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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가라이, <하나이지 않은 성> 표지
ⓒ 동문선
근대는 '분리'와 '배제'라는 두 단계의 전략을 사용하며 발전해 왔다. 문명과 야만,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과학과 미신 등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 '중심'과 그렇지 않은 '주변'을 '분리'한 다음, '주변'에는 온갖 부정적인 속성을 부여하며 그를 '배제'하고 타자화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그에 조응하는 '중심'의 진보가 '주변'의 구원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음은 차라리 자명한 일이었다. 세계를 비이성의 암흑에서 구출하겠다던 계몽의 야심찬 기획은 양지만을 비추는 빛이었으며 오히려 '주변'에게는 재앙과도 같았던 것이다. 중심의 '빛'은 주변에 대한 억압과 착취, 테러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그늘'의 이면일 뿐이었다.

이 그늘들을 증언함으로써 분리와 배제의 구조에 균열을 만들려고 했던 사유들을 조금 느슨한 범주이긴 하지만 우리는 '후기구조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읽기를 통해 '분리' 자체가 불가능함을 보여줬던 데리다나 배제되어 왔던 외부의 사유를 통해 구조의 규정을 벗어난 역동적 주체성을 도모했던 들뢰즈가 그 작업 방식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후기구조주의의 범주에 들 수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다.

후기구조주의 계열의 사상가들이 모두 한번쯤은 열풍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역동적이고 독특한 사유를 진행하고 있는 이리가라이가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매너리즘에 빠져 새로운 것들을 성실히 독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부 페미니즘 학회들이나 짐짓 깨어있는 척하면서도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주변적인 것으로 폄하해 버리는 남성 학자들의 편견 같은 것들이 적지 않게 작용하는 것 같아 씁쓸할 따름이다.

이 책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출발하는 것은 그래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시각'이 특권을 가진 이 '이상한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측량과 판단을 통해 계량화되고 합리화된다. 안경과 측량기구들의 특권- 보이지 않는 것은 무시되며 전혀 이질적인 것들이 동일하게 취급 받는 이상한 나라다. 남성의 시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이상한 나라에서는 '거울'로 존재한다.

자신의 모습을 잃은 채 남성의 욕망만을 반사하는 거울 뒤편에 갇혀 여성들은 신음할 수밖에 없다- 여성들이 앓고 있는 실어증과 히스테리들. 그러나 이는 모든 걸 '시력의 문제'로 생각하는 이상한 나라에서는 보이지 않는 고통일 뿐이다. 여성은 남성들 사이의 상품으로서, 남성의 사유의 질료로서, 남성이 부르는 고유명사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이상한 나라에 도전하기 위해 이리가라이는 우선 남성이론가들의 작업들에 대해 계보학적 탐문을 시작한다. 레비 스트로스, 프로이트 같은 쟁쟁한 이론가들이 심판대에 오른다. 이들의 죄는 명백하다. 성과 관련된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묻지 않고 그것을 과학화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지배 체계를 공고히 해왔던 것이다. 성을 다룬다는 인류학자가, 정신분석학자가 성의 역사적 형성 뒤에서 작용하는 남성적 권력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직무유기다.

가령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남근은 실제 존재하는 남성의 성기가 아니라 차라리 특권적인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적 발달의 과정에서 남근은 유일한 '진실과 소유의 표준'이다. 왜 여성의 성적 경험은 '결여'를 통해서만 정의되고 남근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발달을 완수할 수 있는가? 정신분석학자들이 정상 성기로 간주하는 질은 이리가라이가 볼 때 남성 성기의 연장이자 덮개일 뿐이다.

