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오마이뉴스 이종호
"천(정배) 장관 말씀이야 속시원합니다만 최 기자가 오버하신 것 아닙니까? 아니라면 천 장관의 비보도 요청이 거짓말인가요?" - 황당무(rachel96)

지난 13일 쓴 <"X도 모르는 놈들이 대통령 조롱, 옛날 같았으면 전부 구속됐을 것">이란 제목의 기사에 달린 한 네티즌의 댓글입니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12일 밤 법조출입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일부 보수 논객들을 맹비난했다는 것이 기사의 골자였지요.

기사를 출고한 직후 네티즌들의 반응은 천 장관의 발언에 대한 찬반으로 갈려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후속 보도에 나선 일부 언론이 "<오마이뉴스>가 천 장관과의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전제 발언)'를 깨고 기사를 썼다"고 보도하면서부터 댓글의 내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이비, 저열한 한건주의! 오마이 갓~" - 겨울바람(cms1016)
"양심이 있으면 (기자를) 그만 두셔야죠. 취재원과의 약속을 그렇게 파기하는 사람이 어떻게 기자 생활을 할 수 있나요." - 나그네(towoo1026)


이보다 더 격한 표현의 댓글이 수백건씩 올라왔습니다. 급기야 김동민 한일장신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17일 한 인터넷매체 칼럼에서 "믿고 편하게 한 얘기를 기사로 만들어 공개한 오마이뉴스는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린 것이니 그 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며 "오마이뉴스가 몰상식하다"고 폄훼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네티즌이야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해 그럴 수 있다지만, 언론학자인 김 교수마저 진위파악 없이 무작정 단정짓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또한 사건은 더욱 확대돼 17일 한 현직 검사가 천 장관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리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정치인이 술자리에서 하는 얘기는 모두 기사화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스스로 기자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보도 약속을 깬 이유를 밝혀야 한다." - 환생(silborn)

'환생'님의 말마따나 이제는 기자가 왜 천 장관의 발언을 기사화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습니다.

천 장관이 먼저 "기사를 쓰려거든 써라, 써도 된다" 발언

과연 기자는 천 장관과의 오프 더 레코드 약속을 깬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취재원과 기자의 저녁식사나 술자리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기사화를 전제로 하지 않는 대신 서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하게 만나서 얘기를 하자는 취지에서죠. 지난 12일 밤도 그랬습니다.

이날 천 장관과 법조출입 기자 10여명은 서울 서초동 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 인근 주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천 장관이 자리에 앉자마자 한 일간지 기자가 천 장관에게 '검찰의 안기부 X파일 수사는 삼성 봐주기 아니냐'는 취지의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천 장관은 공소시효 완료 등 법리적 한계를 내세웠지만, 그 기자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집요한 질문이 이어지고, 천 장관이 적극적으로 답변을 하면서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기자들은 모두 천 장관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죠.

그래서였을까요? 천 장관은 'X파일'에 대한 대화가 끝나자 작심한 듯 기자들을 향해 "정책적 비판이 아니라 인간적 모욕을 주고 있다"며 노무현 대통령에 비판적 논조를 견지하고 있는 일부 보수 논객을 성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도했던 내용은 이때 나온 발언입니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한 바와는 달리 천 장관은 당시 취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취하지도 않은 천 장관이 평소 볼 수 없었던 과격한 용어를 쓰자, 기자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천 장관을 뚫어지게 쳐다봤죠.

그러자 천 장관이 먼저 나서서 "내가 지금 한 말을 기사로 써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에 확신을 주기 위해서인지, 그 뒤로도 한 차례 더 기자들을 향해 "기사를 쓰고 싶으면 쓰라"고 강조했습니다.

기자는 당시 천 장관의 발언이 충분히 뉴스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법조로 오기 전 정치부에서 4년간 취재를 했지만 천 장관이 그날 만큼 어떤 사안에 대해 직설적인 표현을 써가며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발언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발언을 하고 있는 당사자가 현직 '법무부 장관 천정배'라는 점 역시 '전달할 가치가 있는' 뉴스였습니다.

게다가 이날 저녁 자리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것이 사실이지만, 천 장관 스스로 자신이 했던 말에 대해 기사를 써도 좋다고 밝힌 상황이었습니다. 비보도 전제를 푼 것은 천 장관인 셈이죠.

다른 언론은 왜 먼저 보도하지 않았을까

이를 두고 뒤늦게 기사를 쓰게 된 일부 방송과 신문에서는 <오마이뉴스>가 오프 더 레코드를 깼다고 사실과 다르게 보도했더군요. 그럼, 다른 언론사는 왜 먼저 그 기사를 쓰지 않았을까요?

당시 천 장관의 "쓰려면 써라"는 말에 대해 다른 기자들은 그저 호기 정도로 판단, '굳이 술자리에서 나온 말을 기사화 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안 썼다는 것입니다. 천 장관의 말을 들었던 기자들 사이에서 해석에 차이가 있었다면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지금도 기자는 비보도 약속을 깨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한가지 더. 천 장관의 발언에서 당사자로 지목됐던 일부 보수 언론으로서는 이 내용을 기사화하기에 껄끄러울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천 장관조차도 자신의 발언에 대한 해명 자료를 내면서 "정제되지 않은 표현"에 대해서만 사과했을 뿐, 기자가 비보도 약속을 어기고 기사를 썼다는 식의 입장 표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기자는 당시 천 장관이 기사화를 해도 좋다고 했던 부분만 보도했습니다. 저녁 식사 등에서 나왔던 유시민 의원 관련 발언 등은 여전히 천 장관과의 오프 더 레코드 약속이 유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언론은 이미 비보도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했는지, 저녁 식사에서 나왔던 천 장관의 다른 발언까지 전부 기사화를 했더군요.

곤욕 치른 천 장관에게는 유감

일부 네티즌들은 '이 얘기를 왜 이제서야 하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네요. 이번 보도를 두고 오프 더 레코드를 깼느니, 안 깼느니 하면서 입에 담기조차 민망할 정도의 비방 댓글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몇 번이고 입장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오프 더 레코드를 깨지 않았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천 장관과의 그날 저녁 모임을 다시 한번 거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기사를 출고하면서 기자는 천 장관에게 쏟아질 비난과 치러야 할 곤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천 장관의 동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내내 그러한 부담이 옥죄었습니다. 특히 천 장관 발언의 대상이 된 일부 보수언론에서 '막말' '술자리' 등의 표현을 동원해 발언의 진의를 왜곡, 무차별 공세를 취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 우려가 됐습니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화가 됐죠.

그럼에도 기자는 기사를 써야 하고, 기자는 늘 이러한 상황과 직면하게 됩니다. 때문에 기사는 썼지만, 천 장관에게 개인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다시 천 장관의 발언을 상기시키는 글을 제 손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