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장안'스러운 시안의 거리
'장안'스러운 시안의 거리 ⓒ 오창학

로버트 김, 김초롱 그리고 고선지

시안 시내를 걷고 있다. 화청지, 병마용에 대한 감흥이 가시지 않아 의식은 당과 진 나라 사이를 떠돌더니 자동차가 가득한 이 도심 언저리에서도 몽롱함이 쉬 깨지 않는다. 하루가 다 저문 시간에 굳이 이 거리를 헤매는 까닭은 이번 여행의 두 동행자 '고선지'와 '혜초'의 흔적을 찾고자 함이다. 천남생, 흑치상지 등도 있지만 나는 '실크로드' 그 공간을 바라고 떠나온 지라 이와 관련한 한반도인들의 자취를 더듬고 싶었다.

흥경궁은 의외로 찾기가 쉽다. 당 현종 당시의 궁궐이 지금은 공원으로 쓰여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끊이지 않고 왕래한다. 고선지(高仙芝)의 집은 선양방의 서남문 남쪽에 있었다. 쟁쟁한 실력자답게 영흥방에도 주택이 있었지만 이 선양방이라는 구역은 흥경궁 맞은편 방(坊: 당 대엔 신분별, 직능별로 108개의 방을 구획하였다)으로 흥경궁 아침 조회에 쉽게 참석하고자 한 당시 권세가들의 거주구역이었으므로 주된 공간은 이곳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서울의 평창동쯤 된다고나 할까? 이 선양방 구역에 양귀비의 오라비 양국총, 양귀비의 세 자매, 안록산 등이 주택이 있었는데 고구려 유민의 후예 고선지가 안서도호부에서 물러난 후 지냈던 곳이 바로 이 구역인 것이다.

공원이 된 흥경궁(위), 그 맞은편 선양방 구역(아래). 선양방은 오늘날 시안 교통대학 자리.
공원이 된 흥경궁(위), 그 맞은편 선양방 구역(아래). 선양방은 오늘날 시안 교통대학 자리. ⓒ 오창학
지금은 그 자리에 시안 교통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대학 안으로 들어가 그 때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천 년 세월을 넘어 옛 정취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다만 가슴 속 감정을 이 무대에 펼쳐 놓을 뿐.

고구려가 망한 후 당에 끌려온 고구려 유민이 20만 명이다. 지배 계층의 강제 이주를 통해 고구려의 재기를 막으면서 당의 필요지역에 인력을 공급하고 군사적 요충지에 방어군으로 배치하고자 한 당의 조치였다. 그 유민의 무리 중에 고선지의 부친 고사계가 있었고 먼 이국땅에서 하급장교의 아들로 고선지가 탄생한다.(고구려에서부터 끌려왔다고 보기엔 그의 연령대 활동과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를 따라 일찍이 군문에 투신한 그는 당의 서쪽 변경에서 20세에 유격장군이 된다. 2000여 병력으로 천산산맥 서쪽의 달해부를 정복한 그는 결국 안서부도호(서역지역 총사령관)가 되어 747년, 750년 비록 두 차례 원정을 통해 오늘날 티베트(토번국)와 타슈켄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평정하여 명실 공히 서역의 제왕으로 군림한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휘하부족의 배신으로 패전하여 당의 서역 지배권을 이슬람 세력에게 넘겨주기는 하였으나 그 전까지 이루어 낸 개척의 행보는 당의 역사나 세계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오죽하면 그가 1차 원정 당시 파미르고원을 넘어 소발륙국을 정복한 사건에 대해 알프스를 넘었던 나폴레옹과 한니발은 그에 비하면 껌이라 하였을까. 내 말이 아니라 탐험가 스타인의 말이다.

