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결혼이라는 게 아무래도 21세기에는 푸대접거리가 될 모양이다. 요즈막엔 특히 네덜란드식이네, 프랑스식이네, 하며 싱글의 자유, 싱글의 멋을 강조하는 세상이다 보니 결혼을 무슨 무덤처럼 여기는 사람이 많다.
혼자 사는 것도 참 좋지. 그러나 평생 젊지 못 할 바에야 늙어서는 어쩌랴? 평균수명이 늘어나 인생 반을 쭈그렁 방자로 살아야 하는데…, 검버섯 핀 얼굴에 새로운 사랑을 꿈꾸랴? 이성을 홀리는 매력 따위 남아 있을까?
내가 혼자 여행한다니까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이참에 원 없이 일회용 바람피우려고? 숨겨 놓은 여자 있지? 오죽하면 오늘 절친한 후배가 전화를 해와 대뜸 이런다.
"형! 이참(아무도 모르는데)에 바람 좀 피우시지?"
물론 농담이다. 그는 존경할 만큼 가정에 충실한 남자다. 세태가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농이 나온 것이다. 간간이나마 연락하고 사는 친구들 20여명 가운데 바람을 피우거나 세컨드가 없는 꺼병이는 나를 포함해 단 셋이다. 세상이 이렇다!
지난 번 마광수 교수를 인터뷰했을 때 기사에는 안 썼지만 한 가지 동의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결혼 얘기다. 마 교수는 결혼을 인생 종장으로, 나는 결혼을 남자의 마지막 희원(希願)으로 여긴다는 차이 때문.
그 여자, 내가 만난 최고 미인
1992년 가을. 한 여자를 만났다. '이선생 왜 장가 안 가?'하며 늘 관심을 보이던 모 고서점 사장이 소개한 여자다. 나보다 여자 나이 셋(당시 서른다섯)이 많았다. 더구나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이선생 같이 자유분방한 사람한테는 이해심 하나 끝내주는 여자가 제격일 거야'라는 소개자 말에 수긍했고, 그예 인사동에서 만났다.
첫 인상? 이십대 초반인 줄 알았다. 다리만 절 뿐, 나무랄 데가 없는 여자였다. 더구나 빼어난 미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자 얼굴보다는 몸매에 관심 있었는데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첫 만남에 무려 여섯 시간이나 대화를 나눴다. 박식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였다. 나처럼 바이올린 음악을 좋아하고 워즈워드의 시를 암송하며, 모딜리아니나 고갱보다 칸트가 왜 모자란 존재인지를 읊을 줄 알았다. 시쳇말로 첫 눈에 '뻑' 갔다.
연극이다 음악회다 함께 다니며 몰큰몰큰 사랑이 무르익었다. 결혼을 결심하고 어머니한테 말씀을 올렸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선택을 당연히 들어주실 줄 알았다.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
그때 처음 어머니에게 대들었던 것 같다. 같은 삼팔따라지끼리 결혼해 이남 땅에 피붙이 하나 없이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사신 어머니 심정 따위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설득과 협박(?)을 번갈아도 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반대로 나를 협박하셨다. 너 그 꼴 보기 전에 어미 먼저 죽겠노라고(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어른).
어쩔 수없이 여자에게 사실을 얘기해야만 했다. 어머니와 전쟁 치르느라 두어 달 지친 끝에 나도 포기 심정이었다. 용기 없는 나는, 여자를 사랑했지만 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소원 하나 들어줄래요? 사실 몸이 이렇다 보니…, 태어나서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나를…, 바다에 데려다 줘요. 이별여행이라도 좋고…."
동해역에서 묵호항 갔다가 망상해수욕장까지…. 1993년 1월을 그 여자와 그렇게 보냈다. 참 많이 울었다. 죽고 못 살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죽는다면 다 어머니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사랑 때문에 죽을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기억뿐, 추억은 없다
1993년. 어머니 등쌀을 못 이기고 스물두 번이나 선을 봤다. 그래서 만난 여자가 지금 잉걸엄마다. 20대부터 결혼 전까지 꽤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모두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 종착역이 잉걸엄마다.
이 글을 읽으며 혹자는 '나쁜 시키'라고 하실지 모른다. 할 말 없다. 난 잉걸엄마를 처음 본 순간 그 여자를 싹 잊었으니까. 대신, 결혼 후 나는 일회용 기회라도 딴 눈 안 판다. 중요한 건 혹자의 의심이 아니다. 내 아내가 나를 믿으니까.
결혼 전 방황이야 그렇다 쳐도 요즈막 우리네 결혼풍속도가 심상치 않다. 툭하면 이혼이다. 내 생각에 여자보다 남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 연속기사 첫 글에도 썼지만 '수컷본능'을 무슨 훈장처럼 여기는 풍조가 큰 이유다. 인류를 지속해 온 건 결혼이다. 결혼 폐해? 그거 다 남자들이 만든 거다. 조선조 사대부들 행위깨나 들춰보면 못 된 전통 안 보이나?
이 글 쓰고 욕깨나 먹을 줄 알지만 내 속내니 어쩔 수 없다. 이 연속 기사 먼저 치 댓글에 후배가 안 그래도 한 토 달았더군. 너무 솔직한 게 탈(?)인 잉걸아빠 어쩌고…. 이왕 욕먹을 김에 한 마디 더 하자.
여자들이여! 남자의 사랑고백 따위 믿지 말 것! 책임과 약속을 다 하겠노라 하는 말만 간신히 믿어 볼 것! 남자란, 아니 수컷이란 어차피 한 여자에게만 평생 눈길 머물지 못하는 동물이므로.
덧붙이는 글 | 11월 말부터 나는 들떠 있었다. 3년여 만에 황금휴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나갈까? 어디 좋은 데 없나? 이런저런 계획을 짜던 나는 결국 포항에서 시작해 해안선을 따라 북진여행을 하기로 했다(하루 15km씩 걷고 나머지는 차로 이동). 한겨울에 도보여행이라니 주변에서는 걱정 일색이다. 내가 속한 지역모임에서는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쨌거나 나는 12월 5일(화), 서울역에서 아침 7시 40분발 포항행 기차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