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송회 사건으로 강제해직됐다 24년 만에 복직한 조성용씨.
오송회 사건으로 강제해직됐다 24년 만에 복직한 조성용씨. ⓒ 박주현
"인생의 황금기를 '빨갱이'로 낙인 찍혀 고문과 탄압, 감시와 미행 속에 살아온 내게 복직은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이었다. 너무 늦어졌지만 이제부터 할 일이 더 많다."

5공 시절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인 이른바 '오송회(五松會)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구속돼 직장을 잃고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 24년 만인 지난 9월 1일 옛 직장인 KBS 전주방송총국 방송심의위원으로 다시 돌아온 조성용(68·전북 전주시 팔복동)씨.

관련
기사
"이제 우린 빨갱이가 아니다"

KBS 전주방송총국 3층에 위치한 서너 평 남짓한 심의위원실에서 만난 그는 이미 반백의 노신사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20여 년간의 인고의 세월을 회고하는 또랑또랑 목소리와 깐깐한 눈매에는 아직 못다 푼 과제들이 많이 남아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지난 1982년 오송회 사건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당시 몸담아 일했던 KBS 남원방송국에서 강제 해직된 후 2년6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85년 풀려나 복직을 위해 온갖 노력을 해오다 20년이 훌쩍 넘은 후에야 옛 직장을 되찾았다.

그는 "아직 5공 시절 해직 언론인들 중 60명 이상이 복직이 안돼 어려움에 처해 있다"며 "그들을 위해 이제부턴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령임을 감안, 2007년 12월 말까지 계약직으로 2년4개월간 심의위원으로 일할 예정이다. 다음은 조성용씨와의 일문일답이다.

4·19와 5·18 추모제 지낸 교사들, 간첩으로 몰려

조성용씨.
조성용씨. ⓒ 박주현
- '오송회 사건'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진 것인가?
"전두환 군사 정권 시절인 1982년 내가 한때 몸담아 재직 중이던 군산제일고 전·현직 교사 5명이 4·19와 5·18 희생자에 대한 추모제를 지낸 것을 경찰이 용공집단으로 몰아 '다섯 명의 교사가 소나무 밑에서 북한을 찬양하거나 정부 체제를 비판하면서 반국가단체 구성 및 간첩행위를 했다'고 해 붙여진 날조된 사건 이름이다.

사실 오송회 사건의 발단은 82년 한 시외버스 안에서 <병든 서울>이라는 월북 시인 오장환씨의 복사본이 발견되자 신고를 받은 경찰이 이를 추적하다 군산제일고 교사들의 모임을 포착하면서 발단됐다. 5·18 직후부터 지금은 고인이 된 이광웅씨를 비롯해 채규구, 강상기 교사 등이 모여 독서 그룹을 만들고 토론한 것이 그들의 눈에는 간첩 활동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 당시에는 군산제일고가 아니라 지역 방송사에서 총괄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인데 왜 사건을 주도한 것처럼 연루됐나?
"78년 군산제일고에 재직 중이던 나는 79년 1월부터 지금은 없어진 KBS 남원방송으로 옮겨 취재와 편성 총괄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82년 11월 초 느닷없이 오송회 간첩사건을 주도하고 배후 조종을 해 온 인물로 지명돼 연행됐다. 지금도 내가 왜 그 사건에 끼게 됐는지 알 수 없다."

- 연행 후 상황에 대해서 말해 달라.
"40여 일간 전주 시내에 위치한 대공분실 안가에 감금돼 잠도 자지 못하고 전기 고문과 각목 세례, 물고문 등 온갖 고문과 함께 조사를 받았다. 83년 첫 재판이 열려 자격정지와 선고유예판결을 받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검찰이 항소해 광주고등법원에서 2년6개월에 자격정지라는 올려치기 재판을 받았다.

다른 동료들도 선고유예 또는 최고 4년형을 1심에서 받았다가 2심에서는 되레 형량이 늘어났다. 이광웅씨는 4년에서 7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하긴 당시는 인권이 전혀 무시된 3심제였으니까…."

- 2년6개월의 실형을 마치고도 20년이 넘도록 복직을 하지 못했다. 오송회 사건 연루자 9명 중 가장 늦게 복직이 됐는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복직을 요구하며 요로에 탄원서도 보내 보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때마다 국보법 실형 이상자는 재범 우려가 있거나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번번이 거절 당했다.

6공 정권 출범 이후 법적 사면은 이뤄졌지만 그 후로도 연행과 구금, 조사와 미행이 지속됐다. 지난 99년 9월 1일자로 오송회와 관련된 교사들이 복직됐음에도 내 뒤엔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뒤에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특히 다른 동료들은 교사로 복직됐으나 나는 언론사로 복직해야 했기 때문에 가장 늦었다. 지금도 수많은 해직 기자들이 복직되지 않고 저렇게 거리를 배회하고 있지 않는가."

"당해 보지 않으면 몰라... 보안법에 잘못 걸리면 인생 끝장"

- 그동안 가족들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현재 사정은 어떤지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아내는 내가 직장을 잃고 징역살이와 복직을 위해 반평생을 헤매고 다닐 때 두 자녀들을 위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막노동도 마다 않고 일해 왔다. 항상 아내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더 고약한 것은 지금 대학원과 대학에 다니는 두 자녀들이 그 동안 '간첩의 자식'이라는 오명으로 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기가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가족들을 바라보면 그저 할말이 없지만 남은 인생은 이들에게 뭔가 희망과 보람을 안겨줄 수 있게 헌신할 생각이다. 지금도 경제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 24년 만에 다시 찾은 직장인데 낯설거나 불편하지는 않는지.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온 복직이건만 막상 복직하고 보니 너무 늦은 나이가 됐다. 그러나 80년 5·17 쿠데타 이후 집권한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언론사에서 쫓겨난 해직 언론인들이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을 차츰 찾겠다.

다행히 직장에서 동료 또는 후배들이 많은 관심과 배려를 해주고 있어 너무 고맙다. 생소한 업무를 익히고 적응하기엔 다소 어려움도 있지만 지금까지 겪어온 힘든 삶에 비할 수 있겠느냐."

- 국가보안법에 대해 아직도 논쟁이 치열하다. 그로 인한 피해자로서 생각이 남다를 것 같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다. 나 같이 돈도 권력도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 한 번 걸려들면 인생이 끝장 나는 게 바로 보안법이다. 지금도 보안법이 존치돼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들 자신과 자녀들이 그로 인해 수십 년을 억울하게 사회로부터 배척 당하고 살았다면 그런 소리가 나오겠는가. 당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모른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