패전 후에도 처벌이 아닌 명목상 승진으로 장안에 와 있다가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진압군 사령관인 토적부원수에 제수되어 참전한다. 그러나 환관 변영성의 모함과 현종의 견제로 인해 처형됨으로써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이곳에 장안에 있을 때 고선지는 자신의 운명이 그리 될 줄을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고구려인'이라 불리며 상관에게 '개똥같은 고구려놈'이라 모욕 받았던 그가 이중 국적자로(엄밀히는 고구려가 망했으니 이중국적자도 아니다) 살아야 했던 그의 통한은 어떠하였을까? 어쩌면 그가 불타는 집념으로 파미르고원과 힌두쿠시를 넘어야 했던 건 당 나라 사람이면서도 '고구려인'일 수밖에 없는 통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외에서 선전하는 한국인, 혹은 한국계 외국인을 보면 가슴 벅찰 때가 많다. 물론 스포츠 스타는 제외하고(전 세계적인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나라별로 적당한 선수 몇을 끌어다가 적당히 키워주며 출신국에 방송권이나 팔아먹는 스포츠 강대국의 상술 탓이다). 로버트 김(김채곤)과 크리스티아나 김(김초롱) 사이의 거리를 생각한다. 이민 1세대냐 2세대냐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이토록 다를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70년대 미국유학 4년만인 31세에 나사(NASA)에 들어간 로버트 김은 미 해군 정보국 군무원으로 탄탄한 기반을 다지던 중 지난 1996년 모국(母國)의 해군무관에게 북한 관련 자료(특히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를 넘겨줬다가 감옥에 갔다. 1984년 미국에서 태어난 크리스티아나 김은 한국어를 못 하지만 한국과 미국 두 개의 국적으로 편의에 따라 양국을 대표하며 골프대회에 나간다.

누구는 "우리와는 관계도 없고,관심도 없다"며 모국으로부터 팽개침을 당했고 누구는 "한국인의 씨를 가졌으니 한국인"이라며 국가대표 섭외를 받는다. 결과가 다는 아니다. 누구는 "미 정보기관은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우방이라 생각지 않는다"며 개인적으로라도 '우방'인 한국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려하고 누구는 "나는 미국인"임을 강조하면서도 필요할 땐 "한국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며 인터뷰를 자청한다.

고선지는 어느 쪽이었을까?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있었을까? 좋든 싫든 자기가 고구려인의 피를 받았음을 자각하며 살아갔을까? 지금의 자료만으론 그가 어느 정도 고구려인이었는지 알기 어렵다. 고선지의 군사적 성공 이면에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부대의 후원이 있었을까? 그가 나의 선조임을, 나와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여기 시안을 벗어나면서부터 서역에 다가갈수록 고선지의 흔적들에 천착하게 될 것이다. 아직은 어떤 근거도 없이 고구려계 당인이라는 이유로 나는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직 고선지는 내게 로버트 김이다.

혜초의 흔적을 찾아서

혜초가 머물렀던 대흥선사.
혜초가 머물렀던 대흥선사. ⓒ 오창학
고선지의 집터와는 다르게 대흥선사(大興善寺)는 여전히 옛 장안의 정성방 자리에 서 있다. 수·당대에 역경원(譯經院)이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많은 해동의 승려들이 거쳐 간 곳이지만 내겐 이곳에서 불경 번역과 강의에 종사했던 혜초(慧超)의 흔적이 진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719년 16세의 나이에 당으로 온 혜초는 723년 남천축국 출신 스승 금강지의 권유로 당 광주를 출발해 바닷길로 인도에 도착, 4년여 동안 인도와 서역의 여러 지방을 순유하고 727년 구자(龜玆, 현 쿠차)를 거쳐 장안에 돌아왔다. (그 여행의 기록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대원선사의 스님
대원선사의 스님 ⓒ 오창학
노란 승복에 껄렁한 자세로 검표하는 승려의 모습은 중국 내 여느 사찰과 같은데 회색 승복을 입은 승려들이 보인다. 어쩐지 '스님'이란 말이 떠오르는 걸 보니 익숙한 것에 대한 호감은 버릴 수가 없나보다. 그런데 스님의 앞 배경으로 해병대구호처럼 비석에 붉은 글씨로 글귀를 새겨 놓은 것이 이채롭다. 붉은색에 대한 호감은 종교적 공간에서도 여전하다.

일본 승려의 동상
일본 승려의 동상 ⓒ 오창학
널찍한 가람 공간을 얼마간 직진하다보니 금박을 입힌 승려 동상이 확 눈에 들어온다. 혜초 스님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으로 뛰었다. 그런데 웬걸, 804년에 유학 온 일본 승려를 기려 '중일우호봉찬회' 명의로 일본인들이 세웠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말, 맞다. 굳이 가람 공간에 동상 등을 세울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혜초를 기념하는 어떤 흔적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인다.

역경원이 있었던 지금의 법당
역경원이 있었던 지금의 법당 ⓒ 오창학
몇 번을 뱅뱅 돌고 승려들에게 묻고 하여 겨우 과거 역경원이었던 법당을 찾아냈다. 혜초는 이곳에서 역경 사업에 종사했다. 스승인 금강지가 타계하자 773년 3월부터 여기 대흥선사에서 금강지의 제자인 불공에게 <대교왕경> 강의를 받았다. 그러다 774년 불공마저 입적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6대 제자 중 한 명이 된다. 어려서 신라를 떠나 서른 무렵에 인도와 서역으로의 구법순유를 마친 후 당에서 50여 년 간 밀교 연구와 전승에 전념, 금강지-불공-혜초로 이어지는 밀교의 전통을 수립했으니 그 또한 한 가지 길에 뜻을 두고 우뚝 선 자가 아니랴. 요즘으로 보면 단연 성공신화의 소재감이다.

