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가인권위의 권고와 견해 표명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인권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그것은 항용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곤 한다.

1970년대 카터 미 대통령의 '인권외교'에 대해 박정희는 "인권 좋아하시네"라는 말로 일축한 바 있다. 가난은 그가 경제 성장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울 수 있었던 근거였다. 그리고 경제성장 제일주의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권위주의 정권이 반민주적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을 억압하는 명분이 되었다. 자유와 민주는 간단히 억압되었고, 이는 기본적 인권의 탄압을 의미했다.

이처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유로 무시되고 억압되었던 인권은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 이르러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인권은 언제나 경제에 밀려 뒷전에 있어야 했고, 국가는 인권 신장의 보호자가 되는 대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항상 인권침해의 가해 당사자였다.

▲ 인권위에서 열린 신원조사제도 개선 토론회
ⓒ 사진 김윤섭

국가기관과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어

그동안 인권침해에 맞선 인권운동단체와 시민사회의 피나는 투쟁과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그 열매의 하나가 바로 국가인권위다. 국가인권위는 따라서 인권침해자이던 국가가 인권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안고 태어난 것이다.

칸트의 명제를 원용한다면, 사회 구성원을 수단으로 삼던 국가가 사회 구성원을 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은 사회 구성원을 여전히 관리나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수단으로 삼는 여타 국가기관과 국가인권위가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예고한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의 권고와 의견 표명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 드러난 정책 결정자들의 인권의식은 국가인권위가 제 구실을 해내기가 녹록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가령 비정규직법과 관련한 국가인권위의 의견 표명에 대해 "뭘 모르면 용감하다"고 응수한 노동부 장관이나 "황당무계하고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말한 여당 국회의원의 인권의식이 비근한 예다.

"기간제 근로자 사용에 사유를 제한하고,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을 명시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에 대한 이른바 '진보적 학자 출신', '노동운동가 출신'이라는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 사회의 인권의식 수준이 어디에 있는가와 함께 성장 일변도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얼마나 결여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국가인권위의 구실과 활동 근거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권한은 없으나 책임은 막중

흔히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 이유와 파장을 인권 문제와 관련짓는 데 익숙지 않다.

과거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도록 왜곡된 인권의식은 흔히 정치 경제 교육 사회 각 분야에 걸쳐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이기적인 의도를 은폐하는 기제로 이용하기도 했다.

사익추구집단은 사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집요하고 적극적이다. 자신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인권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소극적인 태도와 달리 기득권자들은 보편적 인권 요구가 경제를 위태롭게 한다거나, 사회 불안을 불러올 수 있다는 등 반대 전선에서 아주 적극적이다. 국가인권위에 원칙 추구에 따른 적극적 자세가 요구되는 이유다.

나아가 기득권자들이 주장하는 사회불안의 실체와 '시기와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한결같은 변명 뒤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밝혀진 진실에 대한 판단과 선택은 시민의 몫이고, 그에 따른 시민의 인권의식 고양이 권고 이상의 강제력을 가지지 못한 국가인권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의 지향점은 제도 개선에 있기보다 시민의 인권의식 고양에 있다. 시민의 인권의식 수준이 정치의식 수준에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늘 사회 구성원이 갖고 있는 정치의식조차 다난했던 정치사를 통해 훈련된 결과라고 한다면, 인권의식 역시 국가인권위의 권고와 의견 표명이 불러일으키는 논란을 통해 훈련되고 고양될 수 있다.

부문별 인권 문제의 인식과 해석을 둘러싼 토론과 논의를 거치는 과정은 이 사회가 상식을 찾아가며 성숙하는 과정이고, 원칙과 공익적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사회에 결여된 인간 중심의 가치가 제자리를 찾게 하는 것이 국가인권위의 본디 소명이라 할 때, 그리고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그 첫 단추를 정확하게 꿰는 일이 중요하다고 할 때, 무엇보다 원칙의 엄격한 적용이 관건이다.

국가인권위의 역할이 권고와 제시에 그쳐야 하는 한계를 안고 있지만, 그 사회적 파장은 크다. 설령 국가인권위의 권고나 견해 표명이 수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인권위가 더욱 열정을 갖고 활동해야 하는 이유가 될 뿐, 그것이 조정이나 절충을 위한 근거가 되어 원칙을 훼손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훼손되거나 변질된 가치를 원상 복구하는 일이, 알고 있는 가치를 지키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가인권위에 권한은 없으나 책임은 막중하다. 국가인권위의 권위는 권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책무에 충실할 때 시민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인권위의 권고가 그 한계 때문에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적절하지 않다.

국가인권위가 권력을 갖지 않은 권위의 명예를 누릴 수 있는가는 원칙에 따른 실천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달려 있고, 이는 시민사회가 준 국가인권위의 힘이기도 하다. 국가인권위는 스스로 그리고 사회에 대해 늠름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5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