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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의 <뷰티풀 몬스터> 표지
ⓒ 생각의 나무
웬만한 책 한 권 가격이 밥 두끼 값을 상회하는 현실에서 나는 새 학기에 꼭 필요한 교재를 사는 동안 손을 파들파들 떨어야만 했다. ‘안 벌고 안 쓰겠다’는 걸 소신으로 삼은 가난한 기숙사생에게 패션지란 거기 실린 가격표에 ‘0’이 잘못 달린 것 같은 옷만큼이나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그러던 중에 패션지 기자라는 김경의 칼럼집 <뷰티풀 몬스터>를 읽게 됐다. 이 책은 <한겨레 21>에서 ‘스타일 앤 더 시티’라는 이름으로 2년 가까이 연재되었던 칼럼을 묶은 책이다. 지면 관계상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추가하고, 어떤 글들은 다소 손을 보았다고 한다.

이 책을 그다지 공들여 읽을 생각은 없었다. 스타일에 대한 칼럼이라니. 처음에는 그녀 표현대로 “패션지에서 주로 연예인에 대한 한심한 기사를 쓰는 에디터”가 무슨 칼럼인들 제대로 썼겠는가 싶었다. 대충 읽어보고 서평에다가 저주를 퍼부어주려고 했었다. 내용은 없이 폼만 잡은 ‘속물’의 잡문집이 잉크를 낭비하고 있다고.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은 책장을 넘기는 동안 바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속물이 아니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패션지 기자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저자는 솔직하고 거침없는 ‘속물’이 얼마나 매력적인 스타일인가를 증명한다. 스타일이나 외모에 대한 관심은 인간이 생긴 이래 끊임없이 있어온 것이다. 그녀는 자신도 자유롭지 않은 그것에 거리를 두기보다 오히려 자기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스타일’을 찬양하고자 한다.

외모나 스타일을 애써 부정하고 무시해온 흐름은 뿌리가 깊다. 근본을 찾자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의 세계는 허상이고 왜곡된 세계이며, 진정한 세계는 존재 저편의 ‘이데아’에 있다던 고대의 플라톤으로부터 찾아야 할지 모른다. 주어진 현실 이상의 숭고하고 완벽한 세계가 있다는 현세부정의 사상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있어 왔던 것이다.

딱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을 것도 없었던 우리 나라에서는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를 일이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이나 고귀한 지성 같은 추상적인 가치들에 비해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같이 밖으로 보이는 가치들은 항상 부차적인 지위를 차지해온 게 사실이다.

심지어 ‘수다’의 수준을 넘어서는 대화에서 외모나 스타일을 말하는 것은 골빈 속물이나 하는 짓으로 간주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보라. 과연 어떤 여자가 좋은 책에 대해 초연한 것처럼 샤넬 수트에 초연할 수 있을 것이며, 과연 어떤 남자가 마음씨 고운 여자에 초연한 만큼 가슴 큰 여자에 초연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데로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에 존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런 아름다움은 알기도 힘들 뿐더러, 밖으로 표현되지 않는 한 알 필요도 없는 것일지 모른다. 솔직한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며 고상한 척 하는 사람들의 두 얼굴로부터 김경이라는 ‘속물’은 너무도 초연하다.

▲ <뷰티풀 몬스터>의 저자 김경, "나는 누군가 ”네 영혼을 사랑한다“고 하면 솔직히 코웃음이 날 것 같다. 하지만 내 팔이나 내 가슴처럼 확실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남자 앞에서는 나는 도리가 없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가능하면 눈에 보이는 걸 칭찬하면 좋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칭찬하는 것은 한편 그럴 듯해 보이지만 대체로는 믿을 수가 없다. 나는 누군가 “네 영혼을 사랑한다”고 하면 솔직히 코웃음이 날 것 같다. 하지만 내 팔이나 내 가슴처럼 확실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남자 앞에서는 나는 도리가 없다.”(260쪽,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대부분의 칼럼들이 아는 척 하는 지식인들의 ‘현세부정’을 담고 있는 데 반해, 그녀에게는 현실과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들의 괴리가 없다. 삶에 주어진 것을 긍정하고 찬양하는 것, 그녀는 실천이 ‘스타일’의 문제임을 인식한 푸코를 연상시킨다. <성의 역사>에서 그리스인들의 자기 절제와 자기 창조의 양생술을 길게 인용한 푸코는 권력에 의해 압도된 근대적 주체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스타일로 삶을 창안해내는 것을 새로운 실천의 과제로 제안했었다.

고고하고 추상적인 세계에서 ‘먹물’들이 허우적거릴 동안 김경은 보다 덜 추상적인 것, 실질적인 것을 향해 삶을 창안해내려 움직인다. 삶은 이제 고고한 무엇을 향해가는 중간 단계가 아니라 스타일이라는 의미있는 창조행위, 그 자체이다. 누군가는 발끈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거침없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지금 당장 가난한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책상머리에서 앉아서 우리 시대 가난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는 이들이 아닌 것이다. 나처럼 멋으로라도 기부 활동에 참여하는 속물들이다. 그러니 그게 모방이든, 위선이든, 가식이든 혹은 섣부른 동정이든 어떠랴 싶다.”(52쪽, 멋으로 하는 자선활동)

그녀의 칼럼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칼럼이 마음에 안 드는 다른 사람이나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에 주요 내용을 할애하고 있는 데 반해, 김경의 칼럼에는 유난히 남을 칭찬하는 글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경의 칭찬은 남에 대한 칭찬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 자신이 창안하고 싶은 스타일과 연결된다.

김경의 글에는 교환불가능하고 확고불변한 칼럼니스트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가고 싶은 삶의 스타일이 먼저 있고, 정체성은 그에 따라 선택된다. 그녀가 낸시 랭을 말하고 오노 요코를 칭찬할 때, 그녀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을 품평하는 대신 그녀 스스로 ‘낸시 랭’이 되고 ‘오노 요코’가 되는 것 같다.

“(낸시 랭은) 대중문화 영역의 ‘천박한 아름다움’에 머물러 있던 ‘육체적 관능미’를 전시장 안으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이미 절반의 성공이다. 거기다 그녀의 섹시한 퍼포먼스가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남몰래 충족하는 관음증에만 익숙한 점잖고 교양 있는 부류들을 당황하게 하고, 위선과 가식을 싫어하던 부류에게 즐거움을 줬다면 아티스트로 대단히 훌륭하다. 또한 삶과 예술이 일치한다는 점에는 그 존재 자체가 팝아트적인 예술 작품인 것이다.”(181쪽, 낸시랭의 애교연구)

이렇게 ‘수백개의 정체성’을 경유하면서 그녀가 보다 그녀다워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신뢰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그런 스타일이 얼마나 힘있고 아름다운 것인지는 그녀의 칼럼을 통해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영화속의 악녀와 전도연의 노브라, 모텔의 변화에 대해서 당당하게 찬양하는 칼럼을 만나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젯밤 힘들었던 술자리조차 재밌는 칼럼으로 승화해낼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은 놀랍다. 그러나 한 가지 당부. 나를 비롯해 그녀의 새로운 스타일의 가능성을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김경씨, 이제 술은 좀 적당히 마셔주길.

뷰티풀 몬스터 (보급판 문고본)

김경 지음, 생각의나무(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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