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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본부인 버러스 홀(Burrus Hall). 성조기는 조기로 게양되어 있다.
ⓒ 김규영
블랙스버그에서는 추도집회나 예배, 기도회 등 희생자들을 위한 크고 작은 모임들이 열리고 있었지만 아이 둘을 데리고 아무 곳에도 갈 수가 없었다. 33명의 영혼에게 나의 슬픔을 전하고 싶어, 버지니아텍을 상징하는 주황색 카드에 짤막한 글귀를 적어서 남편과 아이 둘을 데리고 함께 캠퍼스에 들어섰다.

▲ 애도의 표시로 노란 리본을 매어둔 시내 전경. 우체국의 성조기도 조기로 내려졌다.
ⓒ 김규영
버지니아텍(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이후 처음으로 집 밖을 나서는 것이라 약간 긴장되기도 하였지만 시내와 캠퍼스는 매우 조용하였다.

버지니아텍인(Virginia Tech Inn) 앞에는 보도 차량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있었고, 저녁뉴스를 전달하려는 리포터들의 모습도 보였다. 수업이 취소돼 오가는 학생들은 적었지만, 남편처럼 실험이나 연구를 위해 학교에 와 있는 사람들은 제법 많았다. 평소처럼 캠퍼스를 조깅하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 워 메모리얼 채플 기념비에 애도의 화환이 놓여있다. 채플은 이곳 기념비 아래에 있다.
ⓒ 김규영
먼저 워 메모리얼 채플(War Memorial Chapel)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유족들과 학생들이 조용히 기도를 올리며 마음의 위로를 얻고 있었다. 실내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글귀가 빼곡히 담긴 배너가 걸려 있었다.

▲ 애도의 마음들이 둘러싸고 있는 'VT'. 뒤에 보이는 건물이 워 메모리얼 채플이다.
ⓒ 김규영
▲ 'VT'의 뒷면까지 빼곡히 적혀있는 메시지들. 버지니아텍 상징 색깔인 주황색과 마룬색 풍선이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위로하는 듯하다.
ⓒ 김규영
버지니아텍 로고인 'VT' 주위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수많은 꽃과 글귀, 초들이 늘어서 있었다. 넓고 조용한 드릴 필드는 우리처럼 유모차를 끌고 오거나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이들도 많이 있었다. 개를 끌고 산책하듯 온 사람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 메시지 배너를 더 만들어 땅에 박고 있는 중이다. 배너 뒷편으로 부모와 함께 나온 아이와 유모차의 모습이 보인다.
ⓒ 김규영
넓은 드릴필드(Drillfield)에서 사람들은 위 메모리얼 채플 근처의 'VT'와 대학본부인 버러스 홀(Burrus Hall)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애도의 뜻을 전하였다. 사진에는 담지 못했지만 타 대학에서 보내온 추모 배너들을 게시한 천막도 있었다.

물론 한국인인 우리를 특별히 이상한 눈길로 본다거나 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범인이 한국계라는 사실이 드러난 어제(17일 현지시각) 오전에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 묘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한국계'라는 단어가 충격의 파장을 만든 것은 1992년의 LA폭동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또 외국인으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크고 작은 불이익과 소외감이 주는 피해의식이 표출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오후가 되자 가슴을 짓누르던 충격과 공포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단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보복을 가할 만큼 극단적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냉정한 판단이 서게 되자, 어제 오후부터 남편은 실험과 연구를 위해 학교로 갔다. 이웃들도 조용하지만 침착하게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고 있었다.

▲ 윌리엄스 홀(Williams Hall). 이 건물 뒤에 사건의 현장인 노리스 홀이 있다. 나무들에는 조의를 표하기 위해 검정색과 버지니아텍 상징인 주황과 마룬색의 리본이 둘러져 있다.
ⓒ 김규영
온 블랙스버그는 슬픔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충격과 공포를 떨치고, 온전한 슬픔만이 가슴을 채우고 있지만 의연하게 일어서고 있었다.

고 호키스!(Go Hokies! : 버지니아 텍의 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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