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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한나라당 여의도 연구소장
김기춘 한나라당 여의도 연구소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김기춘(경남 거제·3선) 한나라당 의원이 스스로를 '개혁하는 보수'라 칭했다. 썩 내켜 하지는 않았다. 김 의원은 자신의 정치노선을 "안주하지 않고 늘 개혁하는 보수"라 하면서도 "개혁이라는 용어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개혁이라고 하면 다들 좋아하니까"라고 자신에 대한 선입견을 의식했다.

김 의원이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이하 여연)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지난주 박근혜 대표가 그를 소장으로 추천하자 당 안팎에선 말들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강경·보수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김 의원의 이력이 매우 '화려'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유신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거치면서 서울지검 공안부장,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등 그야말로 검사 출신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YS의 공천을 받아 정계 입문했다. 또 지난 16대 국회에선 법사위원장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가결을 주도했다.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국회 법사위원장 '3관왕'은 그가 유일하다.

하지만 이제 김 의원은 그런 자신의 '백그라운드'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는 "직업이 인상을 규정하는데 영향을 주지만 나도 이제 검사가 아니라 3선의 국회의원"이라며 "권위적이고 꽉 막혔다면 당선되었겠나, 그 점을 평가받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꽉 막힌 꼴통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알고 보면 대화가 통하는 부드러운 사람"임을 강조했다.

"나도 개혁적 보수...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

우선 '과거'를 짚고 넘어가자. 김 의원은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대해 "내가 주도했다고 하지만 운명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16대 법사위원장을 맡아 당연직으로 소추위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는 "탄핵안 발의는 했지만 과연 2/3의 찬성을 얻어낼지 의문이었다"며 "부결이 되더라도 대통령의 헌법 수호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가 있지 않겠나"고 추진 배경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소추위원으로서 당연한 절차를 따른 것이고 지금도 후회는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비화' 한 가지를 소개했다.

3월 12일 낮 12시가 좀 안돼서 가결이 되었다. 내가 탄핵소추 의결서를 가지고 헌법재판소에 접수시키면 그 즉시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다. 기자들이 모두 내 방으로 몰려와 언제 갈 거냐고 성화였지만 대통령의 일정을 배려했다. 오후 3시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연설하기로 되어 있더라. 그래서 오후 4시가 지나서 접수시켰다. 따라서 대통령이 그날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청와대에 돌아온 뒤 직무정지 조치를 받았던 것이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탄핵' 다음으로 떠오르는 김 의원의 이미지는 '유신'이다. 그는 검사 8년차에 법무부 법무과 소속으로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 등을 담은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한 핵심 멤버로 알려져 있다. 평검사가 어떻게? 그는 "상관의 지시에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는데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상사들이 나를 똑똑하다고 봤는지 여러 가지 심부름을 시켰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유신 시절 법무부 인권옹호과(73년)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과(74년)에 근무하면서 '인권'과 '공안'이라는 대조적인 이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인간적 갈등은 없었을까. 그는 "내가 어려운 사람들 재판과 소송을 대신해 주는 법률구조공단을 만들었고 초대 사무국장을 지냈다"며 "간첩은 두뇌로 잡는 것이지 몽둥이로 잡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의원은 "내가 수사한 사건으로 과거사, 의문사 조사 등에 연루된 적이 없다"며 깨끗한 대공수사 이력을 강조했다. 정형근 의원의 이름을 거론하자 그는 즉시 "그 분 이름을 내 앞에서 말하지 말라"고 펄쩍 뛰었다. 이어 "인권을 유린하고 고문했으면 오늘날 김기춘은 없다"며 "그 점은 다른 사람과 달리 평가되어야 한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관권선거'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는 1992년 대선 당시 부산초원복집 사건에 대해선 "반성한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법무부장관직을 마치고 '민간인' 신분으로 참여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내 생애 부끄러운,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며 "깨끗한 비단 옷을 입고 달밤에 길을 걸어가는 아낙네였는데 난데없이 구정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 쓴 기분"이라며 "언행을 신중히 하는데 교훈이 되는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박근혜 대표, 유신시절 사과할 일 한 것 없다"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그는 이회창 전 총재의 특보단장 등을 역임하며 최측근으로 분류되었다. 박근혜 체제에 들어서도 '싱크탱크 수장'이라는 중책을 맡았고 '코드인사'라는 말도 들린다. 이처럼 '지도자'가 바뀌어도 요직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김 의원은 "사심을 버려야 한다, 권력이 주어지면 70% 정도만 행사하면 성공할 수 있다"며 석복(惜福), 즉 복을 아껴야 한다는 경구를 인용했다.

