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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7월 베트남 호찌민 공항에 마중 나온 마채인씨 처가 가족들.
ⓒ 마동욱
베트남 호찌민의 남쪽 껀터성에서 만난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이 희망의 땅이었다.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5일까지 일주일 동안 6촌 형인 마채인(50)씨 부부와 조카인 진아(3) 가족을 대동하고 베트남에 다녀왔다. 이번 여행은 목포문화방송의 <이주 여성 함께하는 이웃>이라는 프로그램에 6촌 형인 채인씨를 소개하면서 계획됐다. 나는 김희준 PD의 권유로 함께 동행을 하였다.

이곳 전남 장흥에서도 이주 여성과 우리나라 농촌 총각의 결혼은 2007년 7월 현재 약 120쌍 정도라고 6년 전에 필리핀 여성과 결혼을 하여 3명의 딸을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고환석(46·용산면 운주리)씨는 말했다. 그에 따르면 3년 전만 해도 필리핀 여성이 많았지만 현재는 베트남 여성과 장흥의 농촌 총각이 결혼을 많이 하는 추세라고 한다.

이주 여성의 문제는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와 언어의 장벽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데 많은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 이에 장흥군에서는 이주 여성을 돕기 위해 한국문화와 한국말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을 장흥복지관을 통해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 2007년 7월 베트남 껀터성 동휩마을에서. 왼쪽부터 웨팅 미하(32)양, 레곡휴(29)씨와 그의 남편 마채인(50)씨.
ⓒ 마채인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하여 비교적 성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채인씨는 결혼 소개업소의 소개로 지난 2002년 6월 15일 베트남 호찌민에서 지금의 아내 레곡휴(29)씨를 만나 결혼을 하였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상당한 시간을 아들과 함께 살면서 우리나라 여성과 재혼을 약속하기도 했는데, 결국 재혼에 성공하지 못하고 마음에 상처만을 남겼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베트남의 젊은 여성과의 결혼을 의뢰받고 상당한 시간을 고민했지만, 가까운 지인들이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굳혀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 레곡휴씨와 채인씨는 20년이 넘은 나이 차이가 있는데도 결혼 생활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단지 처음에 언어와 서로 다른 문화 차이로 많은 오해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베트남 말을 공부하고 아내 역시 한국말을 배우는 데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 다른 가정에 비해 빠른 시간에 언어가 소통되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그러면서 베트남의 처가에도 일 년에 1∼2번씩 다녀오게 되었다고 한다.

▲ 2007년 7월 레곡휴의 남동생 레곡 티마(19)군이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집안에 가득한 야자수 나무에서 야자수를 따와 구멍을 뚫어 우리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 마동욱
지난 7월 29일 우리 일행이 출국하는 인천공항에서는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하기 위해 출국하는 30∼40대의 한국 농촌 총각과 이미 결혼을 한 베트남 사위들이 베트남 여성과 함께 출국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저녁 8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호찌민 시각 새벽 1시에 도착하였다. 호찌민 공항은 한국에서 찾아오는 한국인 사위를 마중 나온 베트남의 농촌지역에서 온 대가족들로 매우 붐비고 있었다. 채인씨의 처가 가족들 10명도 농촌지역인 껀터성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5시간을 달려 마중을 나왔다고 했다.

그의 베트남 처가는 호찌민시의 남쪽에 있는 농촌 마을로 3년 전부터 한국으로 시집을 오는 처녀들이 가장 많은 고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농촌 총각들이 외국의 여성들과 결혼을 많이 하는 것처럼 껀터성의 농촌처녀들 대부분이 대만, 필리핀 등의 남성들과 결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다 5∼6년 전부터 한국 남성과의 결혼이 급격하게 많아지고 있다고 채인씨는 설명을 해주었다.

▲ 2007년 7월 레곡휴씨의 집 3년 전에 한국인 신랑 마채인씨가 1만달러를 보내주어 새로 집을 지었다고 했다.
ⓒ 마동욱
지난 7월 30일 새벽 1시에 도착한 호찌민 공항에는 10명의 채인씨 처가 가족들이 외국인 사위를 빨리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60∼70년대에 가족이 해외를 나가거나 입국할 때 공항으로 가족들이 마중과 배웅을 나가는 풍경이 연상되는 장면들이 공항의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었다.

