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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부터 대다수 학교들이 여름방학에 들어간다. 방학이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방학과제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방학과제와 관련하여 마치 연례행사처럼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곤 한다.

"방학과제를 낼 때 표지를 만들어서 내는 사람은 점수를 깎습니다."
"아니, 왜요?"
"괜한 종이 낭비를 할 필요가 없잖아."
"중학교 때는 표지를 안 만들면 점수가 깎였는데요?"
"난 표지가 있으면 점수를 깎을 거야."

아직도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표정까지 판에 박은 듯하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잠시 이런 쓸쓸한 생각에 빠지는 것도 역시 연례행사 중 하나에 속한다.

'왜 아이들은 사회나 과학 등의 과목을 통해 환경보전의 필요성을 배웠을 터인데 종이를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얼른 납득하지 못하는 걸까?'

아이들과 대화를 해보면 환경보전에 대한 지식이 없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종이의 원료인 펄프가 대부분 지구의 산소탱크나 다름이 없는 열대우림의 나무들을 베어 만든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들과 함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한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해서도 상당수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검색어는 '열대우림'이다.

'동남아시아 ·아마존강 유역 ·아프리카 서해안 등지에 발달되어 있는 상록활엽수림을 열대우림이라 하는데, 지구상의 전 식물 중량의 50%인 약 9000억 톤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열대우림에서는 양질의 굵은 목재가 생산되기 때문에 삼림의 벌채가 심하여 표층토의 유출, 토사(土砂) 붕괴, 하천의 오탁(汚濁) 등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열대생물계에 관한 지식의 결핍으로 조림(造林)에 의한 삼림재생은 어려운 실정이다. 열대우림의 감소는 사막의 확대, 이상기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것의 방지를 위한 운동이 1957년부터 세계야생생물기금(WWF)과 국제자연보호동맹(IUCN)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광릉숲
ⓒ 오마이뉴스 권우성
열대우림은 지난 백 년간 놀라운 속도로 없어지고 있다. 물론 그것은 종이 사용의 급증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농사를 짓기 위한 땅이 필요해서, 열대 우림의 나무를 잘라 팔기 위해, 축산을 위해 열대 우림을 태우거나 갈아 없애다 보니 1초에 약 6000 제곱미터의 속도로 열대우림이 없어지고 있다. 특히 햄버거가 열대우림 감소의 주요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런 추세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불과 30년 후에는 지구의 허파인 모든 열대우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끔찍한 예언을 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모 학교 지구과학 교사가 수업시간에 지구의 온난화 현상과 생태계 파괴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실감나게 들려준다. 그는 특히 열대우림을 보존해야할 필요성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강조한다. 그리고 열대우림을 보전하기 위해 우리가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해오라고 숙제를 내준다. 학생들은 인터넷을 검색하여 자료를 모은 뒤에 그것을 출력하여 과제물을 제출한다.

지구과학 교사가 미리 만들어놓은 모범 답안에는 당연히 종이의 낭비가 열대우림의 파괴를 부추긴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학생들도 과제물에 열대우림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종이를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적시한다. 하지만 불과 몇 명을 빼고는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에는 모두 표지가 달려 있다. 교사도 이를 당연히 여기고 표지를 만들지 않은 학생들은 성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점수를 깎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실상 우리를 어처구니없게 하지는 않는다.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도 지구과학 교사는 별 탈 없이 지낼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우리 일반인(혹은 보통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이 논리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시험 끝나면 폐기처분되는 지식 '죽 쑤어 개 주는' 격

지식이란 지식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 그것이 삶(생활) 속에서 적용되고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지식은 생명을 얻게 된다. 이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망각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입시교육이다.

입시교육의 폐해는 우리의 상상력을 다 동원해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심각하다. 좀 점잖지 않은 표현을 쓴다면 '죽 쑤어 개 주는' 그런 격이다. 어렵사리 공부한 보람도 없이 시험이 끝나면 폐기처분되는 지식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입시공화국에서는 인간다운 아이들로 키워주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조차도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잠꼬대 정도로나 취급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무슨 사건만 터지면 요즘 아이들을 일컬어 기본도 없고 생각도 없는 아이들이라고 비난하기 일쑤다. 이런 요상한 풍토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이들에게 바른 지식을 심어 주어야할 사명을 지닌 교사로서 나는 그들과 자주 이런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다.

"선생님, 표지 만들면 정말 점수 깎으실 거예요?"
"그렇다니까 그러네. 너는 한 장이지만 우리나라 전체 학생을 따지면 수십만, 아니 수백만 장의 종이를 낭비하는 거야. 그만큼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짓을 했는데 당연히 점수를 깎아야지."

"그럼 제목이랑 이름이랑은 어디다가 써요?"
"맨 앞이나 맨 뒤에 쓰면 되지."
"아, 그러면 되겠구나."

아이들은 참 단순하다. 그래서 교사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가 중요하다. 이쯤해서 털어놓자면, 나는 지금까지 표지를 만들어서 낸 아이들의 점수를 깎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이유는? 단 한 명도 표지를 만들어서 낸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선생이 점수를 깎는다는데 힘들여 손해 볼 짓을 할 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가끔은 이런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도 있다.

"그럼 다른 선생님 숙제도 표지 없이 냅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만약 표지 없이 냈는데 점수를 깎으면 어떡해요?"
"그럼 표지를 만들어 내든가."
"그것은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짓이라면서요?"

아, 이럴 때 정말 난감하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야 지난 일이니까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는다고 해도 지금 함께 근무하는 동료교사들에게 누가 되는 일은 좀 곤란하다. 그렇다고 언제 날을 잡아 표지 없는 과제물을 받자고 캠페인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꼭 그렇게 생각할 일도 아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한 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러면 과연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

그것이 궁금하면서도 은근히 두려워지면 결국 나도 애써 표지 없는 과제물을 받으려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열대우림은 더욱 더 파괴될 것이고, 지구의 앞날에도 갈수록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겠지만 말이다. 물론 망국의 입시교육도 더욱 번창할 테고. 자라나는 우리의 꿈나무들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태그:#종이 낭비, #방학 과제물, #과제물 표지, #입시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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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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