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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수욕장이 텅 비니 바다도 텅 비어 보였다.
ⓒ 김종휘
삼면 바닷가 어지간한 곳은 전부 해수욕장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 숱한 해수욕장이 비수기에는 거짓말처럼 텅- 비어 있었다. 덩달아 바다도 비어 보였다. 주말에나 근교 사람들이 와서 삼삼오오 해수욕장에 흩어져 있었다. 아슬아슬한 옷차림으로 살과 살을 부비며 바글거렸던 한여름, 그 많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상했다.

평일 텅 빈 바닷가에는 드문드문 아이가 있었다. 학교 가긴 이르고 부모는 일하러 나갔고 조부모는 연로한지라 아이들은 혼자 놀았다. 조개껍질로 소꿉장난하고 어슬렁어슬렁 걷고 개와 장난치는 바닷가 마을의 아이들은 우리 같은 낯선 여행객과 눈을 마주쳐도 무심했다. 비어있는 바다처럼 아이들의 얼굴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반면 주말 바닷가에 놀러온 외지 가족의 아이들은 시끄러울 정도로 활기찼고 잘 웃었다. 바다에 발 한 번 담그고 까르르 웃는 아이들과 연신 사진을 찍는 부모들. 말 걸면 조잘조잘 대답도 잘 했다. 웃으며 다가가서 "이름이 뭐니?" 묻는데도 빤히 쳐다보다가 일 없다는 듯 가버린, 바닷가 작은 마을의 이름 모를 아이들과는 딴 판이었다.

문득 아내의 옛날 사진들이 떠올랐다. 유치원 졸업할 때, 초등학생 캠프 때, 대학교 입학했을 때, 첫 직장 생활 할 때. 그렇게 때마다 기념으로 찍은 독사진과 가족사진 속의 아내는 방긋 웃고 있었다. 아내는 나와 함께 자신의 예전 사진을 볼 때면 "왜 저렇게 똑같은 표정으로 웃고만 찍었는지 몰라" 하면서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내는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가족사진이나 독사진을 찍은 적이 드물었던 나는 그나마 한두 장 있는 옛날 사진 속에서 웃고 있지 않았다. 바닷가 마을의 아이처럼 무상하고 무념한 얼굴이었다. 그 아이들 역시 장차 밥벌이를 하고 가족을 꾸리고 나이를 먹다보면 지금의 나 같은 얼굴을 하게 될지 궁금했다.

▲ 외지에서 놀러 온 소녀는 가만히 바다만 바라보았다.
ⓒ 김종휘
평일에 스쳐가는 바닷가 마을에는 이쪽에 아이 한 명 저만치에 노인 한 명 있는 광경이 흔했다. 그렇듯 바닷가의 아이나 노인은 외따로 있었으나, 묘하게도 삼면 바닷가 어느 곳이든 노인과 아이의 얼굴에는 같은 기운이 어른거렸다. 처음에는 그것이 외지인을 경계하거나 여행객을 부러 무시하는 감정 같은 것일까 하고 생각했었다.

한번은 두 시간 남짓 해안 도로를 걷는 내내 사람을 볼 수 없었다. 그때 길 저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노인이 보였다. 우리는 머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노인은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느릿느릿 대꾸했다. "윗마을 누군고?" 건너 마을 사람인가 싶었나 보다. 부부 여행객이라고 소개하자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세월 좋구만" 하고 지나갔다.

일흔은 족히 넘겼을 노인의 얼굴은, 뭐랄까, 그냥 텅-, 텅 비어 있었다.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휙 지나쳐 가버린 아이의 얼굴처럼 놀라는 기색도 반기는 표정도 없었다. 나서 죽기까지 바다 보고 산 보고 나무 보다가 그것을 심심하게 닮아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바위와 바람과 흙과 비와 눈의 풍모를 갖게 된 투명한 풍경 같았다.

읍이나 큰 식당에만 들어서도 사람의 얼굴은 금세 달라졌다. 그들은 우리 같은 외지 여행객이나 도시 관광객을 의식했다. 어서 오라고 반색하는 표정과 의례적인 말투. 그들에게는 바닷가 마을의 노인과 아이처럼 심심하게 쳐다보고 덤덤하게 돌아서는 얼굴이 없었다. 늘 거기 있었던 바다나 산이나 나무처럼 그 일부가 되어버린 얼굴.