레곡휴씨의 가족들은 5개월만에 만났지만 수십 년만에 만난 것처럼 너무나 뜨겁게 서로 포옹하였다.

레곡휴씨의 부모님은 한국인 사위 덕분에 지난 2007년 2월까지 6개월 동안 한국의 사위 집에서 딸 가족들과 함께 지냈는데, 손녀딸인 진아가 더욱 보고 싶었다며 3살짜리 손녀를 껴안고 좋아했다. 진아는 한국말을 제법 잘하지만 베트남 말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베트남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신을 예뻐하고 있는지 알아채고 말도 통하지 않지만 어린양을 했다.

우리 일행이 탄 작은 버스는 3시간쯤 육로를 달리다가 메콩강의 한 지류인 꽤 큰 강에 다다라서는 배로 건넜다. 강을 건너고도 2시간을 넘게 베트남의 남쪽 지방인 껀터성 동휩이라는 농촌마을로 버스는 달렸다. 차장 밖에는 이른 새벽의 찬란한 빛의 잔치가 야자수나무 잎에 비치면서 영화 속에서 본 베트남 전쟁의 상흔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겨우 5개월만에 만난 모녀는 그리도 반가운지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대화를 나눴다. 이들의 따뜻하고 흐뭇한 목소리로 가족들의 사랑이 뜨겁게 전달되고 있었다.

베트남은 유독 가족들의 사랑이 지극하여 대가족이 한 집에 함께 모여 사는 것이 보통인데, 남자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면 결혼을 한 아들 내외가 먼저 집을 떠나고, 마지막 남은 자식이 부모님과 함께 생활한다. 하지만 대부분 가까운 거리에서 친족들이 함께 살아 친지들의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면서 가족 공동체가 잘 지켜지고 있다고 한다.

▲ 2007년 7월 레곡휴의 아버지 레곡 반(56)씨는 베트남 군대에서 장교로 퇴직을 했으며 캄보디아 전쟁에 나갔다고 한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처음 먹어보는 열대과일은 매우 다양한 맛을 느끼게 했다.
ⓒ 마동욱
동휩이라는 마을은 강과 도로를 따라 마을의 집들이 형성되어 있다. 집은 대부분 대나무와 야자수 나무로 기둥이 세워지고 물 야자수나무가 지붕을 덮고 있었다. 우리 농촌의 초가와 흡사하다. 그러나 열대지방이라서인지 집들의 높이가 매우 높았고, 집 내부는 대부분 개방이 되어 밖에서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새벽 6시가 조금 지나 도착한 레곡휴씨집에서는 오빠인 레곡중(31)씨 아내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레곡중씨와 동생인 레곡 티마(19)씨는 도착하기 바쁘게 외국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하겠다며 집안 가득한 과일나무에서 야자수를 따와 구멍을 뚫어 우리 일행에게 전달했다.

제주도에서 딱 한번 먹어보았던 야자수는 덤덤하고 맹숭맹숭하기만 했는데, 레곡중씨가 막 따온 야자수는 약간의 단맛도 있었으며, 한국에서 먹어본 야자수 맛과는 사뭇 달랐다. 상당히 큰 열매에서 나온 물을 모두 마셨다.

간단한 아침 식사가 끝나자 레곡휴씨 가족들은 집안의 과일나무에서 따온 갖가지 열대 과일들을 풍성하게 내놓고 먹기를 권유하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먹어보는 과일들을 선뜻 입에 넣을 수가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하나씩 맛을 보았다.

채인씨는 처가를 자주 방문한 까닭인지 주저하는 내게 "동생 맛있는 과일만 가져왔으니 마음껏 먹어봐"라고 했지만 한국에서처럼 쉽게 먹을 수가 없었다.

▲ 2007년 7월 레곡휴의 이웃에 살고 있는 처녀들이 한국으로 시집을 가고 싶다며 레곡휴의 집을 찾았다. 세명의 처녀들은 하나같이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 마동욱
"한국으로 시집가게 해주세요"

채인씨는 우리가 도착한 것을 알고 이웃에 살고 있는 처녀들이 올 거라고 했다.

