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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날의 바다는 늘 저 멀리 있었다.
ⓒ 김종휘
바다는 먼 곳에 있었다. 서울에서 자란 나에게 바다는 언제나 저 먼 곳이었다. 물리적 거리감이 아니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서쪽으로 1시간쯤 달리면 바다가 있다. 동쪽으로 3시간 남짓이고 남쪽으로 5시간 안팎이면 바다에 도착한다. 바다는 서울로부터 먼 곳에 있지 않다. 하지만 차를 타고 바다로 달려가는 동안에도 바다는 항시 저 먼 곳이었다.

바바 여행을 하기 전까지 바다는 그곳으로 달려가는 동안의 관념 안에 갇혀 있었다. 그 테두리 안에서만 바다는 보여주고 허용했다. 이를테면 목적을 가지고 단체로 몰려가는 바다는 그 눈요기를 서비스하고는 에누리 없이 사라진다. 감정의 공허 때문에 찾아간 바다는 그 허기를 허겁지겁 채우게 놔두고는 그만 돌아가라고 역정을 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 바다를 보았다. 학교 수학여행 차 도착한 포항제철소 앞 바다. 까까머리의 10대 남자 아이들이 보러 간 것은 고도 성장기의 웅대한 제철소였다. 산만큼 어마어마한 기계들이 윙윙거리며 볼품없는 바다를 부리는 광경이었다. 우르르 내려서 공장을 둘러보다가 잠깐 만난 바다는 한강보다 칙칙했고 불결했다.

대입 학력고사는 보았으나 졸업식은 아직 치르지 않고 있던 고등학교 3학년의 그 마지막 어정쩡한 겨울에 나는 두 번째로 바다를 보았다. 교회 대학부 선배 둘과 같이 강릉에 가서 밤바다를 보며 새벽까지 소주를 마시다가 해변에 누웠다. 추위와 목마름에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떠 있었다. 곁에 앉아있던 교회 선배가 바다를 보고 말했다.

이 바다가 소주라면!

나는 토악질을 멈출 수 없었다. 변변치 못한 것들을 다 게워내고 해변의 모래로 덮어두었다. 바다는 깨끗했고 내 속은 개운했다. 우리는 빈 소주병과 새우깡 봉지를 집어 들고 바다를 떠났다. 바다를 등진 어디쯤에선가 신발에 묻은 바다 모래는 떨어져나갔을 것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어딘가부터는 외투에 묻어온 바다 짠 내도 씻겨나갔을 것이다.

내 청춘의 10대를 마감하기까지 바다는 고작 그랬다. 그때 포항제철소 앞 바다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던 고등학교 2학년 친구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바다를 소주처럼 바라본 교회 선배는 술집 장사를 한다고 해서 나중에 한번 들렀을 뿐이다. 그렇게 두 번 가본 바다는 몹시 더럽거나 무척 깨끗했다. 단지 저 먼 곳에 잠깐 다녀왔을 뿐이었다.

사회운동에 전념했던 20대, 바다는 언제나 스산했다

20대 시절 바다는 더 먼 곳에 가 있었다. 내가 찾아간 바다는 그때까지도 별로였다. 나는 그 바다보다 훨씬 더 먼 저 곳의 바다를 꿈꿨다. 시에서, 노래에서, 소설에서, 영화에서 바다는 이국적인 거기 어딘가에서 나를 불렀다. 그 바다는 첫사랑도 못해본 풋내기 청춘의 두 눈에서 이유 없이 눈물을 불러내는 눈부신 바다였다. 저, 먼, 어딘가, 그 바다.

흐린 하늘 아래 먹먹한 바다, 비 내리는 축축한 바다, 폭풍이 몰아치는 성난 바다, 함박눈 떨어지는 솜이불 같은 바다. 어느 순간 잔잔한 물결에 싱그러운 바람이 불고 햇살이 쏟아지면서 찬란한 세계를 펼쳐놓는 바다. 위로 탁 트이고 아래로 깊이를 모르겠고 좌우로 끝없는 바다. 구차한 현실을 거짓말처럼 모두 소멸시켜버리는 바다가 있었다.

그 바다는 활자 사이를 흘러 다니거나 멜로디를 떠다니거나 영화관의 스크린을 스쳐가거나 엽서 사진 속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반면 사회운동에 전념했던 20대 10년 간 네다섯 번 쯤 훌쩍 다녀온 바다는 그렇지 못했다. 여름 바캉스 철에는 갈 일이 없어 겨울철에만 후다닥 다녀온 바다는 언제나 스산했다. 내 안에 들어온 바다의 꿈들과 달랐다.

