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탐라의 삼신인이 벽랑국 3공주와 신혼방을 차리고 자신의 터를 정하기 위해 화살을 쏘았습니다. 삼사석  돌멩이에 그 흔적이 있습니다.
탐라의 삼신인이 벽랑국 3공주와 신혼방을 차리고 자신의 터를 정하기 위해 화살을 쏘았습니다. 삼사석 돌멩이에 그 흔적이 있습니다. ⓒ 김강임
세상이 변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제주시 동쪽으로 12번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세인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기념비가 하나 있다. '살쏜디왓'이라 불리는 이 기념비는 삼사석비이다. 삼사석은 규모가 웅장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꽃 속에 잠겨있는 것도 아니다.

관련
기사
탐라의 개벽 '삼성혈'

다만 세상이 변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돌멩이일 뿐이다. 석실 속에 모셔진 돌멩이의 흔적. 어쩌면 고인돌을 연상케 하는 이 돌멩이는 제주인들에게 특별한 신화의 주인공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면 다 알고 있는 단군신화가 단일민족의 모태라면 삼사석과 관련된 삼성신화는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만드는 밑그림이 아닌가 싶다. 제주인들에게 신화는 자신의 원조를 찾아 떠나는 여행처럼 각별하다.

석실 안에 현무암으로 된 돌멩이 2개를 볼 수 있습니다.
석실 안에 현무암으로 된 돌멩이 2개를 볼 수 있습니다. ⓒ 김강임
혈의 전설, 즉 탐라의 개벽을 알리는 삼성혈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3년 5월이었다. 전설을 확인하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잘 알면서도 전설의 진실이 궁금해지는 것은 왜 일까?

그리고 1년이 지난 2004년 8월, 삼신인이 벽랑국의 세 공주를 맞이해 혼례를 올렸다는 '혼인지'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리고 삼신인과 세공주의 신혼방에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했다.

신화와 전설에는 허구성이 많지만, 그 허구성은 현실에 함께 내재해 있다. 그리고 신화는 신기루 같은 이야기이지만 역사가 되어 흐른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도록 역류할 수 있게 해준다.

삼신인이 세 공주와 살 거처를 정하기 위해 영토를 정하기 쏜 화살이 꽂혔다는 삼사석에 찾아간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삼사석을 둘러보니 한마디로 허무했다. 돌멩이에 새겨진 화살의 흔적을 보는 순간, 이런저런 추측으로 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12번 도로를 유유히 달려가는 자동차의 물결처럼 화살은 '살쏜디왓' 신화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삼신인이 쏜 화살의 흔적을 찾아 보세요.
삼신인이 쏜 화살의 흔적을 찾아 보세요. ⓒ 김강임
돌멩이에 밝힌 화살의 흔적,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화살의 흔적에 반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사람들은 신화에 현실을 새겨넣는다.

삼사석에 관한 표지판을 읽어 내려가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삼신인이 활을 쏘아 자신의 영토를 결정했다'는 메시지를 읽는 순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인간에게 영토만큼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자신의 영토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영토싸움을 하는 것 같다. 비옥한 옥토, 드넓은 땅, 황금 같은 학군의 1번지. 자신의 영토가 어디냐에 따라 신분이 달라지며 영토는 부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보다 더한 소유권 투쟁이 또 어디 있을까? 특히 남의 나라 땅에 나침판을 대고 자신의 나라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탐라의 시조인 3을라(고을라, 양을라, 부을라)가 제시한 영토의 소유방법을 현실의 잣대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떤 이는 삼사석의 비를 보고 "삼사석 화살의 흔적은 평화의 섬의 모태"라고 말했다. 서로 욕심이 있었을 테지만 활을 쏘아 자신의 영토를 정한 당시의 문화는 현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난센스처럼 보인다. 왜 사람들은 터전을 정하기 위해 싸움을 해야 하는 걸까?

삼사석비에는  ‘모흥혈고(毛興穴古) 시사석류(矢射石留), 신인이적(神人異蹟) 교탄천추(交嘆千秋)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삼사석비에는 ‘모흥혈고(毛興穴古) 시사석류(矢射石留), 신인이적(神人異蹟) 교탄천추(交嘆千秋)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 김강임
영토에 대한 집착이 강한 현대인들로서는 활을 쏘아 영토를 정하는 것이 '평화의 모태'라 말할 수도 있겠다. "모흥혈고(毛興穴古) 시사석류(矢射石留), 신인이적(神人異蹟) 교탄천추(交嘆千秋)". 석실 좌우에 새겨진 글을 보면 화살의 흔적에는 삼신인이 땅을 나눈다는 의미도 있지만, 평화와 타협 즉 '함께 더불어 산다'는 의미가 담긴 게 아닐까.

삼사석기념비 주변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습니다. 앞으로  관리에 철처를 기했으면 합니다.
삼사석기념비 주변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습니다. 앞으로 관리에 철처를 기했으면 합니다. ⓒ 김강임
직경 50여cm 현무암에 새겨진 화살의 흔적. 20여분 동안 태고의 시간에 상륙해 보니 신화 속에 나는 욕심꾸러기더라. 그리고 신화 속에는 강자도 역자도 없지만, 현실은 늘 강자가 판을 치더라.

삼사석비의 유래
1735년 제주목사 김정이 건립... 1930년 개수


탐라의 고, 양, 부 삼신인이 벽랑국의 삼신인을 배필로 정한 후, 터전을 정도하기 위해 화살을 쏘았다고 한다. 그 화살이 꽂혔던 돌멩이를 삼사석이라 한다.

삼신인의 활 솜씨에 경탄한 김정 목사가 1735년 높이 113cm, 너비 43cm, 두께 18cm의 삼사석비를 세우고 비 앞면 좌우에는 '모흥혈고(毛興穴古) 시사석류(矢射石留), 신인이적(神人異蹟) 교탄천추(交嘆千秋)'라 새겨 추모했다.

훗날 제주인 양종창이 1813년에 높이 149cm, 앞너비 101cm, 옆너비 67cm의 석실을 지어 삼사석을 보존했다. 현재의 삼사석비는 1930년 고한용, 고대길, 고영천 등이 개수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찾아가는 길 : 제주시- 동쪽 12번 도로-화북- 삼사석으로 30분정도가 소요된다. 
 삼사석은 제주도 지방기념물 4호로 지정 돼 있습니다. 그러나 삼성재단(고,양,부)이 소유하고 제주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삼사석 기행 후 두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첫째, 삼사석의 기행은 12번 도로 인도에서 밖에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탐라의 개벽 숨소리가 들리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사석으로 통하는 길은 입구도 출구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쉬움으로 지적하고 싶습니다.
 둘째, 현재 삼성재단에서 소유하는 삼사석 기념비 주변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습니다. 잡초제거와 주변정리를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