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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전경.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전경. ⓒ 오창학
1호관 전시관 앞에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秦始皇 兵馬俑 博物館)'이라는 간판이 크게 놓여있다. 국제적인 유물관의 현판치고 글씨체가 좀 '거시기'하다 싶었더니 저게 섭 장군의 글이 아닌가 싶다. 1979년 4월 중국 당 부주석이면서 군사위원회 부주석인 섭검영(葉劍英) 원수가 병마용 발굴 현장을 방문했을 때 박물관 측의 제자(題字) 부탁을 받고는 악필이라고 빼다가 써 줬다는데 저것이 그 글인가 보다.

그때 이 생생한 고대 지하 대군영을 둘러보면서 뛰어난 진법과 전술 사상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그 양반이 진나라 군대의 20개 계급체계 설명을 듣고는 한 마디 혼잣말을 남겼다지. '군대에 계급이 없어서는 안 되겠어…'. 그 혼잣말의 의미는 9년 뒤(1988년 8월) 인민해방군에 계급제도가 부활하였을 때에야 무슨 의미였는지 밝혀졌다.

병마용 1호갱에 도열한 진용들
병마용 1호갱에 도열한 진용들 ⓒ 오창학
다소 설레는 가슴으로 병마용 1호갱 전시실에 들어섰다. 구덩이 속에서 꼿꼿이 몸을 드러낸 도용(陶俑)들의 모습이 눈에 가득 찬다. 이 기분 뭐랄까….

프랑스 소뮤르 전차박물관 2차대전 전차전시실에서 티이거 전차의 모습을 직접 보았을 때 감정이 이랬지, 아마? 아, 오르셰 미술관 고흐 전시실에서 작품들을 접했을 때의 느낌도 그랬던 것 같다. 머릿속에 수만 번 그리던 그런 웅장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바글대는 사람들 틈에 겨우 발붙여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지만, 심장에 전해지는 미묘한 전율 같은 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아, 2200여 년을 버텨 나와 대면한 거대한 지하군단. 그들이 지금 내 앞에 도열해 있다.

1974년 양지발과 농부들이 우물을 파내려간 지점. 숫자 6이라고 쓴 곳.
1974년 양지발과 농부들이 우물을 파내려간 지점. 숫자 6이라고 쓴 곳. ⓒ 오창학
저만치에 '4'라고 쓴 푯말이 보인다. 1974년 양지발과 그 일행이 우물을 파 내려간 자국이다. 그러는 와중에 병마용이 발견된 건 다 아는 사실. 그때 파낸 도용은 허수아비로도 쓰이고 노파의 집에 모셔져 신처럼 모셔지기도 했다.

임동현 문화관에서는 이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확인하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 채 속 앓이를 하고 있었다. 관료주의와 봉건주의를 배척하자는 그 잘난 비림비공(非林非孔)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였으니, 만약 우연히 휴가를 위해 고향에 온 신화사 기자 린안온(蘭安穩)의 보도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공개 시기가 늦추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궁수 도용들. 좌가 앉아쏴 자세(궤사수), 우가 서서쏴 자세(입사수)
궁수 도용들. 좌가 앉아쏴 자세(궤사수), 우가 서서쏴 자세(입사수) ⓒ 오창학
병마용 2호갱의 본진 최전방에 궁노병(弓弩兵)들로 구성된 방진(方陣)이 배열되어 있다. 방진 사방엔 강노를 든 입사수(立射手 : '서서 쏴' 자세의 사수)가 방진 가운데엔 궤사수(墦射手 : 꿇어 앉은 자세의 사수)가 있다. 이는 그냥 배열이 아니라 실제 진 나라 군대의 전투진과 사격 교범을 반영한 것으로 영화 <영웅>에서 진 군대의 비 오듯 퍼붓는 화살과 벽을 뚫는 강궁의 묘사는 이에 따른 고증이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닐까?

장수 도용과 말.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이다.
장수 도용과 말.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이다. ⓒ 오창학
병마용 하나하나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 인물이 혹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말은 당장 콧김을 뿜을 것 같이 생생하다. 눈초리의 변화로 다양한 표정을 유도하고 살아있는 느낌을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는 게 아내의 말인데, 그 인상이 너무 무섭단다. 당장 출진할 것 같은, 부릅뜬 눈과 다문 입으로 오로지 최고 지휘관의 출정명령만을 기다리는 듯한 저 다부진 표정, 저 표정을 내 직접 보리라 했는데 오늘 그 소망을 이룬다.