한 번은 같은 조직에서 사회운동을 하던 친구와 바다에 갔다. 친구는 애인과 헤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알던 사회운동의 선후배는 대부분 연애의 실패자였다. 동지애와 무관한 개인적인 연정은 거칠게 파기되었고 동지애를 쫓은 사랑은 훗날 보니 파국을 맞은 경우가 많았다. 나는 연애의 도망자쯤 되었다. 친구를 따라간 바다는 우악스러웠다.

친구는 바다의 억센 찬바람을 맞으며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그 아픔을 공감할 수 없었고 그냥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오래 바다를 보았다. 그랬더니 흐린 바다는 강풍에 곤두선 내 얼굴에서도 스멀스멀 흐린 물을 불러냈다. 인생을 모르는 젊은이의 콧등이 괜히 시큰했다. 콧물과 눈물이 나왔다. 꽥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친구의 침묵 때문에 참았다.

▲ 걷고 먹고 자는 내내 바다는 질리지 않았다.
ⓒ 김종휘
미숙했으나 확고한 척 굴었던 20대 시절에 가본 동해는 여전히 먼 곳이었지만, 내 안에 들어와서 출렁이던 바다의 이미지들은 더욱 먼 곳에 있었다. 30살 진입을 망설이며 불안해하던 그날. 비명횡사한 후배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사회운동의 동료들과 뒤엉켜 짐승처럼 싸웠다. 주먹질과 발길질로 분노하고 발악하며 서로 죽일 것처럼 굴었다.

그날 밤 난장판을 벌인 우리를 한 선배가 집으로 데려갔다. 대화는 없었고 뿔뿔이 잤다. 나는 혼자 거실에 남아 씩씩거리다가 비디오테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영화 <지중해(Mediterraneo)>. 선배가 조촐한 술상을 들고 와 옆에 앉았다. "그거 볼래?" "예." "같이 보자." 나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심드렁하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오프닝 자막. "이런 시대에 살아남아서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도피뿐이다." 에게해의 작은 섬 미기스티에 도착한 파시즘 군대의 8명 병사는 술과 사랑과 낮잠과 대마초와 파티와 해변 축구의 낙원을 만난다. 유부녀든 창녀든 사랑하고 노새를 돌보고 시를 읽고 성당의 낡은 벽화를 그리는 병사들의 나날. "도피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친다"는 엔딩 자막.

영화를 보는 동안 대책 없이 줄줄 울었다. 화면에 바다가 등장할 때마다 물컹하면서 내 안의 바다가 넘쳐나려고 했다. 몸 안에 갇혀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물이 그날 밤 연신 새어 나왔다. 지중해, 에게해, 미기스티 섬의 바다, 저 먼 곳의 바다들이 내 발가락에서 머리꼭지로 남김없이 차오르더니 그냥 터졌다. 선배는 말이 없었다. 고마웠다.

몸은 고되었지만 바다만 보면 좋았다

바바 여행 초기에 아내와 나는 바다를 보면 어김없이 "야아-" 소리치거나 "죽인다!"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산을 끼고 돌아가느라 한참 후에나 바다를 볼 때도, 반나절 내내 바다만 보며 걸을 때도 그랬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바다를 볼 때도, 열린 대문이나 담장 너머로 바다를 볼 때도 그랬다. 자고 일어나면 바다였고 걷는 동안 바다였다.

4월에 시작한 1차부터 5차로 끝난 6월까지 바바 여행은 흐린 날이 잦았고 비는 수시로 뿌렸다, 몸은 고되었지만 바다만 보면 좋았다. 바다 끼고 걷는 동안에 몸의 모든 더듬이는 바다의 냄새와 바람과 소리와 풍경을 무진장 탐닉했다. 질리는 줄 몰랐다. 저 먼 곳에 막연하게 있었던 바다의 이미지들이 하루하루 지척에서 퍼덕거렸다. 날마다 신기했다.

아내와 2차 바바 여행을 떠난 첫날 우리는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겁 없이 하구를 건너다가 훌러덩 빠지는 통에 휴대폰과 디지털 카메라를 못 쓰게 되었다. 수리 때문에 서둘렀지만 그날 하루는 고속버스를 세 번 타느라 다 썼다. 새벽에는 서울에서 바다, 낮에는 바다에서 서울, 밤에는 서울에서 바다. 종일 고속버스 안에 있었다.

