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가 단순히 소통의 도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인간 존재의 근본조건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언어 없이는 존재도 없으며,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범위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언어를 확장하고 다듬는 것은 곧 존재를 가꾸는 작업이기도 하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말로 입히는 상처는 영혼을 파괴할 만큼 치명적인 것이다. 이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한국 속담이나, 입으로 짓는 죄, 즉 '구업'을 무거운 업보로 다스리는 동양적 세계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언어는 존재의 상처를 치료하는 수단이기도 해서, 정신분석학에서는 상담을 통한 '언어치료'를 중요한 의학적 수단으로 간주한다.

▲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 그는 이 글에서 대통령의 "좋은 대학 나오시고 출세한..." 발언이 남상국사장을 강물로 뛰어들게 한 "확인사살"이었다고 쓰고 있다.
ⓒ 한나라당
최근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이 '앞으로는 대통령 선거에서 대학 나온 사람을 찍겠다'고 발언한 것이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필자는 그 말을 듣고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가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찍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회창 후보가 대학을 안 다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전여옥 대변인의 발언이 내게 '나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긴 했지만, 이미 그의 언어는 오랫동안 내 존재에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필자가 기억하는 전여옥은 언제나 '공적 언어관리사'였다. 방송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이기도 하며, 대중일간지 칼럼니스트로 글을 쓰다가 정당의 대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를 가꾸고 다듬어야 할 그 '언어관리사'는 도리어 직업에 걸맞지 않게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언어를 구사해 왔다. 전여옥 대변인의 발언은 언어가 얼마나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여옥 대변인이 사회에 입히는 '존재의 상처'

필자에게는 콤플렉스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전 대변인이 주장하는 '학력 콤플렉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필자가 전여옥 대변인의 사진(그녀의 언어에 따르면 '비디오')을 볼 때마다 혈압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말을 더듬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가 이런 심리적 강박증세를 보이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비록 미약하지만 지금과 유사한 정신적 충격을 처음 경험한 시기는 오래 전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를 읽은 후였다. 필자는 그 책을 읽는 내내 '일본은 클래식음악 전문채널 하나 없는 미개한 나라'라는 식의 편견에 입각한, 하지만 확신에 찬 주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시아 국가를 논하면서 서양고전음악을 '문명국'의 기준으로 보는 시각도 그렇거니와, 일본 내 클래식 음악에 대한 그녀의 주장도 전혀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여옥씨의 주장과 달리, 일본은 한국 못지않게 풍요로운 클래식 음악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사실이 일본을 '문명국'으로 만들어주지 않는 것은 그 반대가 일본을 '야만국'으로 만들지 않는 것과 같다.

▲ <조선일보> 칼럼니스트였던 전여옥은 100분토론 진행을 맡고 있던 유시민에게 "생긴대로 살라," "화류계남녀," "식욕을 잃게 한다"는 원색적인 언어로 비난했다.
ⓒ <조선일보>
그 후로 몇 년간 잠재되어 있던 나의 콤플렉스가 뚜렷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전씨가 <조선일보> 칼럼니스트로서 쓴 "시시한 시사프로진행자는 'NO'"라는 에세이를 읽은 후였다. 이 기사를 읽는 동안 필자의 손에는 땀이 괴었고, 머리에서는 현기증이 일었다.

"시청자로서 유시민에게 부탁할 게 있다. 우선 생긴대로 살라는 것이다. 무조건 '그럴 수도 있다'고 맞장구치는 것은 화류계 남녀뿐이다. 자유로운 인간의 '노(NO)'가 필요하다. 결론을 향한 논쟁을 치열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틀렸음'을 지적해야 한다. 왜 유시민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세 번째는 좀 매력적인 남자가 되었으면 한다. TV는 이미지다. 강한 사투리 억양은 거슬리고 눈을 치뜨는 버릇은 품위가 없다. 어색한 권위 냄새가 나는 손짓은 시청자들의 식욕을 잃게 한다." – 전여옥, "시시한 시사프로 진행자는 'NO'," <조선일보> 2000. 7. 10.