"'코드인사'라고 하는데 내겐 모욕적이다. 능력과 자격이 없는데 코드가 맞아서 임명되었다는 것인가. 공직에 40년 넘게 있으면서 늘 권력을 적게 쓰려고 노력했다. 밥도 좀 적다 싶게 먹는다. 날씬한 편 아닌가. 뭐든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박 대표의) 측근이 아니다(웃음)."

박정희 정권 시절, '영애 박근혜'를 근자에서 지켜본 김 의원. 그는 박 대표가 유신 시절 단지 퍼스트레이디 대행이 아닌 조력자 역할을 했다며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는 세력을 향해 "학교 갓 졸업한 어린 딸인데 무슨 정치적 역할을 했겠냐, 박 대표에게는 죄송하지만 과대평가다"라고 '정치적 공세'라는 입장에 섰다.

이어 그는 "박정희 시대의 정치적 과오에 대해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았다"며 "아버지의 정치적 부채나 짐을 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단정했다.

박근혜 대표를 대통령감이라고 보냐는 질문에 대해선 조심스러워했다. 그는 "아버지의 강인함과 어머니의 유연함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며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도 "늘 공부하고 노력하는 면이 보인다"며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거론되고 있는 다른 '주자'들을 의식 "불필요한 오해는 사고 싶지 않다"며 "다른 분들 못지 않게 잘 해낼 것"이라는 수준에서 말을 아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결국 대선전략기구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여의도연구소의 위상 변화에 대해서는 "선거운동은 별도의 캠프를 꾸려 하는 것이지 여연의 이름을 걸고 대선에 동원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또 임무가 부여될지는 모르지만"이라고 말해 여지는 남겼다.

"여연의 정책 기조는 자유경쟁의 확대다. 경쟁에서 낙오된 소외된 자들에 대해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힘을 쏟을 것이다. 선진한국을 내세운 박세일 전 소장과 구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보수의 원칙에 맞게 운영할 것이다."

김 의원과의 인터뷰는 12일 오후 의원실에서 1시간 30분 가량 진행되었다.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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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의원은 올해로 66세.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면 고희에 접어드는 나이가 된다. 하지만 그에겐 '물리적 나이'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김 의원은 다음 총선 출마 계획에 대해 "아직 시간이 남았다, 미리 말하지 않겠다"면서도 "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건강하니까, 거제 시민이 원한다면"이라는 전제로 출마의사를 드러냈다.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 "일부러 피한 적은 없었다"며 "진지하게 요청해 온다면 언제고 환영"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 인터뷰에는 오마이뉴스 TV팀도 동행했다. 미리 예고하지 않아선지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동영상 카메라에 잠시 긴장하는 듯했지만 흔쾌히 촬영을 허락했다.

인터뷰 중간중간 그는 다리를 떨었다. 버릇이냐고 물으니 "버릇은 아닌데 긴장해서 그런 것 같다"고 겸연쩍어 했다. 김 의원은 고등고시 12회 출신으로 지난 16대 국회만 해도 이회창 전 총재(8회)와 이한동 자민련 전 총재(10회) 등 '선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가 최고참 법조인이다.

그러면서 선배 의원, 선배 법조인으로서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하겠다며 '열린 자세'를 취했다. 그는 작년 한나라당이 국가보안법 개정안 당론을 정하는 과정에서 '김용갑에서 고진화까지'라는 한나라당의 노선 스펙트럼에서 조정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고무찬양죄'는 손댈 수 없다는 박 대표의 '고집'을 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앞으로 그의 역할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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