2차 바바 여행의 출발점은 동해안 아래 남쪽이어서 고속버스는 서울에서 강릉을 들러 바다를 따라 남하했다. 그 길을 갔다 왔다 다시 가는 동안 1차 바바 여행 코스를 고스란히 거슬러 올라갔다가 재차 내려오는 셈이어서 묘한 기분이었다. 바다는 마침내 당도하는 곳이 아니라 애초 떠나온 곳이며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곳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깜깜한 밤 다시 그곳 바다에 도착했을 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아내도 나처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마치 원래 있어야 마땅했던 그곳으로 간신히 돌아온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어깨동무를 하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가로등 불빛이 어스름한 작은 항구의 아무 골목길로든 그냥 걸어 들어갔다. 그날 밤 우리는 여관에서 잠을 참 달게 잤다.

아내와 나 사이에는 늘 바다가 있었다

▲ 바다 앞에서 나는 아내에게 수작을 걸었다
ⓒ 김종휘
뭐 하세요?

아내와 나 사이에는 늘 바다가 있었다. 대안학교의 동료 교사였던 그를 보고 반해서 첫 작업에 들어간 것은 변산 앞 바다에서였다. 대안학교 전교생이 참가한 겨울 캠프였다. 나는 해변에 홀로 앉아 따듯한 캔 커피 두 개를 모래 속에 박아두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고도 여기로 오지 않는다면… 아냐 올 거야… 제발 와서 앉아다오… 그렇게 속으로 옹알거렸다.

그때 거짓말처럼 그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식은 캔 커피를 마셨다.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이제 기억에 없다. 대신 그를 기다리며 피웠던 까칠한 담배 맛과 시린 손과 서러웠던 바다가 떠오른다. 그가 다가와서 함께 마셨던 달콤한 커피 맛과 따듯한 웃음소리들과 안온했던 바다의 풍광이 선명할 뿐이다. 나는 그와 같이 바다를 보았다.

연애가 시작된 초기에 우리는 대안학교의 걸바(걸어서 바다까지) 프로젝트에 동행했다. 남양주에서 출발해 강릉 바다에 도착하는 7박8일의 도보 여행이었다. 그도 나도 담임이어서 맡은 아이들이 있었고 일과는 빠듯했으나 눈빛과 손짓을 주고받는 틈틈으로 하루가 충만했다. 그는 선두에 서고 나는 후미에서 한계령을 넘었지만 우리는 같이 있었다.

걸바 마지막 날 아이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하나둘 바다에 도착했다. 예정과 다르게 밤늦게 바다에 다다랐다. 하늘도 바다도 파도 소리까지도 전부 컴컴했다. 아이들은 따로따로 바닷가 앞에서 허물어졌다. 걷고 또 걸어서 보려고 했던 그 바다가 시커멓다니. 멍하게 서있는 아이, 덜퍼덕 앉는 아이, 우는 아이, 아이들 속에 그가 있었다.

그는 아이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나도 따라 했다.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아이들이 잠에 골아 떨어졌을 때 나는 고개를 돌려 뒷좌석의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훗날 평가회 자리에서 아이들은 걸바 동영상을 보고나서 "내가 찾던 바다는 그곳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는 식의 성숙한 말을 했지만 나는 그 밤바다가 좋기만 했다.

▲ 같은 바다를 보고 우리는 헤어졌다.
ⓒ 김종휘
헤어져야 할 것 같아.

요가 단식을 일주일간 다녀온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 이미 결혼을 약속한 상대가 있었다. 그렇게 어긋난 자리에서 연애인지 아닌지 모를 연애를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우리의 장래에 대해 말하기를 회피했지만 그는 우리의 결혼 문제를 속으로 차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너를 사랑하지만……." 이라고 말했다.

