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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원 신윤복 <단오풍정(端午風情)>. 지본채색(紙本彩色) 35.6x28.2cm 간송미술관 소장
ⓒ 간송미술관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을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위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녹음방초가 우거진 단오를 맞이하여 자유분방한 여인네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목욕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네 타는 여자, 타래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질하는 여자, 그리고 여러 자세로 몸을 씻는 여자 등 7명의 여인네가 등장합니다.

이 그림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며 관음의 황홀경에 빠져있는 사미승도 재미있지만 관심을 갖고 봐야 할 장면은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여인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아낙네입니다.

치마를 걷어올리고 목욕을 시작하려는 여인이야 젖가슴이 드러나겠지만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걸어오는 여인네도 젖가슴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 아낙네의 신분이 목욕하며 호사를 부리는 주인 마나님의 시중을 드는 비녀(婢女)인지 이동 주보 역할을 하는 장사꾼인지 알 수 없지만 먹을 음식과 호리병까지 챙긴 이 아낙네가 목욕하는 젊은 여인 못지않게 풍만한 젖가슴이 드러나 있습니다.

▲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들어오는 여인
한국 회화사에 드물게 여인의 속살이 등장하는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그림을 보더라도 18세기 말, 이 무렵까지 여자의 젖은 2세를 양육하기 위한 신체의 일부 기관일 뿐 성애의 상징 유방으로 보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유방이란 말은 원래 의학용어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을 통하여 서양 의술이 들러오면서 묻어온 한자어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젖, 젖통, 젖퉁이 등으로 불렀습니다. 수유기관으로의 호칭일 뿐 성적인 뉘앙스는 풍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자의 젖가슴은 다산풍요(多産豊饒)의 상징으로, 드러내놓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 풍속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유모를 댈 수 있는 궁중 여인과 사대부 마나님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인들은 모유 수유기간이라는 표시와 아들을 낳았다는 징표로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구한말, 우리나라를 유린하던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은 아프리카 야만족들처럼 미개하다고 선전하기 위하여 젖가슴이 드러난 기생들의 모습을 찍어 악의적으로 세계에 뿌렸다는 설도 있지만 최근에 우리 손으로 발굴한 평범한 여인의 모습에도 젖가슴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의식 속에서 젖과 유방은 언제부터 갈렸을까요? 여자의 몸을 상품으로 보기 시작한 20세기초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산업의 발달과 대량소비를 부추기는 광고 기법은 여자의 몸에 하나의 가치관으로 묶여있던 젖과 유방을 떼어내어 유방을 상품화 하였습니다.

▲ 남성을 상징하는 고목나무가 이 그림의 압권입니다.
그 결정적인 시기는 브래지어가 대량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로 여겨집니다. 이 때만해도 아기를 안고 가던 애기엄마가 젖가슴을 스스럼없이 풀어헤치고 젖을 먹이는 모습을 전차 칸이나 버스에서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를 행하는 여인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물을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시대의 가치관과 윤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공차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단순 공차기 놀이에 불과했던 축구가 상업화되고 마케팅 기법이 동원되면서 산업이 되듯이 하나의 상징으로 불리던 젖가슴이 자본주의 물결을 타고 젖과 유방으로 분리되었습니다.

브래지어에 속에 갇힌 유방은 이렇게 외치고 있을는지 모릅니다.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답답해 못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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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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