몸통을 틀로 뜨고 두상을 조각해 결합하는 방식이라서 간혹 목 없는 도용도 많다. 도용 갑옷을 잘 보면 수술이 달렸는데 이게 진 군대의 계급장이다. 유리관 안에 있는 도용은 수술의 형태로 보아 고급지휘관이다. 앞에서 언급한 섭 원수의 계급 운운 이야기도 도용의 수술에서 자극받은 것이다.

극과 동검. 좌측 극의 날에 진시황릉임을 알 수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극과 동검. 좌측 극의 날에 진시황릉임을 알 수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오창학
유물 전시실에 구리로 만든 진나라의 극(戟)이 따로 전시되어 있다. 날 한쪽 편에 '3년상방여불위조사공구(三年相邦呂不韋造寺工口)'라 새겨진 명문으로 인해 병마용갱이 진시황릉의 부장품이라는 게 확실해진, 의미 있는 유물이다.

"여불위가 승상이 된 지 3년에 사공구가 만들었다." 이문을 따진다면 사람 장사가 제일이라던가. 인신매매 말고, 사람에 투자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역대 고금을 통틀어 정치하는 사람 주변엔 꼭 장사치들이 '투자'를 위해 꼬이는 것인가?

조나라 수도 한단에 인질로 와 있던 진나라 왕족 떨거지 '자초(子楚)'에 대한 여불위의 투자전략은 주효했다. 물론 안국군(효문왕)의 총애를 받던 화양부인에게 막대한 재물을 부어 기어이 자초를 왕위에 앉힌 노력이 뒤따랐기 때문이지만.

후계자가 된 자초에게 자신의 아이를 가진 첩을 자초의 아내로 맞게 했고, 그 사이에 태어난 이가 훗날의 시황제 영정(令政)이다. 자초가 즉위(장양왕) 후 3년 만에 죽자 자초의 보좌관 여불위는 승상의 자리에 올라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시황제의 섭정이 된다. 결국 섭정 10년 만에 시황제의 친정 기도로 끌어내려 져 죽음에 이르는 최후를 맞았다.

'승상이 된 지 3년'이라 새겨진 이 무기는 시황제 즉위 초 여불위 권력의 초 절정기에 능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점, 당시 진나라 청동병기 제조 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증거물이다.

병마용에서 발굴된 동검도 당시의 야금수준을 짐작하게 하는데, 2200년 간 땅에 묻혀있던 청동검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깔끔하고 예리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발굴 직후 연구원이 책상 위의 종이뭉치를 그었을 때 19장이 베어졌다고 하니 그 예리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만하다.

2, 3갱의 모습. 원래 진용은 채색 인형이다.
2, 3갱의 모습. 원래 진용은 채색 인형이다. ⓒ 오창학
2000년 세월을 넘긴 검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싶지만, 그 비결은 검신 표면에 10∼15마이크론의 크롬 화합물 산화 층이 덮여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크로마이징 산화처리기법이다. 1930년대에야 발명특허가 나왔던 이 기법을 어떻게 그 옛날에 사용할 수 있었을까.

동검의 길이가 91.3㎝, 폭이 3.2㎝. 이전의 다른 시기보다 검의 길이가 훨씬 길어졌다. 기록에 진시황은 권위의 상징으로 늘 긴 칼을 차고 다녔다 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칼일까? 번오기의 목과 연나라의 지도를 지니고 진시황을 찌르려 했던 자객 형가(荊軻)가 이 검에 허리가 잘렸을까? 아니 형가가 시황제의 소매를 베고 제쳐 들어왔을 때 응수하려던 진시황이 칼을 뽑고자 해도 길어서 뽑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외침을 듣고 등에 메고서야 뽑았다는 걸 보면 그의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칼의 주인이 누구이든 "바람은 차고 역수는 춥구나. 사나이 한번 간 길 어찌 다시 돌아올까(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不還)"라며 친구 점리와 이별하던 역수의 정경이 눈에 선하다. 진나라에 위협받던 연나라를 위해, 그리고 태자 단을 위해 그 국경인 역수를 건널 때 형가의 마음은 어땠을까.

거사에 성공해도 죽고, 실패해도 죽어야 하는 그런 길. 나 같은 범부가 넘볼 마음은 아니로되 상상하면 가슴 어디가 뭉클한 그런 게 있다. 난 꼭 이런 식이다. 주인공 진시황을 쳐다보다가도 꼭 말없이 사라져간 조연들에 눈이 끌린다. 천상 별수 없는 주변인생이다.

2호갱 3호갱은 아직 발굴이 한창이다. 1호갱 발굴 당시의 실수를 교훈 삼아 전시관 지붕을 먼저 덮은 후, 비나 해로부터 유물을 보호하며 발굴을 진행한다. 원래 도용은 채색된 상태였으나 발굴 이후 빛이 바랬다.