그의 제안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내가 차를 운전했는데 목적지는 없었고 서울에서 그냥 동쪽으로 달리다보니 바다였다. 겨울 바다를 보며 해안가를 걸었고 횟집에서 쓴 소주를 나눠 마셨다. 다시 밖으로 나와 바다 찬바람을 맞았다. 바닷가에는 작은 모래탑 두 개가 보였다. 조개껍질들이 하트 모양으로 그 테두리를 감싸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걸바 코스를 되짚어 오는 길이었다. 나는 그 길밖에 몰랐다. 걸바를 하며 같이 밥 먹었던 식당이 지나가고, 아이들 몰래 손잡고 걸었던 길이 지나가고, 기념사진을 찍었던 강원도 경계 표지판이 지나갔다. 기억들이 쉭쉭 지나갈 때마다 코끝이 아려왔다. 눈물이 났다. 운전 때문에 나는 힘이 들었다. 그는 손으로 내 눈가를 닦고 또 닦아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연애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재회의 첫 자리는 홍대 앞에 있는 바다에서였다. 'bar다'라는 작은 술집이었다. 그는 마가리타를 마셨고 나는 마티니를 마셨다. 같이 기네스 흑맥주를 마셨고 땅콩과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먹었다. 이별 여행 때 그 바다에 어떤 표식도 남겨두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우리는 바다 속에서 즐겁게 취했다.

그리고 결혼했다. 그는 나의 아내가 되었고 나는 그의 남편이 되었다. 'bar다'의 김명렬 사장님이 결혼식장에 와서 사진을 찍어주었고 우리는 스무 명 남짓 되는 친구들과 어울려 바다에서 결혼식 뒷풀이를 했다. 결혼을 하고 다섯 달 뒤에 아내와 나는 짐을 싸서 바바 여행을 떠났다.

생각은 단순해지고 감정은 정직해졌다

아내와 함께 한 바바 여행은 3차까지였다. 1차는 도시를 떠난 서울 토박이에게는 나날이 본다는 것 자체로 신기한 바다였다. 2차부터는 원래 있던 곳으로 귀환해서 만나는 것 같은 편안한 바다였다. 본디 바다를 잘 알았으나 어떤 연유로 그 기억이 심해로 가라앉았다는 듯 바다는 나의 본성으로부터 무언가를 계속 떠올리려고 했다. 3차도 그랬다.

바다를 보는 일은 차츰 덤덤해졌고 가끔 심심하게도 다가왔지만 무료한 적은 없었다. 바다는 보면 볼수록 보는 사람의 뇌를 말끔히 비워내고 몸 안을 차가운 물로 속 시원하게 적셔주는 효험이 있었다. 생각은 단순해지고 감정은 정직해졌다. 아내도 나도 그 기운 때문에 바다를 보고 걷는 동안 점점 더 자기 자신의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무슨 생각해?" 물으면 "아무 생각 안 해." 대답했다. 아내와 나는 지난날의 바다들에 대해 떠오르는 대로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바다에 얽힌 우리의 이야기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지금 여기 바다를 보며 걷고 있는 자리로 전부 돌아오고 있었다. 바다를 보며 오래 걷다보면 바다가 우리를 따라오며 심연의 기억들을 철썩철썩 되돌려주었다.

▲ 조금이라도 틈 벌어진 곳에 바다가 있다.
ⓒ 김종휘
아내는 남해 어느 섬의 텅 빈 해수욕장에서 가족을 떠올렸다. 아주 어렸을 적, 몇 살인지 모르는데, 그때 엄마 아빠와 여기에 왔어, 밤이면 전깃불도 안 들어와서 무서웠어, 사방 천지에 쏴아-쏴아- 소리만 들렸어, 그러다 엄마 품에서 잠드는데, 다음날 일어나면 은빛 부서지는 바다더라, 하는.

그렇게 바다의 기억은 소중했던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되돌아왔다. 반면 나는 가족을 떠올리지 못했다. 부모는 북에서 피난 내려와 평생 바삐 살았다. 바다는 내 나이 20살에 죽은 아버지와 30살에 죽은 어머니를 돌려주지 않았다. 내 가족은 같이 바다에 온 적이 없다. 아버지나 어머니도 나처럼 따로 바다에 왔었을 것이다. 그 바다가 무엇인지 나는 몰랐다.

4차 바바 여행, 홀로 바라본 바다

지금 어디야?

4차 바바 여행부터 나는 홀로 바다를 보았다. 30대 중반까지는 혼자거나 여건 맞는 친구끼리 뭉쳐서 날치기로 바다를 다녀왔다. 그때 같이 간 친구가 누구더라, 그 바다가 아니었나, 싶게 바다까지 동행했던 친구들은 모두가 서로에게 혼자였다. 그때처럼 나는 혼자였지만 아내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그 바다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시간의 흐름은 장소에 따라 달라지고 기억은 그 장소에서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졌다. 해서 어떤 시공간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어떤 시공간은 더욱 강렬하게 되살아났다. 4차와 5차 바바 여행 도중 아내의 음성이 나를 찾아올 때마다 생중계했던 그 바다는 잊을 수 없었다. 아내와 나 사이에서 멀고도 가깝게 귀에서 귀로 넘실거린 바다.