"처가댁에 오면 이웃동네와 가까운 친지들까지 시집갈 딸을 데리고 오거나 사진을 가지고 찾아와 한국으로 시집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채인씨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지만 설마 외국까지 시집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처녀들이 찾아왔다.

3명의 처녀들은 레곡휴씨 집 근처에 살고 있는 처녀들이었다. 베트남에서 18∼21살이 결혼 적령기라고 한다. 한국으로 시집을 온 처녀들의 나이가 대부분 21살 정도인 것을 보면, 결혼 적령기를 놓인 처녀들이 베트남에서 신랑감을 찾지 못하여 외국으로 오기 때문인 것 같다.

21살인 레티 반곡양은 한국으로 시집가기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시집을 가 잘 살고 있는 레곡휴 언니를 볼 때마다 더더욱 한국인 남성을 자신의 반려자로 선택하고 싶으며, 신랑의 나이는 결혼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레티 반곡양에게 '어떻게 한국을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녀는 "TV를 통해 한국이 매우 잘 살고 있는 나라며 한국드라마를 보면 남성들이 잘 생기고 멋지며 가족을 위해 매우 헌신적이고 책임감이 강하고 아내 또한 매우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드라마를 마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 남성들이 꼭 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책임감이 강하고 아내를 드라마에서처럼 모두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믿고 싶으며 베트남 남성보다는 더 좋지 않겠느냐며 꼭 한국으로 시집을 가게 해달라고 말했다.

26살인 장디믄양은 레티 반곡과 거의 같은 생각이지만 나이만은 너무 많은 차이가 나지 않은 사람이면 좋을 것 같다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 2007년 7월 왼쪽부터 32살인 웨팅 미하, 21살인 레티 반곡, 26살인 장 디믄양.
ⓒ 마동욱
또 32살의 웨팅 미하양은 "베트남의 농촌 여성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대부분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한다"면서 "한국으로 시집을 가면 어떤 일이라도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미하양은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호찌민에 나가 직장 생활을 하며 돈을 벌었다"면서 "한국의 좋은 신랑감을 찾아 꼭 결혼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자신의 엄마와 함께 레곡휴씨 집을 찾아왔다.

우리 일행이 그녀의 집을 방문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자 흔쾌히 허락했다. 그녀를 따라 그녀가 살고 있는 집으로 나섰다. 그녀의 집은 레곡휴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다.

▲ 2007년 7월 웨팅미하양의 올케가 배를 끌고 강을 건너왔다.
ⓒ 마동욱
우리 일행이 배를 타기 위해 강가에 도착하자 건너편에서 작은 나무배를 한 여성이 노를 저으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를 태우려고 온 여성은 그녀의 올케라고 했다. 그녀의 올케와 3명의 남성과 2명의 여성들이 작은 배에 올라타자 작은 배는 기우뚱거렸다. 그녀의 올케와 베트남 여성들은 무서워하는 남성들을 보며 웃기 시작했다. 한국남성들이 착하고 강하다고 했던 베트남 여성들에게 결국 우리의 약한 모습을 들킨 셈이다.

작은 배는 금방이라도 노란 황토물 속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았지만 베트남 여성들은 너무나 태연하게 노를 저으며 나아갔다. 배는 작지만 모터가 달려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다고 했다. 베트남 여성들은 자신들이 어렸을 때 황토 빛 강물에서 목욕도 하고 음식도 씻으며 고기도 잡아먹었다고 하며 강 자랑을 했다.

배를 타고 채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웨팅 미하양의 집은 새로 짓고 있었다. 베트남의 농촌도 수익에 따라 현대식 주택이 많이 지어지고 있다고 레곡휴씨는 설명했다. 레곡휴씨의 집도 한국인 신랑이 3년 전에 새로 지어 주어 가족들이 사는데 무척 편리해졌다고 말했다.

