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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 장 속이고 속고

“지금 공격한다면 저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도천수 혁련기의 말이었다. 제마척사맹의 후발대는 소림의 광지선사가 이끌고 있었지만 주로 선발대의 보급이나 지원 등을 위해 남겨둔 전력이어서 고수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고수들 대부분 모두 선발대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강명이 이끄는 전력은 철혈보를 상대하기 위해 조직된 정예 전력. 그 수는 백 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한결같이 고수들이었고, 수뇌 급들은 물론 묵연칠수(墨煙七首)와 비마대(飛馬隊) 오십 명은 백련교 내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였다.

우회해 연동으로 진입하려던 제마척사맹의 후발대는 강명의 두 번에 걸친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진로는 물론 퇴로조차 막힌 채 방어에만 급급한 상태라 도천수의 의견대로 지금 공격을 감행한다면 제마척사맹의 후발대는 지리멸렬할 것이 분명했다.

“우리 쪽 피해는 얼마 정도로 예상하는가?”

강명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여전히 전면을 응시했다. 도천수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대답했다.

“적어도 이삼 할 정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도천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강명의 눈치를 살폈다. 강명은 수하를 자기 몸과 같이 아낀다. 아니 자신보다 더 아낀다. 두 번의 공격에서도 피해를 감수했다면 진작 끝낼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수하들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몰라도 강명은 결정적인 순간에 퇴각을 명령했다.

강명이 슬며시 정운학에게 고개를 돌렸다. 철혈보에서 풀려난 이후 정운학은 별 말이 없었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사형에게 도움을 받은 일이 부끄러워서였을까?

“운학. 자네의 생각도 혁련노인과 같은가?”

정운학이 강명의 갑작스런 물음에 다른 생각에서 깨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는 슬며시 허허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대답하기 꺼려하는 표정이었는데 강명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금 형세를 놓고 말을 해야 하오? 아니면 우제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야 하오?”

“둘 다...”

강명의 간단한 대답에 정운학은 힐끗 도천수를 보았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반드시 싸워야 할 상대라면 혁련노인의 말씀대로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지금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오. 저들은 이미 비마대의 위력에 몸을 피하기 급급한 실정이오. 수뇌급 정도는 사형과 좌우산인, 혁련노인과 남형, 그리고 소제라면 충분하오.”

“허면....공격하자는 말인가?”

강명의 반문에 정운학은 뜻밖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제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다면 두 가지요. 하나는 누구를 위해 우리가 저들을 공격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오. 또 하나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저들과 싸워야 하느냐는 것이오.”

정운학의 말에 강명이 빙그레 웃은 반면 주위의 인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가? 저들은 백련교의 본거지인 천마곡을 공격하러 가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자신들과 적이다. 그들이 연동을 통해 천마곡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가능하다면 몰살시키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허나 강명은 처음으로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도천수 혁련기를 바라보았다.

“운학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겠소?”

그저 평범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정작 그 눈빛을 받은 도천수는 마치 동공이 바늘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미 자신의 속내를 뻔히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하는....”

강명의 눈빛을 응시하다가 도천수는 말을 멈췄다. 이미 강명은 모든 사정을 안 것일까? 철혈보를 공격하기 직전 그만 둔 것도 문제였고, 충분히 제마척사맹의 후발대를 휩쓸어 버릴 수 있음에도 주춤거리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도천수에게는 영겁과도 같이 긴 시간으로 느껴지는 시간 동안 강명의 눈빛을 마주 보던 도천수는 갑자기 무릎을 털썩 꿇었다. 언제 알게 된 것일까? 분명 강명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자신의 운이 다했을 때 과감히 패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미련을 가지고 도박판에 매달리는 것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자신이 던진 마지막 승부의 패가 이제 상대에게 읽혔음을 인정해야 할 시기였다.

절망스런 상황에서 누군가 내밀던 손을 붙잡고 회생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조직에 속하게 되었을 때, 주위에는 자신과 같이 절망스런 상황에 빠졌거나 갑자기 무림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인물들이 함께 있음을 알았다.

“죽여주시오.”

그 조직이 중원 전체에 퍼져있고, 그 조직의 목적이 무림 뿐 아니라 중원대륙에 있음을 알았을 때, 그들의 이념이 백련교와 비슷하기는 하나 또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지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이상에 동조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여생에 대한 최후의 패로 그 조직을 택했다.

“다만 속하는 주공을 모시면서 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했소이다. 물론 이 말 역시 변명에 불과하오. 만약 주공을 먼저 알게 되었다면 오직 주공께 충성을 다했을 것이오.”

말을 마침과 함께 도천수는 급작스럽게 자신의 의수로 천령개(天靈蓋)를 내리쳐 갔다. 자진하려는 것이다. 도천수가 그러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허나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날카로운 의수는 그의 정수리에서 갑자기 멈췄고, 움직일 수 없었다.

“그냥 죽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소? 나는 혁련노인이 한 가지 일을 해주길 바라고 있소.”

“.............?”

“저들에게 자신의 문파로 돌아가라고 설득해 주시오. 저들은 천마곡에 당도하기도 전에 모두 죽을 것이오.”

그것은 용서였다. 목적을 가지고 강명의 곁에 있었지만 도천수는 자신의 말대로 강명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은 강명 역시 알고 있었다. 도천수는 몸이 굳은 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저들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천마곡으로 진입할 것이오. 물론 우리가 천마곡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 혁련노인의 임무겠지만 저들과의 일을 마치면 혁련노인이 어떻게 행동하든 간섭하지 않겠소.”

이미 강명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끄는 전력이 가진 위력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후발대의 목줄을 끊지 않고 공격하는 시늉만 한 것이다. 정운학의 얼굴에도 이미 모두 알고 있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떻게 안 것일까? 모든 전서구는 자신이 관리했는데...... 정운학.... 그가 천마곡 내의 섭장천과 연락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천수의 내심에서 일어나는 그 의혹에 답을 주듯 강명이 말을 이었다.

“혁련노인이 준 전서는 분명 운령의 필체였소. 또한 그 안의 내용은 간곡하게 이번 일을 하도록 부탁하고 있었지만 또 다른 음호는 그 아이가 마지못해 썼음을 표시하고 있었소. 우리 사형제는 단지 글이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소. 결정적으로 이미 운학은 사부님과 연락이 되었고, 확인했소.”

결국 정운학이었다. 무공보다는 잔기술을 익히는데 열중한 그가 이런 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나는 혁련노인이 이런 상황을 방사형에게 알려도, 내가 천마곡으로 진입한다는 사실을 알린다 해도 탓하지 않겠소.”

무슨 뜻일까? 배신자라 할 수 있는 자신을 살려주고 모든 것을 알려준다 해도 무방하다는 말의 의미는...? 도천수는 고개를 숙였다. 강명은 젊었지만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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