동거마. 1500개 이상의 파편을 재조립하여 복원했다.
동거마. 1500개 이상의 파편을 재조립하여 복원했다. ⓒ 오창학
그 유명한 병마용의 동거마를 구경하고자 지하의 유물전시실로 내려갔다. 아아…, 동거마의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그야말로 인간의 벽으로 전시유리를 둘러버렸다. 1980년 진시황릉 옆 보리밭에서 동거마 1, 2호가 발굴되었을 때도 그랬다. 현장으로 연일 구경꾼들이 운집하고 농부들이 표딱지를 만들어 보리밭 입구에서 입장권을 팔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멋모르고 표를 구입해가며 발굴현장으로 쇄도해 들었다. 심지어 발굴단원들도 표를 구입하고 나서야 현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급기야 유물의 훼손을 우려해 발굴팀이 군을 파견해 현장을 차단하려 하자, 밥줄 끊기게 된 농부들과 인민해방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져 군인들이 다수 부상을 당했다. 결국은 현장 농사 수입의 다섯 배를 보상해 주고 동거마 유적현장을 철판에 떠 통째로 박물관에 옮긴 후 복원작업을 할 수 있었다.

실물크기의 1/2로 전 세계 청동기 유물 중 가장 크며, 세계 야금 역사를 새로 써야할 대발견이라는 의의를 지닌 동거마보다도 실상은 다른 의미가 내겐 더 끌린다. 중국 현대사에서 민간인이 인민해방군과 대적해 승리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의 항쟁. 이름하여 동거마 사수 작전(?). 인민이 인민해방군을 치고도 천안문처럼 탱크에 짓밟히지도 않고 파룬궁처럼 머리에 총을 맞지도 않은 전대미문의 사건을 유발한 매개체였기 때문이다.

발굴된 동거마 유물은 시황제의 어가는 아니고 당시 마차의 전형으로 추측하는데, 시황제는생애 다섯 번째 순력에서 병을 얻어 저런 마차 안에서 생을 마감한다. 불사 장생을 꿈꾸던 그에게 너무나도 허망하다 할 나이 50의 객사였다. 사실상 강대한 진 제국도 시황제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다.

시황제는 죽으며 장남 부소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서를 남기나, 배행하던 호해왕이 환관 조고와 유언을 위조하여 형 부소와 대장군 몽념을 죽인 후 즉위한다. 이후 부당한 왕위찬탈로 인한 부작용을 없애기 위한 무수한 왕족과 반대세력을 죽이며 피바람을 일으킨다. 이후 무수한 봉기와 함께 항우, 유방이 등장함은 다 아는 이야기. 이로써 진나라는 간판을 내린다.

"부디 흙 속에서 편히 잠들라!"

도자기 병사들의 모습.
도자기 병사들의 모습. ⓒ 오창학
'진'이라는 나라는 짧게 끝났으나, 진시황이 남긴 흔적은 길게 남았다. 그는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모든 일들을 실현했다. 13세의 어린 나위에 왕위에 올라 10년 만에 섭정 여불위(자신의 친아버지)를 끌어내리고 천하를 통일했다. 도전과 성취로 일관한 그의 삶 앞을 막은 '죽음'이라는 장애조차 극복하려 한 사내. 세간은 불로장생에 취한 그의 만용을 비웃으나 나는 그의 열정이 놀랍다.

그런데 내 편견인지, 병마용을 둘러보는 중국인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시황제의 만리장성 축조사업을 외부세계와 단절을 꾀한 보수성의 상징이라 한 비판에 대해 서쪽과 북쪽의 고원지대를 향한 미련을 버리고 동방의 넓은 대지와 푸른 바다로 눈을 돌린 것이라 응수하는 중국인의 글도 떠오른다.

어쩌면 이들은 저 2200년 전 무덤의 부장품들을 보며 그때의 영화를 다시 한 번 꿈꾸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천하의 통일이 곧 평화의 구축이라 믿었던 시황제의 위업을 현 세대에 다시 이루어야 한다는 오만한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으면….

"해산! 그대들의 임무는 끝났다." 말 없는 진용들의 사열.
"해산! 그대들의 임무는 끝났다." 말 없는 진용들의 사열. ⓒ 오창학
이제 병마용을 나선다. 훗날 겨우 도자기 병사들의 무더기 앞에서 중화패권주의를 염려한 내가 섣부른 망상가로 몰리게 되기를.

1984년 병마용 참관을 마친 레이건이 기념촬영을 마치고 돌아서서 병마용 군진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지. "해산(dismiss)!". 세인들에게 재미를 주고자 한 행동이었겠지만, 나 또한 그리 외치고 싶다.

'해산! 그대들의 임무는 끝났다. 부디 흙 속에서 편히 잠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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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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