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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아버지는 호연이(세살) 가 당신 성격을 닮았다고 좋아 하신다.
ⓒ 이민선

고향집에만 가면 잠이 쏟아진다. 평소 잠을 많이 자지 않는 편인데 어찌된 일인지 고향집에만 가면 '잠탱이'가 된다. 도착해서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고 난 다음부터 슬슬 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모처럼 만난 가족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꿈나라다.

"얘 아배야 일어나서 밥 먹어라, 사람은 밥을 든든히 먹어야 하는 거여."

밥 때가 되어 어머님이 성화를 부려야만 부스스 눈을 뜬다.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다. 난 저 말을 기상나팔소리처럼 들으면서 자랐다. 어머니는 "사람은 '밥힘'으로 사는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밥을 든든하게 먹어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때가 되면 꼭 밥을 챙겨 먹이려 애를 썼다.

지난 일요일(7월 8일)은 어머니의 일흔 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모처럼 가족들이 모이니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호연이(세 살)의 재롱에 아버지 어머니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호연이는 눈만 뜨면 계속 뛰어다닌다. 이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성격 급한 것이 당신을 꼭 빼다 박았다며 기뻐하신다.

어머니는 수십년 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다. 가족들이 모이기만 하면 풀어놓는 보따리다. 쉰 살이 넘은 큰 누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막내인 내 이야기까지 수십년 된 기억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이야기를 풀어 놓으신다.

어머니의 이야기보따리 속에 있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다.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들었으니 족히 수백 번은 될 것이다. 그런데도 늘 새롭다. 아마도 그 이야기를 듣는 내 마음가짐이 세월에 따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가 되기 전과 부모가 되고 난 후에 어머니 이야기를 듣는 느낌은 분명 달랐다.

7, 8월의 진녹색 들판이 싫었다

▲ 벼들이 커가는 7월의 들판
ⓒ 이민선

지금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중학교 졸업하고 집을 떠나기 전까지 내가 살았던 집이다.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곳도 부근에 있다. 지금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과 약 100m 정도 떨어져 있다. 한때는 이 집과 이 마을을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7, 8월의 진녹색 들판이 싫었다. 벼가 햇볕을 받고 커가는 동안 농촌 사람들은 허리가 휠 정도로 일을 해야 한다. 변변한 그늘 하나 없는 들판에서 밀짚모자만으로 햇볕을 가리며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힘든 일은 농약을 주는 일이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과 끝나고 난 후에는 여지없이 농약을 줘야 했다.

아버지가 혼자 농약을 주다가 논가에서 쓰러진 적이 있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옆집 아저씨 등에 엎여서 집안으로 들어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병원에 가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셨다. 병원비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속이 메스꺼워서 고통스러우면 병원에 가겠다며 소리소리 지르고 잠시 살만하면 다시 가지 않겠노라 고집을 부리셨다.

결국 아버지는 병원에 가지 않고 녹두 삶은 물을 마시고 토하기를 반복하며 농약 기운을 몸 밖으로 밀어냈다. 이때부터 난 집이 싫었다. 병원비를 아끼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가난이 싫었던 것이다.

땅거미만 지면 불빛 하나 보이지 않고 풀벌레와 개구리 울음소리만 들리는 고즈넉함도 싫었다. 지루하고 답답했다. 그리고 초가집 지붕 아래서 8식구가 모여 살며 아웅다웅 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큰형님 부부와 조카들, 부모님, 그리고 작은형과 내가 한 집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와 형수님은 고부간의 갈등으로 가끔씩 집안에 '분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을 함께 쓰고 있는 형님과 나도 가끔씩 문제를 일으켰다. 형님과 나는 여섯 살 차이였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형님은 스무 살이 넘은 청년이었다. 형님은 친구들이 많았다. 너그러운 성격 탓에 늘 친구들 발길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러나 형의 그런 성격 때문에 난 날마다 속이 터졌다. 그리고 숨이 막혔다. 형님 친구들은 거의 매일 밤 찾아와서 이슥하도록 노름을 하며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가끔 한번씩 폭발해서 형에게 대들면 몇 대 두들겨 맞은 다음 꽤 긴 시간 설교를 들어야 했다. 그때마다 난 공부를 도저히 할 수 없다며 혼자 쓸 수 있는 방을 달라고 생떼를 썼다. 부모님은 나를 달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성적이 어느 정도는 나와야 집을 떠나 먼 곳에 있는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다. 중3때 그나마 악착같이 책을 붙들고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집에서 통학 할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학교를 가기 위해서다. 난 성공했다. 그리고 마음먹었던 대로 집을 떠났다. 그 때부터 객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내 나이 마흔, 어머니는 마흔에 나를 낳으셨다

▲ 일흔 아홉번째 생일을 맞은 어머니
ⓒ 이민선

고향집에만 오면 잠을 자는 버릇도 그때부터 생겼다. 고등학교 때 학교 기숙사에 있다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왔다. 그때마다 잠을 엄청나게 많이 잤다. 일요일 날 오후 다시 기숙사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잠을 잤다. 신기하게도 그 버릇은 수십 년 동안 계속 됐다. 군대생활 하다가 휴가 나와서도 거의 잠을 자면서 보냈고 여름휴가철을 맞아 고향집에 갔을 때도 거의 잠만 잤다.

올해 꼭 마흔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40년 전 당신들의 나이 마흔 살 되던 해 동짓달 스무 사흗날(음력)에 나를 낳으셨다. 40년 전 이맘때, 난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던 마흔 살이 되면 부모님과 내 모습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던 어린 시절의 궁금증이다. 어머니의 일흔 아홉 번째 생일날 그 궁금증이 풀렸다. 난 아직도 철없는 막내아들이고 부모님은 곁에 있기만 해도 편안해지는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였다.

농약 중독으로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병원비를 아끼려 했던 아버지의 마음도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돈 쓸 곳은 많은데 아무리 일을 해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죽을 힘을 다해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고향집에서 난 지금도 숙면을 취한다. 맘 편히 늘어지게 잠을 자고 오는 것이다. 아마도 집을 떠난 순간부터 난 집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다만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마흔이 되고나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정할 것은 철저하게 인정한다는 것.

진녹색 들판을 보며 난 또 다시 그리움에 젖는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 들판의 흙을 밟으며 성장했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진녹색 벼들이 주는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한때는 이 들판이 주는 고즈넉함을 지루하게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들판에서 일을 하며 흘리는 부모님의 땀을 하찮게 생각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땀 흘려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을. 그리고 부모님이 흘린 땀방울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안양뉴스(aynew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향, #늦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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