아내와 갔던 동남아시아 섬들에서 마주친 얼굴도 그랬다. 음식 나르고 운전 해주고 기념품 파는 이들과 달리 섬 마을의 노인과 아이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아이 표정은 노인을 닮았고 노인 표정은 아이를 닮아 있었다. 똑바로 쳐다보지만 노려보지 않았고 눈길 거두지만 쌀쌀맞지 않았다. 그들 속에서 나는 내 얼굴을 찾을 수 없었다.

▲ 미역을 건지다 말고 노인은 꼼짝하지 않았다.
ⓒ 김종휘
나이 사십이면 책임져야 할 얼굴이 있다는 것. 나이를 먹을수록 내 얼굴이 무엇을 책임지고 있는지 불안했다. 하나 아내 얼굴을 보고 있으면 걱정이 사라졌다. 텅 비어서 바다와 산과 나무와 바위와 바람과 흙과 비와 눈을 고스란히 들여오고 내보내는 것처럼, 아내를 보는 동안만큼은 내 얼굴도 덩달아 투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 도중 아내는 가끔 나를 카메라에 담았다. 저기 서봐, 해서 포즈를 취한 나는 매번 정면을 무겁게 응시했던 모양이다. 웃으라고 안 한다고, 안 웃어도 된다고, 살살 타이르던 아내는 갑자기 "눈 긴장 풀어!" 또는 "어깨 힘 빼!" 하고 고함을 질렀다. 피식 숨 놓는 순간 찰칵 소리가 들렸다. 내가 책임질 얼굴이 따로 있지 않았다. 편했다.

나 고 기 많 이 잡 아 올 게 요

마을 안 골목길을 돌아다녀도 사람 만나기는 어려웠다. 오전 10시경부터 오후 6시경 사이에 지나치는 어촌은 고요했다. 어느 바닷가 마을회관 게시판에는 '마을 현황표'라는 것이 붙어 있었다. 집 109가구, 배 34척, 전답 16만평이라고 소개한 그곳에서도 네다섯 사람 마주쳤다. 다들 먹고 살기 바쁘거나 방에서 쉬고 있는지 몰랐다.

새벽같이 바다로 나간 어부들은 깊은 밤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다. 고기잡이 제철이 아니면 뿔뿔이 밭에 나가 일하고 있었다. 항구는 낮 동안 한산했다. TV에서 전하는 어촌이나 항구의 생동감은 보기 어려웠다. 늦은 밤 어느 여관방에 들어갔을 때 거기 어부가 있었다. 방바닥에 눕자 그 눈높이의 벽지에 연필로 눌러쓴 낙서가 보였다.

▲ 이 글을 쓴 어부는 만선의 꿈이라도 꾸었을까.
ⓒ 김종휘
눅눅한 벽지, 삐뚤삐뚤한 글씨, 한 줄의 문장. 그것은 늙은 어머니를 위로한 자랑이었거나, 만삭의 아내에게 장담한 희망이었거나, 혼자만의 쓸쓸한 독백이었거나. 아버지가 생각났다. 나 돈 많이 벌어올게요. 아버지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겠지.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평생 반신불수의 몸을 간신히 지탱한 채 텅 빈 방을 지키다 눈을 감았다.

월급봉투를 내미는 아버지와 통닭을 사들고 퇴근하는 아버지가 나에게는 있지 않았다. 때문인지 어머니와, 아내와, 여자에 대해 빚지고 산다는 잠재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결혼을 하면 나는 꼭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나 고기 많이 잡아올게요, 한 어부처럼.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한 주기도문이었다.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는.

하나 아내는 일중독에 빠져 사는 나에게 한결 같은 충고를 했다. 일을 사랑하는 거라면 말리기 어렵지만 돈 때문이면 하지 말라고, 그냥 빈 배로 돌아오라고, 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돌아올 때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아내와 함께 누웠던 그 방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이른 새벽 출항했을 어부는 다음날 고기를 많이 잡았는지 알 수 없었다.

