ 마동욱

태그:#베트남, #호찌민, #국제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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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장흥군 마을과 사람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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