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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래, <레오 스트라우스> 표지
ⓒ 김영사
요즘 미국이 하는 말은 꼭 '외계어'를 보는 것 같다. 그들은 북한 정권의 성격을 '참주정(tyranny)'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대북정책의 기조를 '레짐 트랜스포메이션(regime transformation)'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은 잘 쓰지도 않는 '참주정(tyranny)'이니 '레짐(regime)'이니 하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한국의 외교부와 정치인, 언론들은 쩔쩔 매야 했다.

현직 정치부 기자가 쓴 책 <레오 스트라우스>는 한국이 네오콘(Neo-Conservative,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를 일컬음)들에 대해 너무 무지하기 때문에 미국의 세계 전략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예로 '참주정'을 '폭정'으로 번역하거나 '레짐 전환'을 '온건한 체제 전환' 정도로 해석해온 것 등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다.

미국의 세계 전략 이해는 부시 행정부에서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네오콘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네오콘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스승인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선제공격론'의 폴 울포위츠, 네오콘의 대부 크리스톨 부자, 후세인이 대량살상 무기를 갖고 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리며 이라크전 정보조작을 주도한 리처드 펄과 에이브럼 셜스키, 배아줄기세포 연구 반대의 선봉 레온 카스, 체니 부통령의 비서실장 루이스 리비, 세계적인 석학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 네오콘 핵심인사들은 모두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쳤던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이었다는 게 그 근거다.

책에 따르면 '참주정'이니 '레짐'이니 하는 단어는 미국의 핵심인사들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아니라 네오콘들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로부터 비롯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스트라우스 코드', 네오콘들의 단어 이해하기

그들이 말하는 '북한의 레짐 트랜스포메이션'은 흔히 번역하듯이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유도하는 수준의 '온건한 체제 전환'이 아니다. 레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레짐'은 단순히 정치영역의 성격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사회, 문화 영역, 삶의 방식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레짐 트랜스포메이션'은 그런 '레짐'을 바꿔버리겠다는 뜻이다. 김정일 같은 정치지도자와 정치 제도를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북한의 문화, 북한 주민들의 삶의 방식까지 모두 뜯어고치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이는 결코 미국의 대북 강경책이 풀렸다는 뜻이 아니었다.

얼핏 애매해 보이는 '참주정' 역시 '악의 축'보다 온건한 표현이 아님은 물론이다. 근대의 가치중립적인 학문을 경멸하는 레오 스트라우스는 고대의 크세노폰으로부터 '참주정' 개념을 빌려와 현대에 되살렸다. 레짐은 '참주정'과 '민주정' 등으로 나뉜다. 그에 따르면 민주정은 안 그래도 어리석은 대중들이 지배하는 열등한 레짐인데, 참주정은 참주가 어리석은 대중들을 좌지우지 하는 '가장 열등한' 레짐이다.

시카고 대학의 대표적 스트라우시언 네이선타코프 교수는 '참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참주는 자신의 권력에 제한을 두지 않고, 정통성 있는 직위도, 국민들의 동의도 없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통치하는 통치자"라고. 볼 것도 없이 '참주정' 개념은 김정일을 겨냥하고 있고, 북한의 '열등한' 레짐을 뜯어고치기 위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개념인 것이다. 이를 두고 미국이 '노골적인' 강경 표현에서 '완화된' 표현을 쓰고 있다고 안도할 수 있을까?

네오콘들은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닐 뿐더러,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네오콘들이 강경하게 북한에 접근하는 것은 문제지만, 북한을 '민주정'으로 이끄는 것은 필요한 일 아니냐고. 그들을 온건한 입장으로 설득하기만 하면 해결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네오콘들이 미국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민주주의자'가 아닐 수도 있다면?

스트라우스는 근대의 가치중립적 학문과 상대주의를 혐오했다. 학문은 가치와 분리될 수 없다고 믿는 그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의 철학자들을 현대에 되살리는 데 주력했다. 스트라우스는 단순히 그들을 인용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어리석은 대중들의 '민주주의'를 혐오하고 정치란 똑똑한 '엘리트'들에 의해 이루어져야한다는 그들의 입장까지 옳다고 믿었다.

이런 스트라우스에게 영향을 받아서인지 일부 네오콘들은 자신의 나라인 '미국'조차도 긍정적인 '레짐'으로 보지 않는다. 미국을 고대적 진리가 아닌 근대 자유주의에 기초한 나라로 보기 때문에 혐오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은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들의 '엘리트주의'는 교묘하게 자신의 '반미국적' 사고를 은폐한다.

스트라우스의 엘리트주의를 살펴보면 네오콘의 사고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의 책에는 가끔 주제에 상충하는 듯한 내용이 발견된다. 보통의 독자들은 '옛날 책이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겠지만 스트라우스는 대가인 플라톤이 그런 실수를 했을 리 없다고 말한다. 그 부분이 플라톤의 원래 주장이 담긴 곳이라는 것이다. 대중들은 진리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플라톤이 '고귀한 거짓말'을 했다고 스트라우스는 주장한다.

어리석은 대중들은 진리를 말하는 소크라테스를 죽였다. 그들은 진리를 감당할 수 없을 뿐더러 알아서도 안 된다. 그래서 스트라우스는 읽어도 읽어도 보통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밀교적 저술방법'으로 책을 썼다. 따라서 그의 저작에서는 '본래 의도'와 '고귀한 거짓말'을 구별해 읽을 수 있는 '엘리트'의 능력이 중요하다.

이제 스트라우스의 제자인 네오콘들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을 이야기하면서도 '엘리트주의자'인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깃발은 대중들을 속이는 '고귀한 거짓말'인 것이다. 네오콘들은 목표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패권주의'도 노골적으로 찬양하는가 하면 '전쟁'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상대주의와 자유주의에 의해 타락한 미국을 통합시키고, 애국심을 강화할 수 있다면 그들은 "이라크에 핵무기가 있다"는 식의 거짓말을 언제고 다시 할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마키아벨리즘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마저 '하수'라고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거짓말은 몰래 해야지 마키아벨리처럼 떠벌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9. 11 테러의 경험 이후 미국인들은 '테러 방지법'에 찬성하며 자신들의 자유를 스스로 반납했다. 계속해서 '테러와의 전쟁' 이벤트를 준비하는 네오콘들은 '어리석은' 대중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반납하라고 거짓말을 일삼으며 엘리트들의 귀족정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부시의 떨어지는 지지율은 대중들이 그렇게 어리석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귀신보다 무서운 <레오 스트라우스>

저자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미치광이일리가 없다"며 "그들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상식적인 과정에서 이 책을 준비했다고 한다. 네오콘들을 배출해낸 대스승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한 조명을 통해 '그들 나름의 논리'를 파악해내려고 한 저자의 시도는 성공적인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미치광이'일 리가 없다는 저자의 생각엔 끝내 동의해줄 수 없다. 21세기에 '걸러지지도 않은' 고대의 진리가 웬 말인가. 세계 최강대국을 움직이는 권력자들이 거짓말을 일삼는, 아니 거기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엘리트주의자라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초가을,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납량특집'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레오 스트라우스 -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박성래 지음, 김영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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