적조와 태풍과 중국산 수입으로 국내 어업과 양식업자 다수가 신용불량자가 되고 있다고, 미련이나 체념 아니면 진즉에 고향을 떴을 거라고, 바닷가 인근 식당에 들릴 때마다 같은 한탄이 들렸다. 작은 바닷가 마을 곳곳에는 빈 배와 빈 창고와 빈 집이 널려 있었다. 바다를 떠난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 걸까.

베트남 처녀 있습니다

하나둘 원주민이 떠난 마을에는 '베트남 처녀'가 있었다. 대처나 해안도로는 물론 인적 없는 버스 정류소에도 같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전봇대나 자판기에 붙은 포스터와 스티커에도 '베트남 처녀'는 있었다. 그중 한 현수막을 잊을 수 없었다. '월남 참전 전우회' 푯말이 선명한 가건물 외관에 '베트남 처녀 있습니다'라고 내걸린 현수막.

월남, 참전, 전우회, 베트남, 처녀, 있습니다. 추가 정보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신용카드 환영. 100% 후불제.' 2006년 한해에만 베트남 여성 8200명이 한국 농어촌 남자와 결혼했으며, 2020년이면 코시안 인구가 강원도 인구보다 많아진다고 전하는 각종 통계는, 지금 이곳에서 그들이 어찌 살고 있는지 말하고 있지 않았다.

▲ 베트남 처녀는 현수막, 포스터, 스티커로 곳곳에 있었다.
ⓒ 김종휘
베트남 관광길에 발 마사지를 받았다는 선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20대로 보이는 베트남 여자 두 명이 마사지를 하는 동안 콧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무슨 노래냐고 묻자 활짝 웃으며 '호치민송'이라고 했단다. 선배가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고 엄지를 세워 '코리안 킹'이라고 하자 두 여자는 일순간 경색하며 마사지를 멈췄다고 했다.

선배는 그들의 줏대가 좋아보였다고 했다. 그 또래 베트남 여자들이 한국 농어촌에 와서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되고 있었다. 그들이 고향의 언어와 문화와 가족을 지키며 살고 있는지, 존재감 없이 작아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과 결혼한 농어촌 사내들 중에선 나중에라도 아내의 고향에 가서 정착할 이가 있을지 궁금했다.

아내는 말했다. 나와 너도 생면부지의 베트남 여자와 한국 남자처럼 멀고 낯선 길을 경유해 만난 거라고. 나는 기꺼이 화답했었다. 너에게 가겠다고, 그곳에 가서 너를 알고 싶다고, 그러자고 결혼한 것을 너에게 당도한 것으로 착각하지 않고 수시로 너와 함께 길 떠나겠다고, 감히 다짐했었다. 하나 나는 약속을 미루며 살았다.

'지금 이곳에서 눈 마주치는 시간 날마다 조금씩 늘리자'고 했더니 너는 자꾸 '일 끝낸 나중에 저기에서 거하게 만나자'고 한다며, 결혼 이후 아내의 지적은 갈수록 간명해졌고 나의 변명은 점점 복잡해졌다. 해서 바바 여행 같이 떠난 것인데, 하루하루 100% 선불제로 사는 아내의 생활에 대해 나는 여전히 먼 미래의 신용카드를 긁고 있었다.

어디쯤 갔어?

바닷가를 거니는 동안 베트남 처녀 현수막만큼이나 자주 마주친 광경은 인부들의 공사 현장이었다. 비수기 바닷가는 곳곳이 공사였다. 태풍에 꺼진 도로 보수하고, 해안도로 새로 만들고, 해안 접안시설 고치고, 성수기를 대비해 바닷가에 새 모래 깔고 있었다. 경치 좋은 곳에는 빠짐없이 별장이나 숙박 시설이 지어지고 있었다.

봄꽃이 피었다고 했으나 바다 바람은 매서웠고 인부들은 두꺼운 옷을 입고도 추워 보였다. 인부들은 오직 그날의 고된 밥벌이에 전념하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일하는 인부들은 바다를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하나 여행자의 눈에는 묵묵히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는 인부들의 모습도 그 너머의 푸른 바다와 겹쳐 다른 감정을 자아냈다.