혼자 보는 바다는 여러 모로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열망이 들끓었을 때 내쳐 달려가 배설하는 그 바다가 아니었다. 서울에서 바다로 가는 동안 차 안에서 머리로 동경했던 이미지를 실물에 대조하는 그 바다도 아니었다. 생활이 치사하고 삶이 비참해서 도피하듯 숨어들었다가 잊었던 약속 때문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떠나온 그 바다도 아니었다.

그랬던 바다는 그때마다 원했던 것들을 남김없이 충족해주긴 했으나 돌아서면 다시 저 먼 곳에 가 있는 바다였다. 4차부터 마지막 5차 바바 여행까지 나는 조금 다른 바다를 만나고 있었다. 그 바다를 보는 동안 내 안에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것들이 축축하게 젖고 있었다. 욕망, 격정, 기대, 실망, 근심, 불안 같은 것들이 발밑에서 질퍽질퍽 밟히고 있었다.

▲ 너도 나도 저 바다에서 걸어나온 것 아닐까.
ⓒ 김종휘
종일 바닷가를 걷고 배고프면 먹고 해 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별 생각 없이 바다 보고 걷는 나날은 조금씩 더 내 안으로 들어와서 바다로 통하는 물꼬 하나를 점점 넓게 터주었다. 딱딱한 감정들이 하나둘 흐느적거리다가 잘게 부서지고 차례차례 몸 밖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지나가버린 날들과 오지 않은 날들에 대한 걱정이 줄어들고 있었다.

돌아보면 바바 여행 전까지 바다는 그 먼 곳으로 달려가는 동안에만 잠꼬대처럼 얼핏 내비치고 있었다. 그렇게 당도한 바다는 내가 찾던 그것을 바다라고 넙죽 보여주었지만 나는 번번이 속고 있었다. 몸을 밀어서 바다와 함께 걷는 동안 바다는 설령 내가 서울의 어느 곳 어느 때에 붙박여 있어도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

바바 여행을 다녀온 그해 겨울 아내는 원했던 임신을 했다. 3주차였을 때 의사는 유산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초음파 사진 한 장을 들고 집에 왔다. 바다의 심해처럼 보이는 사진에는 까만 점이 하나 있었다. 아기집. 그 깊은 곳에 집은 마련해두었지만 아기의 영혼은 들어올지 말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아기를 원하지 않았던 나 때문일까 싶었다.

12월 15일 금요일. 아내는 하혈을 했고 수술을 받았다. 새하얀 낯빛이 된 아내는 병원 침대에 눕자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 닦아주자 "울어야 돼" 하고 계속 울었다. 그날 새벽 자궁 속 깊은 곳에서 배꼽을 지나 목구멍을 타오르더니 정수리에서 찡- 하면서 기분 좋게 환해지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느낌이 너무 선명한 체험이 있었다고 아내는 말했다.

유산한 아내의 두 눈에서 바다 속 아기집을 보았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아내는 다시 울었다. 아기가 아기집으로 들어오는 순간인 줄 알고 푹 잤는데 떠나는 거였다고, 다음에 보자며 안녕 하는 순간이었다고, 울면서 말하는 아내가 안쓰러웠다. 내가 울려고 하자 아내는 이제 다 울었다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했다. 나는 아내의 창백한 얼굴과 두 눈을 보다가 그 깊은 바다 속 아기집을 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아기 없이 살자는 주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외숙부와 이모부와 작은 매형의 사망, 사회운동을 같이 했던 후배 두 명의 급사, 나에게 해방신학을 가르쳤던 교회 선생님의 자살, 병원에서 나자마자 숨진 누나의 아기. 죽음은 흔하고 삶은 고단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기를 낳아 사람을 기르는 일은 한사코 망설여졌다.

그러나 초음파 사진과 아내의 두 눈에서 그 깊은 바다를 보고나서, 그 심해를 떠다니는 까만 아기집을 보고나서, 바다 속 그 집으로 돌아와야 할 어떤 존재감을, 하나 아직은 돌아오지 않은 그 어떤 실체를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내 의지나 판단의 몫이 아니었다.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그 바다 속 아기집을 다시 열심히 지어보자고 아내와 약속했다.