▲ 2007년 7월 웨팅미하의 가족들은 우리에게 딸이 한국으로 시집가게 해달라고 말했다. 엄마와 아빠는 꼭 딸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 마동욱
웨팅 미하의 아버지가 외국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기쁘게 맞이하여 주었다. 왜 한국처럼 먼 나라로 딸을 시집을 보내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아버지는 말해주었다.

"딸이 어렸을 때부터 자주 한국으로 시집가겠다고 말했는데, 딸의 소원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부모님의 마음은 모두가 똑같은 것 같다. 자식들이 원하는 것이 꼭 성사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이 간절하게 느껴졌다.

웨팅 미하양은 그녀의 집을 이곳저곳 소개하면서 우리가 사진으로 담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3명의 베트남 농촌 여성들은 모두가 하나처럼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었으며, 착한 한국인 남편이 나타나 자신을 데려가 주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을 나와 다시 올케가 운행해주는 작은 쪽배를 타고 레곡휴 집으로 돌아왔는데, 또 한 처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곡휴의 할머니가 데리고 왔다고 했다. 그녀는 우리가 사진을 촬영하지 않자 할머니를 통해 자신도 사진을 촬영해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다. 마치 우리가 사진을 촬영하면 금방이라도 한국인 남편이 나타나리라 생각했을까, 순진한 베트남 농촌여성들의 가슴에 한국으로 시집올 부푼 꿈을 안겨주는 것은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친정 갈 생각에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 2007년 7월 레곡휴의 아버지 레곡 반씨가 과일을 한움큼 따왔다. 싱싱한 열대과일은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없었지만 싱싱함과 낮선 손님에게 따뜻한 인정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모습에서 무척 고마웠다.
ⓒ 마동욱
오후에는 레곡휴의 고모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채인씨는 처가에 올 때마다 매일 술에 취해 작년에는 강물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가 처가 친지들이 한국인 신랑에게 술을 무조건 접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베트남만 오면 친척집을 방문하여 매일 술에 취해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채인씨의 아내가 "물에 빠진 신랑에게 다시는 베트남 친정집에 오지 않겠다"고 했는데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식구들이 생각난다고 했으며, 이번에도 베트남 이야기가 나오자 가장 먼저 친정집에 올 생각에 잠도 못 자고 밥도 먹지 못했다고 전했다.

모터가 달린 작은 나무배를 타고 약 40분쯤을 달려 도착한 고모 댁은 엄청나게 넓은 농장을 가진 부잣집이었다. 고모의 중학생 딸은 고모 내외가 시내에 갔다고 설명하고는, 고모가 손님들이 온다고 닭을 잡으라고 했다면서 닭을 잡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간 채인씨 처남이 닭 잡은 일을 거들어 요리를 준비하였고, 잠시 후 고모 내외가 도착하여 우리 일행을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말이 서로 통하지 않은데도 무척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쭉쭉(천천히 조금씩 마시라는 베트남 말) 짬짬(원삿)을 외치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술을 못한 나는 쭉쭉과 나미(반절)만을 외치며 겨우 한 잔을 마셨다. 베트남 닭요리와 베트남의 술이 내게는 곤욕이었다.

서로 언어가 되지 않아 답답했지만 채인씨는 대부분의 베트남 말을 잘 알아듣고 우리에게 통역까지 해주었다. 작년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강물에 빠진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배를 잡고 웃었다.

"베트남에서 한국인 신랑은 황제처럼 대접을 받는다"고 채인씨는 말했다. 우리가 껀터성을 떠나고 일주일 동안 채인씨는 베트남 처가 댁의 친척집에 초대받고 처가로 찾아온 친척들과 매일 술을 마시며 즐거운 여름휴가를 보냈다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말했다.

덧붙이는 글 | 함께 취재를 했던 목포 문화방송에서는 오늘 밤, 8월 16일 밤 11시 <이주여성 함께하는 우리 이웃> 프로그램에 방송을 내보낸다. 인터넷 묵포문화방송에서 시청할 수 있으며, 생방송이 끝나면 17일 오전부터 다시보기를 통해 볼 수 있다고 한다.


태그:#베트남, #호찌민, #국제결혼, #이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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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장흥군 마을과 사람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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