▲ 비수기 바닷가에서 인부들은 일만 했다.
ⓒ 김종휘
그것은 박두규 시인의 '바다가 푸른 이유'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 질문에 아빠가 답하길 "바닷가 바위들을 쉼 없이 때리다보니 스스로 멍이 들어서"라는, 바다가 답하길 "결정적으로 너도 모르게 빠져나간 너의 푸른색이 나에게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그 바다는 해안에서 일하는 인부와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나간 어부 사이에 있었다.

한여름 바다를 찾는 그 많은 도시 사람들을 남김없이 푸르게 물들이고도 여전히 푸른 바다. 새벽 일찍 보이지 않는 먼 바다로 나가 꿈을 던지는 어부들과, 종일 바닷가에서 노동하며 땀 흘리는 인부들의, 그 푸른색으로, 바다는 사시사철 푸른지 몰랐다. 하나 한여름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은 바다가 푸른 이유를 알지 못할 터였다.

나 역시 알고 있지 못했다. 바위 같은 나를 때리는 아내의 파도에 대해서, 나도 모르게 나를 적시는 아내의 바다에 대해서. 내 하루를 옭아매고 내 한해를 집어삼키고 내 인생을 사라지게 만드는 상념을 치우지 않고는 아내가 나에게 흘러들어오기 얼마나 버거운지 모르고 있었다. 아내는 경고했다. 일을 위해 살지 말고 너를 위해 일 하라고.

어느 날이었다. 막 공사를 끝내고 비닐을 덮어쓴 새 도로를 혼자 걷고 있었다. 한걸음 뗄 때마다 길은 바삭바삭 소리를 냈다. 그때 아내에게 문자가 왔다. 어디쯤 갔어? 나는 생각했다. 그래, 너에게 가고 있는 거였지, 맞아, 너한테 가는 거였어, 결국 빈 배로 남는다 해도, 그날 일을 끝내지 못한대도, 나는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있는 만큼 내요"

65일간의 바바 여행 중 잠깐의 이해관계라도 갖고 말을 섞어온 사람은 내게 돈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었다. 모텔이나 여관에 들어설 때면 머리통 하나 들어갈 정도의 작은 창 너머로 얼굴만 보이는 주인장. 처음엔 고미를 데리고 들어가느라 부르는 대로 방값을 치렀지만, 고미 없이 다니면서는 흥정을 했다. 얼마요? 비싸다. 좀 깎아줘요. 5천원만 깎읍시다.

대화는 뻔했다. 비수기의 평일 숙박업소는 비어 있기 일쑤여서 부르는 대로 값을 치루면 왠지 밑지는 기분이 들었다. 방값은 평일과 주말에 만 원 이상 차이가 났다. 일단 깎고 보고 돌아나갈지 그냥 내고 들어갈지 정했다. 들어간 다음에는 욕조가 있으면 뜨거운 물부터 콸콸 틀어놓았다. 하룻밤 잔 곳이면 거의 빠짐없이 목욕을 했다.

돈을 냈으니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손해 보지 않겠다는 기분 때문에 엄청나게 물을 낭비했다. 식당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을 시켰다가 기대에 못 미치면 화가 났다. 돈 버리고 입 버렸다는 감정에 쉽게 휩싸였다. 그 기준은 돈이었다. 돈 낸 만큼 대접받지 못했다는 생각.

한 번은 딴 길로 샜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골 마을버스를 탔다. 마침 아내도 나도 현금이 없었다.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버스에 올라타고 알았다. 허둥거리며 운전기사를 바라보았다. 저, 돈이 부족한데… 하자마자 운전기사는 행색을 쓱 훑어보더니, 있는 만큼 내라고 했다. 요금에 한참 못 미치는 동전 몇 개를 내고 좌석에 앉았다.

마을버스는 정류소 아닌 곳에 곧잘 정차했다. 보따리를 잔뜩 걸머진 아주머니를 집 대문 앞에 내려주는 식이었다. 대여섯 명쯤 되었던 승객을 운전기사는 다 아는 눈치였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그날 어디를 다녀오는지 알고 있었다. 아저씨! 중학생쯤 되는 남자 아이가 소리쳤다. 그 순간 버스는 급정거했다. 아, 미안해, 널 빠뜨렸네.

