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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모습. 그녀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보부아르를 위시한 과거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자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회 구조적 차별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적인 차별과 억압만 철폐한다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인간'으로 대접받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제목부터 <제2의 성>을 겨냥하고 있는 헬렌 피셔의 <제1의 성>은 그 가정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헬렌 피셔는 남성과 여성이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다른 천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남녀의 차이는 인류 진화의 결과이다. 수백만년동안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일을 맡아왔고, 몇 세기 동안 그것이 축적이 되면서 남녀의 뇌구조에 미묘한 차이를 남겼다는 것이다. 선조들이 수천년간 갈고 닦은 기술들을 남자와 여자는 자궁에서부터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하여 헬렌 피셔는 보부아르의 유명한 명제를 뒤집는 데까지 나아간다.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남자와 여자는 애초에 능력이 다르고 할 일이 다르니, 남자들이 하던 일에 더 이상 개입하지 말라"는 남성우월주의자들의 오랜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남성우월주의자들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남성의 우월함과 여성의 열등함으로 생각한다. 이와 달리 헬렌 피셔는 여성은 여성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고, 남성은 남성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차이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일 뿐이다.

과학적인 실험결과와 데이터로 무장한 헬렌 피셔는 여성을 더 이상 남성의 뒤에 오는 부차적인(제2의) 성으로 두지 않는다. 모든 태아는 남성 호르몬이 침입하지 않으면 모두 여성으로 태어난다. 남성이 되기 위해선 화학 물질(호르몬)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여성은 시원적인 성이자 '제1의 성'이라는 피셔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물론 저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경제 및 사회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여성의 생물학적 특별함에 주목한다.

▲ 헬렌 피셔, <제1의 성> 표지.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제1의 성은 여성이다."
ⓒ 생각의 나무
과거의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성을 사회구조적으로 내면화된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온 반면, 헬렌 피셔는 여성의 특수한 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또 일부에서는 남성보다 '뛰어난 것'으로 설명한다. 여성은 '거미집 사고'라는 특별한 뇌구조를 가졌다.

'계단식 사고'로 특징지워지는 남성의 뇌구조가 한번에 한가지 일밖에 처리하지 못하는 직선적이고 단계적인 특징을 가진다면, 여성의 거미줄 사고는 한번에 여러 가지 일을 소화하고 전후맥락과 관계를 조망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고 한다.

이러한 '거미집 사고'는 여성의 뇌 전두엽 앞쪽 피질의 부분이 남성보다 크기 때문에, 또 좌뇌와 우뇌의 각 구역을 연결하는 뇌량들이 남성보다 발달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남성은 '지위'를 지향하는 반면에 여성은 '인간관계'를 중시한다. 그리고 여성은 '언어 능력'에 있어 남성에 비해 뛰어나다. 또한 타인의 마음을 읽는데 남성들보다 뛰어난 면을 보인다. 이런 온유하고 치유적인 여성의 감수성은 뇌구조의 특징과 아울러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영향 때문이다.

과거에는 기업이든 정부조직이든 수직적인 위계구조로 짜여진 데다가 경직된 의사결정과정을 가졌기에 이러한 여성성이 긍정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육체노동의 중요성이 점차 낮아지고 있고,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네트워크식 조직 모델(하이보그hyborg)들이 각광받게 될 미래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네트워크는 거미집 사고를 하는 여성을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여성성은 남성성을 능가하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실제 기업, 정부, 서비스 분야 등에서 여성들이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의 예를 제시하면서 저자는 이를 뒷받침한다.

여성의 증대한 영향력은 사회 조직에서뿐만 아니라 섹스와 연애, 결혼의 패턴까지 바꾸고 있다. 남성적인 욕망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은 이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것이 되었고, 성적인 접근은 여성의 욕망을 고려해 '정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의 욕망이 성적 '매너'를 창출하는 것이다.

연애도 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조건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과거 여성의 굴종과 예속을 상징했던 결혼 제도 역시 낭만적 사랑의 부활과 함께, 어느 때보다 평등한 관계를 바탕으로 경제적, 지적으로 충실해질 가능성이 높아져가고 있다. 헬렌 피셔는 이제야말로 '여성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예감한다.

"여성들이 인류의 이익과 선을 위해 순수하게 힘을 모을 수 있게 되는 날, 그 힘은 인류 역사상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크기가 될 것이다."(본문 첫 페이지)

여성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그럼 남성은 긴장해야 하나?

▲ 책의 저자인 헬렌 피셔. 그녀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새로운 이해를 구축하고, 서로 어울려 일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 KBS 제공
"여성이 '제1의 성'이라고? 그럼 또 다른 우월주의 아닌가?" 벌써부터 불편해할 남성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여성의 시대가 도래한다니 "이제 내 밥그릇이 뺏기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남성들도 꽤 있을 것 같다. 아마 그런 불만과 걱정은 이 책을 읽는 가장 나쁜 방법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책의 허점들을 발견하고 트집거리를 찾고, 아직도 남성이 할 일은 남성이 해야 한다는 편견의 벽 안에 살고 싶은 남성들이 있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변하고 있고, 앞으로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생각하지 않으면 그 변화 속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물론 <제1의 성>은 비판받을 점이 많다. '여성성'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학습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책이 사회 구조 속에서 억압된 여성성에 대해 보여주는 성찰은 부족하기 그지없다. 이 책의 결론인 생물학적 진화론에 입각한 낙관론도 다소 의심스러울 여지가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생물학적인 규정보다 사회의 규정을 받을 때가 더 많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실제의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상형으로 딱 나눠떨어지지 않는다. 모두는 완전한 '남성'과 완전한 '여성' 중 어느 중간쯤에 위치하는 존재들이다. 자기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성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은 인간 스스로 선택하는 성에 대해서도 공백을 남긴다. 이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혐의를 벗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최소한 '여성 우월주의'에 대한 책은 아니다. 다만 남성적인 문화가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또 다른 인류의 가능성을 열어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협력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책이다.

눈을 막고 귀를 막아도, 남성들은 나머지 세상의 반쪽과 함께 숨쉬고 생활해야 한다. 이 책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단은 남성들이 가질 수 있는 많은 오해를 불식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제1의 성이니 제2의 성이니 하는 개념을 초월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진정으로 협력적인 사회를 향해, 남녀 양성의 장점을 서로 이해하고 평가하고 채택하는 그런 글로벌 문화를 향해 한걸음 나아가고 있다.

21세기는 근대 이후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자격으로 일하며 함께 사는 첫 시대가 될 것이다. 원래 남성과 여성이 삶을 영위하게 되어 있던 방식 그대로, 한때 수천년 동안 남성과 여성이 살았었던 방식대로 말이다."(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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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성은 당신의 그것과 다르다

덧붙이는 글 | <제1의 성>은 미국에서 1999년에 발표되었고, 국내에는 2000년에 소개되었다. 한동안 절판되었다가 2005년에 개정판으로 복간되었다.


제1의 성 -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성의 인류학, 개정판

헬렌 피셔 지음, 정명진 옮김, 생각의나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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