질이 음핵과의 경쟁 과정을 거쳐 성기로 정착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성의 리비도 발달은 사춘기 이전에 결정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여성은 자신의 관능보다 모성의 본능을 선택한다는 증명되기 힘든 가설을 이론화하고, 여성의 성욕을 항상 수동적인 것으로만 정의하려 하는 정신분석학의 모순들을 지적하면서 이리가라이는 여성의 성적 경험들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제껏 역사 속에서 일반적인 여성이 처해왔던 위치를 묻지 않고서는 어떤 국부적인 성적 논의도 가능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여성의 성적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리가라이를 읽을 때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가지는 문명 비판적인 기능이다. 남근을 중심으로 영역화된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시각'을 중심으로 자신의 욕망을 재현하려 하는 문명 체계를 형성해 냈다. 이것이 이질적인 것을 보기 쉽게 등질화시키고 영역화, 분절화해 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배제해 가는 세계를 형성했으며, 그 과정에서 지배와 피지배, 배타적인 소유와 착취 같은 근대성의 병폐들을 이끌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남성의 성감대와 달리 이리가라이가 볼 때 여성의 성감들은 질이나 음핵 같은 한 곳에 영역화되지 않는다. 곳곳에 조금씩 있는 여성의 성감대들은 저마다의 분포속에서 복잡하고 예민한 상태로 존재하며 어느 한 기관의 쾌락이 다른 곳의 쾌락으로 도치되지 않는다. 모든 쾌락을 성기 중심으로 수렴시키는 남성의 섹슈얼리티와는 차별화되는 점이다.

이리가라이가 '두 입술'이라고 부르는 여성의 성기 역시 프로이트가 말하는 결여나 남성 성기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발견된다. 여성의 성기는 프로이트의 남근과 달리 하나가 아니지만 둘 역시 아닌 구조적 독특성을 가진다. 나뉘어 있지만 완전히 나뉘지지 않은 두 입술은 너무도 가까이에 있기에 서로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과의 접촉을 통해 쾌락에 도달한다.

또한 '두 입술'은 만져지는 대상(객체)와 만지는 주체의 구분조차 필요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들은 주도권과 지배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평등한 쾌락을 만들어 낸다. 남성 성기의 침입은 오히려 둘을 가르고 방해할지 모른다. 다른 보충물을 요구하지 않고도 두 입술의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 여성은 자신의 욕망과 언어를 찾을 수 있다.

'동일성' 대신에 영역화되지 않는 '다양성'을, '시각' 대신에 소유하지 않는 '촉각'을, 발기의 '딱딱함' 대신에 액체적인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여성의 상상계는 그 존재만으로도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구축된 오늘의 재현체계와 문명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 이리가라이의 논의가 단지 '여성'만의 문제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이다.

이리가라이가 말하는 섹슈얼리티의 역사 비판, 문명 비판적 기능에 주목하지 않고 단순히 섹슈얼리티를 말한다고 해서 그를 새로운 본질주의자라거나 비역사적이라고 비난한다면 그녀에 대한 불성실한 독해를 광고하는 일일 뿐이다. 이리가라이가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비본질주의자라는 점은 남성 중심의 담화에 영역화되지 않기 위해 여성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거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했다기 보다는 남성 중심의 재현체계와 언어에 포섭되지 않은 비영역적인 힘들을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를 통해 소환해 내고 서로 지배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대안적 문화가 가능함을 보여주려는 것이 이리가라이의 본의가 아니었을까?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위치를 전도하려는 게 그녀의 목적이 아님을 이리가라이는 책 곳곳에서 밝히고 있다. 생물학적인 여성보다 남성중심적 재현 체계를 거부하는 남성이 이리가라이에 따르면 보다 '여성'적인 것 같다. 일부 여성운동도 그런 의미에서 이리가라이는 '남성으로의 추구', '남성화'라고 비판한다. 정의를 거부하는 그녀의 '여성'은 개념이 아니다. 분리와 배제를 통해 타자화된 '주변', 그 속에 영역화되지 않은 채 떠다니는 액체적 욕망의 해방을 예감하는 어떤 계시에 가깝다.

다양하고 비영역화된 욕망들이 마음껏 흘러다닐 수 있는 그런 세계가 가능하다는 계시 말이다. 그녀는 분명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를 진단하는 어떤 논의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도 딱딱한 평면거울 대신 거울 뒤편을 볼 수 있는 오목거울을 들고 그녀를 따라가 보자.

덧붙이는 글 | 이 책의 번역에는 한글 문법을 벗어난 비문들이 좀 지나치게 등장한다. '하나이지 않은 성'이라는 제목부터가 우리가 잘 쓰지 않는 어순으로 쓰여있다. 아마 '성은 하나가 아니다' 정도가 보다 자연스러운 번역이 되리라. 본문에서도 이런 예가 흔하다. 그러나 대단히 문학적인 그녀의 문체를 고려할 때 섣불리 어순을 바꾸는 게 더 문제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나마 그녀의 책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하나이지 않은 성

뤼스 이리가라이 지음, 이은민 옮김, 동문선(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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