아내와 나도 정류소 아닌 곳에, 원하는 장소에 내렸다. 우리는 흙먼지를 날리며 사라지는 버스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마음이 편했다. 속이 개운했다. 있는 만큼 내고 내려야 할 곳에 내리는 것. 그것은 아내가 나에게 바라는 바였다. 내가 나를 비우고 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 남은 길을 걷는 동안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디서 왔을까? 어디로 갈까?

읍에서는 종종 보았지만 때로는 작은 항구나 바닷가 마을에서도 볼 수 있었다. 너무 짙은 화장이라서 가면이라도 쓴 것 같은 젊은 여자. 무표정한 눈빛, 원색의 짧은 치마와 하이힐, 무릎 위나 발판 가운데에 올려놓은 커피 보따리. 그런 모습을 한 앳된 나이의 여자가 낡은 스쿠터를 타고 휑하니 지나가는 광경은 단번에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럴 때면 아내도 나도 멍하니 그의 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그 마을 사람이 아닐 것이었다. 고향에서는 할 수 없는 직종의 일일 테니까. 가급적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소문으로라도 소식 넘어갈 일 없는 타지에 와서, 그렇게 스쿠터를 타고 한 마을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젊은 여자는 날마다 그 바다를 볼 것이었다.

한번은 그 같은 차림의 여자와 같은 시각에 배를 타고 섬을 나왔다. 여자는 갑판에 나와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가 서있던 자리 바로 뒤편 의자에 아내와 내가 앉아있었다. 순간 향수 냄새가 끼쳐왔다. 강했다, 아니 독했다. 그 냄새는 우리가 구경하던 바다의 인상을 바꿔버렸다. 배에서 내릴 때까지 그는 계속 거기에서 바다를 보았다.

선착장을 빠져나오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디에서 살다가 왔을까? 나도 모르게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아내 역시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집에서 왔겠지. 어디로 가는 걸까? 집으로 가겠지. 아내도 나만큼이나 줄곧 눈길 빼앗긴 채 하릴없는 생각을 풀어낸 모양이었다. 그랬다. 나도 너처럼 집에서 왔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 밤마다 초소에 와서 젊은 군인들은 어떤 바다를 볼까.
ⓒ 김종휘
왔던 집으로 어서 돌아가면 좋을 이는 또 있었다. 2년 남짓 바다를 이웃하고 살아야 하는 해안 초소의 젊은 군인들. 철책선과 초소는 동해안에 많았지만 삼면 바닷가 어디에서나 군복을 입고 머리를 깎은 젊은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낮에는 비워두었다가 밤마다 들어와 총 들고 지켜야 하는 바다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초소나 참호에 있는 초병과 눈이 마주칠 때 가볍게 손을 흔들면 본체만체 하기도 했지만 가끔은 손 인사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때 보면 솜털이 보송보송한 영락없는 풋내기 청춘이었다. 한시라도 일찍 그 바다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바람일 터였다. 그렇듯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는 바다를 보며 거기 있었다.

"어서 와"

주말이면 바닷가 작은 마을로도 종종 관광객들이 찾아왔다. 지도에 나오는 명소는 주말이 되면 단체 관광객들로 붐볐다. 한적했던 항구와 어촌도 반짝 활기를 찾았다. 텅 빈 바닷가에 주인 없는 노점이 왜 그리 줄지어 늘어서 있나 했는데, 주말이면 일제히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다. 그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었나 싶었다.

관광객들은 버스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주변의 전망 좋은 곳을 찾았다.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소멸하는 그 어딘가에 자신의 회한을 방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좋다-, 야-, 죽이네-, 하는 잠깐의 탄식들. 돌아서면 여기저기 둘러보다 소주에 회 한 접시 먹고 해산물이나 건어물을 사들고 다시 버스에 올라 사라졌다.