분수 안에 있는 당 대의 용머리가  가만히 세월을 노린다
분수 안에 있는 당 대의 용머리가 가만히 세월을 노린다 ⓒ 오창학
가람 내에서 당 대의 유물이라곤 조그만 분수 안에 옮겨 놓은 용머리 석상 뿐. 오늘도 말없이 머리를 반 쯤 물에 담근 채 세월을 노리고 있다.

청진사 옆 야시장
청진사 옆 야시장 ⓒ 오창학
아내와 대흥선사를 나서 청진사 옆 야시장으로 간다. 조금씩 어둠이 내린다. 왜 어둠은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하는지. 밝을 때 보던 시장의 풍경이 아니다. 호객의 절규도 생존을 위한 악다구니가 아니라 삶의 신명으로 다가 오니 참 묘한 일이다.

'현대화된 당의 풍경을 맛보다'

대당부용원
대당부용원 ⓒ 오창학
대안탑 지나자마자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園)이 금방이다. 어차피 늦은 것, 밤 늦기를 기다려 아예 표값을 반으로 할인해 주는 시간에 맞추어 입장했다. 당 대의 부용원 유적 위에 지어진 것으로 그 시기 건축과 문화 예술, 그리고 낱낱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대단위 테마파크다.

이곳을 어떻게 평해야 하나…. 현대와 과거의 조화가 오묘한 곳? 과거를 우려먹는 덩치 큰 오락공원? 둘 사이에서 또 마음을 잃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체 19만9600평 중 근 6만평 넘는 면적이 연못인 만큼 물에 비친 야경하나는 그만이다.

"수심이 깊은 곳엔 그리움도 깊어
머물고 싶은 마음과 보내기 싫은 마음 사이로
길이 생긴다

강물이 굽어 흐르는 것은
떠나온 곳이 그리워
흘러가면서도 자꾸 고개를 돌리기 때문이다"


번쩍이는 조명을 끌어안으면서도 여전히 묵묵한 검정으로 휘감은 밤 물결을 내려다보며 김시탁 시인의 '곡강(曲江)' 중 부분을 읊조렸다. 낙동강 굽이치는 모습이 마치 곡수와 같다 하여 붙인 우리네 강 앞에서 지은 시이지만 이곳 당 대의 '짝퉁' 밤풍경 앞에서 느끼는 묘한 객수와 닮은 바가 있다. 무리한 여정 탓에 몸에 적신호가 와서일까? 아내는 내 옆에 있는데 자꾸 그리운 것들이 아른거린다. 박차고 나왔으되 다시 돌아가야 할 내 익숙한 터전들. 그리운 것들.

곡강
곡강 ⓒ 오창학
그렇지. 여기에도 곡강의 흔적을 마련해 놓았다."한인은 호인화 되고 호인은 한인화 되었다. 곡강호점(曲江湖店)." 장안 동남쪽 황하로 흘러드는 지류인 곡강은 이렇게 서역인과 한인의 교류처이자 공생처였다.

曲江 곡강

朝回日日典春衣 조정에서 나오면 봄옷을 잡혀 놓고
每日江頭盡醉歸 매일 곡강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 가는 곳마다 외상 술값 있지만
人生七十古來稀 인생 살기 칠십 년은 예부터 드문 일
穿花蛺蝶深深見 꽃 사이 호랑나비 깊숙이 꿀을 빨고
點水蜻蜓款款飛 강물 위에 점을 찍듯 잠자리가 난다
傳語風光共流轉 풍광에 전하리라 나와 함께 흘러가자고
暫時相賞莫相違 잠시나마 서로 위로하고 즐거움을 나누자꾸나


두보 이 친구 '절구(絶句)' 같은 시처럼 맨 고향 타령에 전쟁 피하는 푸념만 늘어놓는가 싶은데 또 이런 구석이 있다.

술 한 잔 입에 대지 못하는데 술자리 분위기엔 또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비록 소주잔에 사이다를 따르고 탁배기엔 베지밀을 부었지만 마시고 취하는 정취야 더하고 덜함이 있겠는가.

소유(遡遊)와 한담 속에 시안 대당부용원에서의 밤이 깊어간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이 기자의 최신기사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횡단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