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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천마곡 내에서 협력할 수 있는 조력자가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조력자가 과거 천하제일검의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섭장천이라면 위안 정도가 아니라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

문제는 서로간의 목적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담천의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제마척사맹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서도 명백히 적이었고, 앞으로도 동지가 될 수 없는 것은 명확했다. 다만 섭장천 일행과 협력해야 한다는 유일한 명분과 끈은 이곳을 살아서 빠져 나가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다행히 구양휘 일행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백결을 구출해 냈다. 백결은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었다. 심한 부상과 탈진한 상황에서도 정신력으로 버티며 자신이 이곳에 목숨을 걸고 찾아 온 목적을 완수했다. 그는 담천의가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의 대부분을 알려주고는 그제서야 혼절했던 것이다.

혼절한지 벌써 꼬박 하루가 지나가고 있음에도 백결은 깨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연속되는 위기 속에서 자신의 몸을 추스릴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해 진기가 완전히 고갈될 정도로 지쳐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백결의 정보로 기본적인 계획은 짜놓은 뒤였다. 이미 주어진 현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좁았다.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가야 된다는 것.

조만간 저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퍼붓는다면 끊임없는 소모전을 치루면서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공격하는 것도 무리였다. 쳐들어오는 적도 막아내기 힘든 판국에 공격을 하는 것은 자살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유일한 길은 천마곡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길은 어차피 하나, 연동을 통하는 길 뿐. 저들이 호락호락 연동을 통해 빠져나가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저들의 이목을 흐리고 연동의 입구를 장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목을 흐리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상대를 잠시나마 혼란에 빠뜨려야 한다.

최선의 방법은 기동력 있는 고수들이 저들을 기습해 혼란에 빠뜨리고, 나머지 주력은 그 틈을 타서 연동의 입구를 장악하는 것이다. 기습시 섭장천 일행이 도와준다면 금상첨화다. 또한 연동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 합세해 준다면 연동의 기관장치도 그리 난관이 아니다.

세세한 부분을 점검하고, 자신이 맡은 역할을 확인해야 했다. 계획은 치밀할수록 성공할 확률이 커진다. 더구나 상대를 당황하게 하고 일시에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방법은 무공만으로는 안 된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남아 있소?”

천막 안에는 이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특이한 것은 지금까지 수뇌들 회의에 참석해 본 적이 없는 초로의 노인과 이십 세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참석해 있다는 점이었다. 담천의는 초로의 노인에게 묻고 있었다.

“대부분 사용해 이제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소.”

초로의 노인은 얼굴에 화상을 입은 것 같은 흉터가 많은 인물이었다. 투박스러워 보이는 손 역시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흉터가 많았다. 이 인물이 바로 뇌정보(雷霆堡)의 보주인 양승조(片雛悳)이었다.

뇌정보는 화기(火器)로 유명한 무림 문파였고, 그곳에서 제조된 화약이나 화탄은 중원에서 가장 강력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제마척사맹에서는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제마척사맹에 합류하러 오는 길에 기습을 받고 대부분의 화탄을 소비했던 것이다.

그들이 묵고 있던 한 다점에서 일어난 폭발은 제마척사맹에 합류하려던 뇌정보의 서른두 명의 인물 들 대부분을 저 세상으로 가게 했다. 그들 중 살아 난 인물은 뇌정보의 보주 및 일대 제자 네 명뿐이었지만, 제마척사맹에 합류한 이후에도 심한 부상에 대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뇌정보주 양승조은 대답을 하면서 힐끗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이십대 후반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생 화장이라고는 아예 해 본적이 없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이목구비나 얼굴선은 매우 뚜렷하여 조금만 치장하면 미인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아이는 본 보주의 직전제자이자 하나밖에 없는 여식이외다. 이번 일을 제대로 수행할 사람은 이 아이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데려 온 것이오.”

여인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의논되고 있는 일은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맑고 깊은 눈은 고요히 잠겨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그녀는 희고 긴 손가락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무언가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손가락은 다른 여자와 달리 유난히 가늘고 길었다. 이런 손을 가진 여자는 대개 섬세하고 감정이 풍부한 반면에 매사 완벽을 추구하는 꼼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여인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고개를 들어 담천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알려주시는 게 좋겠군요. 그리고 본보에서 해야 할 일의 범위를 명확하게 해 주셔야 그것이 가능한지를 결정합니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처음 입을 열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목소리에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아서 그런지 여인의 음성이 매우 딱딱하게 들렸다. 담천의가 입을 열기 전에 몽화가 먼저 대답했다.

“전각 다섯 채를 무너뜨릴 수 있는 화기가 필요해요.”

“동시에 말인가요? 아니면 한 채 한 채 차례로 말인가요?”

“동시에 폭발시키는 것이 효과적이오.”

담천의가 대답하자 여인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렇다면 어렵겠군요. 단지 화기만 제공하면 된다면 가능하겠지만 화기를 다룰 인원까지 필요하다면 본 보에서는 나설 인원이 저 한 사람밖에 없어요.”

“화기를 다룰 수 있도록 가르쳐주면 안 되나요?”

몽화가 묻자 여인의 눈가에 미세한 움직임이 일었다.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화기를 다루는 방법을 단시간 만에 알려준다고 될 일인가? 자칫 조그만 실수가 큰 화를 부를 수 있는 게 화기다.

“화기다루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요? 일년 정도 가르치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각 한 채를 날릴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진 화기는 아무나 다루는 것이 아니에요. 한 순간 잘못하면 자신과 오장 방원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날라 가 버리는 것이죠. 어차피 그렇게 개죽음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가르쳐 드릴 용의가 있어요. 다만 그런 사람들과 동시에 다섯 채를 폭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곤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요.”

“우리 현실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도록 강요하고 있소.”

여인이 말이 되지 않는 듯 대답하자 담천의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을 모를 여인이 아니다. 하지만 중대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화기를 나누어 주는 순간 누군가의 실수로 폭발한다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소저에게 배울 사람은 본인을 비롯해 구양형 등 몇 사람이오. 머리가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 아주 간단한 작동법과 주의사항만 철저하게 가르쳐 주면 목적을 달성하는데 그리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오.”

어차피 모험이었다. 여인은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이틀 정도의 시간이 필요해요. 하루는 화기를 다루기 쉽게 개조하는 시간..... 또 하루는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시간이에요.”

이틀이란 시간은 너무 길다. 그 안에 저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해 온다면 짜 놓은 모든 계획이 틀려버릴 수 있다. 담천의는 몽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몽화의 고개가 미미하게 저어졌다.

“하루 반나절..... 그것도 긴 시간이오. 기습은 모레 새벽 축시(丑時) 말에 감행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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