단체 관광객이 빠져나간 일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낮 사이. 그 시간에 걷는 바닷가 마을과 해안도로는 거짓말 같았다. 방금 전까지 떠들썩했던 촬영 세트장이 막 철거된 직후 같은 헛헛한 공간과 침묵의 시간이 펼쳐졌다. 외지 관광객과 현지 상인은 모두 일당 동원된 엑스트라 같았다. 유령처럼 느껴졌다. 나도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나를 나답게 한다고 믿었던 것들. 부모, 가족, 상처, 기억, 일, 신념, 이름. 그 모든 것이 텅텅 비어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닌 상태의 나를 느끼는 것. 그 어떤 예정론이나 카르마도 작동되지 않는 진공의 세계를 천천히 떠다니는 듯한, 비현실의 현실 속에 내가 있었다. 나는 나라는 인생의 매순간을 둘러보는 한 관광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관광길 같은 생을 살면서 숱한 이들과 얽혀 성공과 실패를 가르고 영광과 모멸을 따지느라, 곁에 있는 한 사람의 동행인을 온전히 마음에 들이지 못하는 것. 그런 생각은 혼자 걸을 때 자주 들었다. 빈 바다를 보며 빈 마을을 통과하는 동안 내 안에 나인 양 꽉 들어차 있던 것들이 조금씩 더 크게 텅-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바바 여행을 모두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어서 와, 하는 아내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내려야 할 곳에 내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았다. 고향이란 북에서 피난 온 부모에겐 상실이고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겐 관념이었으나, 그날 나는 아내의 고향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텅 빈 나를 비어있는 그대로 반기는 한 사람.

외딴 섬을 혼자 걸을 때였다. 마을로 들어서자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장정들은 배타고 나갔고 아낙들은 밭에 나갔는지 몰랐다. 공터에는 잔뜩 작물이 널려 있고 그 복판에 할머니 혼자 무릎을 꿇은 채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인사하자 눈길 한번 주고 그만이었다. 할머니는 따가운 햇볕을 등지고 엉금엉금 옮겨 다니며 작물을 어루만졌다.

정오를 넘긴 섬 마을은 끝없이 적막했다. 금세 무너질 것 같은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집들 사이로 전신주가 보였다. 그곳에 할아버지 한 분이 쓰러져 자고 있었다. 낮부터 약주가 과했던 걸까. 섬에서 나고 섬에서 자랐을 그도 어부가 되어 바다로 노를 저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생을 살아왔을 노인의 낮잠을 훔쳐보다가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 밖으로 나가면 바닷가 곳곳에 무덤이 있었다. 무덤은 대체로 언덕에 자리를 잡고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평생 바다 보고 살다가 죽어서도 바다를 보고 있었다. 무덤 잔디밭에는 종종 아낙이 앉아 쉬고 있거나 아이 혼자 놀고 있었다. 바다 경치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은 한적한 쉼터가 되어 있었다.

어느 바닷가 마을엔 어귀마다 푯말이 박혀 있었다. 영구차 진입금지. 풍수 좋다는 소문이 돌자 외지인들이 경쟁적으로 바닷가의 임야를 사들여 묘를 지었다고 했다. 이웃한 네다섯 마을도 같은 푯말을 박아 두었다. 마을은 하나둘 주민이 떠나서 점점 비어가는 중이었고, 무덤은 죽어서 찾아오는 외지 사람으로 점점 만원을 이루는 중이었다.

그 중 한 가묘 앞에 털퍼덕 앉았다. 바다는 텅하니 비어 있었다. 드넓게 사방으로 뚫려 있는 바다는 언제나 그렇게 비어 있겠다는 듯, 편견과 미망에 휩쓸리는 것은 당신일 뿐이라는 듯, 아무도 붙잡지 않고 누구도 내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바다 앞에서 나도, 모르는 그도, 마을 주민도, 외지인의 무덤도, 그저 빈 존재였다.

나도 한줌 먼지가 되어 저 바다로 돌아가겠지, 나이 더 먹은 내가 아무래도 아내보다 먼저 가겠지, 일이 생겨 서둘러 갈 수도 있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나 반드시 생길 일이었다. 어느새 중년이었고 상상하는 노년은 막막했으나 이제는 있는 만큼 내놓고 나서 내려야 할 곳을 분명히 정할 때였다. 아내가 보고 싶었다. 아내와 놀고 싶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연재글은 6월 말 도서출판 샨티에서 <아내와 걸었다, 바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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