▲ 내 안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다보관소다.
ⓒ 김종휘
나 역시 바다 속 그 집에서 나왔다. 바다를 헤엄치다가 서툰 발자국을 남기며 세상으로 걸어 나온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바다를 동경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다가 삶이 지나치면 자신이 바다에서 왔으며 스스로 바다라는 것을 잊은 채 좀 더 많은 과업을 이룬 다음 여유를 갖고 바다에 가겠노라 생각한다. 그때부터 바다는 저 먼 곳에 가 있었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한동안 바다를 보지 못하면 우울해진다고 한다. 그렇듯 우울증이란 바다를 보지 못하고 사는 통에, 그 바다를 기억할 수 없는 탓에 만들어진 병일 것이다. 때문에 사람은 미치지 않으려고 무의식 깊은 곳으로부터 불쑥 바다를 부르는 것일 테다. 그때부터 느닷없이 저 먼 바다로 달려가는 버릇이 생겨났을 것이다.

어느 한 순간 "아, 바다를 보고 싶다!" 그렇게 본성이 솟구쳐서 온몸을 부르르 떨고 부랴부랴 바다로 달려가지만, 정작 바다에 도착해서는 돌아갈 일부터 궁리했던 과거의 나를 돌아본다. 벗어나고 싶어서, 결단하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때, 잊어버리려고, 사랑을 만들고자,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저 멀리 달려갔던 그 바다에서 나는 얼마나 또 빨리 돌아섰는지.

그러나 65일의 바바 여행 동안에 나는 바다로 달려가 떼쓰지 않았고 바다를 황급히 떠나지 않았다. 그 바다는 여전히 몹시 더럽거나 무척 깨끗했지만 하루하루 지금 여기에 있었다. 그 감각과 경험과 기억이 중요했다. 나는 바다로 돌아왔다. 5차 바바 여행을 끝내고 서울로 가는 동안 나는 기침이나 하품처럼 바다를 몸 어딘가에 달고 살았으면 하고 바랬다.

바다를 바다 아닌 곳에도 보관할 수 있구나

줄곧 동행해준 바다는 바바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오자 여기저기 풀어놓은 자질구레한 짐들처럼 생활 구석구석으로 흩어졌다. 덕분에 그 속옷을 입으면, 그 양말을 신으면, 그 다이어리를 펴보면, 그 모자를 쓰면, 그 손목시계를 보면, 그 디지털 카메라를 들면, 그 휴대폰을 쓰면, 바다는 수시로 출몰했다. 특히 아내를 보면 바다는 내 몸으로 건너왔다.

바바 여행을 마치고 한 달 쯤 뒤에 문득 지도를 펴보았다. 삼면이 바닷길이고 바다다. 북에서 남으로 쭉 뻗어 내려간 동해안, 그 길에서 만난 바다는 꼬인 속을 터주었다. 젊은이의 방장한 혈기를 흉내 내다가 아득바득 걸어가는 내 모습을 알았을 때도 바다는 막힘없이 탁 트인 세계로 내내 거기에 있었다. 그 바다가 심심해지면 남해안 바다로 꺾어진다.

동에서 서로 걸어간 남해안, 바다 어디로 보아도 어지럽게 겹겹 섬과 섬을 두르고 있었다. 멈춰서고 우회하고 돌아 나오며 동서고저로 내려가는 남해안 길에서 바다는 아득했다.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정상에서 내려갈 길을 보니 막막해지는 느낌이었다. 남해를 보고 있을 땐 미끈한 동쪽 바다가 그리웠고 서해를 보고 있을 땐 다양한 남쪽 바다가 그리웠다.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서해안, 그 길은 남해안에 비해 뻗은 길이고 동해안에 비해 굽어 있었다. 그 바다 역시 남해보다는 평평하고 동해보다는 주름져 있었다. 남에서 북으로 가는 길은 방위상 오르막이나 정서상 내리막이어서 방금 전에 지나친 바다를 자꾸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 때문인지 서해안에서 바라본 석양의 바다는 아련하고 숙연했다.

아내와 나는 그 모든 기억을 꺼낼 수 있는 압축 파일을 사진 한 장 속에 넣어두었다.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만난 얼음 파는 가게. 얼음을 보관하는 냉동고의 은빛 철문에 빨간 색으로 '바다 보관소'라고 쓰여 있었다. 바다를 바다가 아닌 곳에서도 보관할 수 있구나, 싶어 사진을 찍었다. 아내와 내 몸이 바다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었다.

바다 보관소.

덧붙이는 글 | 이 연재글은 6월 말 도서출판 샨티에서 <아내와 걸었다, 바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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