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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강에서 바라본 다그마노스훈련장 초입. 조금만 내려가면 고랑포라 불리는 임진강 최초의 여울목을 만날 수 있다.
ⓒ 박신용철
"장좌리 사람들에게 다그마노스 훈련장은 한 맺힌 땅이다."

27일,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에서 만난 다그마노스 훈련장 원소유자(지역농민)들이 한결같이 내뱉은 말이다. 고향에서 쫒겨난 원주민들은 인근 마을에 33가구가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BRI@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 지금은 다그마노스 훈련장이라고 불리지만 원주민들은 아직도 '장좌리'라고 부른다. 이 지역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조선 영조 때로 추정되며 한국전쟁 직전 전주 이씨 집성촌 등 1백여 가구가 밀집해 있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피난을 나왔고 그 자리에 미군이 주둔했다.

농촌이었던 장좌리는 임진강 여울목에 있던 '고랑포' 덕분에 상업이 활성화되어 부유하게 살았던 지역이다. 임진강 나루 중 가장 번성했던 '고랑포나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랑포나루(高浪渡, 皐浪渡)는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었던 가운데고랑포와 윗고랑포 사이에 있던 임진강 나루터로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와 연결되었던 곳이다.

전후 피난을 떠났던 주민들이 고향을 찾아 왔지만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 재정착하지 못했다. 한국정부는 1963년 이 일대를 미군에게 공여했고 1973년~1974년 강제 징발했다. 주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1980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유신정권과 군사독재정권을 거쳐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 사용하지 않는 미군훈련장을 돌려달라는 탄원을 시작으로 1995년 본격적으로 반환 요구를 시작했다.

국방부는 1972년 국방부장관 명의로 협의통보를 했고 1973년부터 강제 징발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농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1973년도까지 농사를 지었다. 낮에는 군 병력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밤에 가서 모내고 밤에 가서 콩을 심곤 했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밤에 가서 모내기

장좌리 원주민이었던 이재옥(70)씨에게 강제 징발 당했던 당시 상황을 들어보았다.다그마노스 훈련장은 1963년, 미군에게 공여되었지만 군사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사를 지었다. 문제는 1972년 가을부터였다. 군 당국은 1사단 군 장비까지 지원해주면서 농작물을 한꺼번에 실어냈다. 이듬해 봄, 농사를 짓기 위해 훈련장으로 향했다. 농민들을 맞은 것은 실탄을 장착하고 10미터 간격으로 출입을 통제하던 한국군이었다.

이재옥씨는 "모를 어디가 꽂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얼굴을 물에 닿을 정도로 숙여 달빛에 비추어 보며 모내기를 했다"고 회상했다. 군인들은 소에게 먹일 풀을 베러 가면 훈련장으로 풀을 베어 간다고 욕설을 하며 제지하기도 했단다.

▲ 장좌리 원주민 이재옥씨. 그가 전해주는 이야기만으로도 한이 느껴진다.
ⓒ 박신용철
"거머리 알어? 거머리. 지금은 농약을 너무 많이 쳐서 거머리가 살지 않지만 옛날에는 엄청 많았지. 밤에 몰래 들어가 모를 내고 피사리를 하니까 거머리가 다리에 달라 붙여 피를 무지하게 빨아 먹었지. 그런데 마음이 급해서 알 수가 있나. 밤에 자다보면 이불에서 뭐가 있어, 피를 빨아먹다가 죽은 거머리가 지천인거여. 그 정도로 처참하게 살아왔지."

파주경찰서는 '불법영농'이라며 농민들을 잡아갔고 훈방조치가 되어 풀려나는 일을 반복했다.

"파주 경찰서 차량이 오는 것을 보고 뛰어 도망가면 권총으로 쏘아댔지. 그런 시대에 막 뺏어간들 항의나 할 수 있었나. 행패가 이만 저만 아니었어. 국민들을 적으로 보았지. 총구에 대검을 끼워 들이대며 죽인다고 위협했을 정도였으니…."

장좌리 주민들은 1980년부터 농사를 다시 짓기 시작했다. 관할 사단에 '먹고 살게는 해줘야 할 거 아니냐"고 사정해서 1년간은 국방부의 허가 없이 농사를 지었다. 1981년에야 25사단 공병대대에서 정기적으로 허가를 받아 각서와 사용료를 내고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공병여단에 냈던 토지사용료 어디로 갔을까

"세금(토지사용료)은 원당 삼송리에 있던 공병여단에 직접 냈어. 교통이 불편했던 때라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면서 내러가곤 했지. 그런데 영수증은 백지에다 이름, 가격을 쓰고 허가를 내줬지. 그런 돈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개인 주머니로 들어갔을 걸. 농사꾼들이야 말은 잘 듣지. 내라면 내고…."

토지 사용료는 1985년부터 지로영수증으로 바뀌었다. 일부 주민들이 백지에 적은 영수증이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민원을 국방부에 제기했고 현지조사까지 벌였다. 25사단 공병대대측은 "(사용료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발뺌하며 "농민들이 불법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농민들이 작성한 허가신청서류는 25사단 공병대대 사물함에서 발견되었다. 농민들에게 받은 사용료를 국방부에 보내지 않고 누락시켰던 것이다.

이재옥씨는 "지로 영수증을 들고 적성농협에 사용료를 내러 갔는데 25사단 공병대대장 개인 계좌번호였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연로하신 분들은 목숨 같은 땅을 강제로 빼앗기고 농약을 먹고 자살하신 분이 다섯 분이나 되셨어. 억울하게 빼앗기고 국민을 기만하는 정부에서 살아났는데 지금은 딴소리를 하니 기가 막히지."

주한미군이 "문제의 토지는 미8군내의 유일한 중대단위 기동훈련지역의 큰 몫으로 되어 있으며, 전쟁준비태세 완비 훈련에도 긴요한 형편"이라던 다그마노스 훈련장이 지난 9월 반환되었다. 원주민들은 강제 징발당한 토지를 반환받길 희망하고 있지만 경기도는 '공공개발'이라는 명분하에 주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이재옥씨는 "장좌리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삶의 터전으로 아직도 농사를 짓고 있다. 미군이 사용해 못준다던 땅"이라며 "들어가 농사를 지어야 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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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위원 2002년 3월~12월 인터넷시민의신문 편집위원 겸 객원기자 2003년 1월~9월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 창립멤버 및 취재기자 2003년 9월~2006년 8월 시민의신문 취재기자 2005년초록정치연대 초대 운영위원회 (간사) 역임. 2004년~ 현재 문화유산연대 비상근 정책팀장 2006년 용산기지 생태공원화 시민연대 정책위원 2006년 반환 미군기지 환경정화 재협상 촉구를 위한 긴급행동 2004년~현재 열린우리당 정청래의원(문화관광위)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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