위의 기사에서 나를 괴롭힌 것은 유시민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언론인으로서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였다. 당시 언론학을 공부하고 있던 학생의 눈에는 일간지 칼럼이 '생긴대로 살라'거나 '식욕을 잃게 한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로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녀는 같은 신문의 고정칼럼에서 국회의원이 된 유시민의 자질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그리고 캐주얼의 패션 감각에 한마디 하겠다. 원래 양복보다 캐주얼이 소화하기가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외모를 굳이 거론하는 것은 아니지만, 캐주얼은 얼굴도 몸매도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한다." – 전여옥, "옷차림 마음에 드냐고, 관심없다: 유시민 패션 퍼포먼스에 쓴웃음" <조선일보> 2003. 4. 30.

시민사회를 파괴하는 전여옥 대변인의 언어

전여옥은 언론인 출신답게 적극적으로 말과 글로써 남과 소통하려는 열의를 가지고 있다. 그가 곧잘 특정 대상에게 토론을 제안하는 것도 이러한 욕구에서 나오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여기서 전 대변인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상대가 그의 '토론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것을 '승리'로 여기고 환호할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히 전여옥은 한 가지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극단적 무례와 비논리로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는 능력이다. 이런 그녀 앞에서 '합리적 토론'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는 민주적 토론의 조건인 이성과 합리성에 의거해서 토론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철저히 파괴하여 상대방을 당혹케 함으로써 '승리'를 얻는다.

'토론'과 '말싸움'을 구분하지 않는 전여옥 대변인의 거친 언어는 국민들의 존재에 상처를 입히고 있을 뿐 아니라, 시민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인 민주적 언어소통에도 해를 끼치고 있다. 이는 전여옥 대변인의 언어감각이 떨어져서도 아니고, 그가 언어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도 아니다.

전여옥은 공인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인식하고 있다. 불과 며칠에 대통령의 '좋은 대학 나오고 출세한 사람…' 발언이 한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간 "확인사살"이었으며, 이 "너무도 충격적"인 발언을 들으며 "하늘이 노래졌다"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나아가 대통령이 "고 남상국 사장을 한강물로 뛰어들게" 했으며,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매도"에 "소름이 끼쳤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가장 놀라운 발언은 '남상국 사장을 4700만 국민 앞에서 말 그대로 '매도'한 것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죠―'좋은 대학 나오고 출세한 사람이 왜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아찔했습니다.…저는 너무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대통령이 그것도 방송에서 '남상국 사장'이란 이름을 몇 차례씩이나 거명하면서 저렇게 확인 사살하듯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이 노래지는 듯 했습니다." – 전여옥 "故남상국 사장을 한강물로 뛰어들게 한 대통령," 한나라당 홈페이지, 2005. 5. 23.

이처럼 언어에 민감한 사람이 '생긴대로 살라'거나 '얼굴도 몸매도 못 받쳐준다' 혹은 '대졸자가 대통령 되어야' 식의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전여옥의 언어가 가진 심각성은 단지 '형식'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의 언어는 민주적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전여옥 칼럼니스트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이 칼럼에서 '박근혜 불가론'을 주장했던 그녀는 한 달이 채 못 되어 공천권을 약속받고 박근혜를 대표로 둔 한나라당의 대변인이 되었다.
ⓒ 조선일보
전여옥 대변인은 늘 확신에 찬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의 언어는 아주 기본적인 신뢰성마저 결여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자신이 한 정치인을 '영남권 공주'라고 부르며 정당대표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비판한 후 그 정치인의 대변인으로 들어가는 데 며칠이나 걸렸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근혜 카드는 판에 놓아서는 안 될 카드이다.…그는 여전히 영남권의 공주로서, 특정지역의 편애 속에서 안주했다. 국회의원으로서 몸을 던져야 할 때 몸을 사렸다.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스스로 미니 정당을 창당해 나갔다가 다시 한나라당에 쪼르르 돌아온 모습이었다." - 전여옥, "전여옥칼럼: '포스트최병열이 박근혜라니!" <조선일보> 2004. 2. 24.

전여옥, 그녀는 대변인이 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가 폭력적인 언어를 고치지 않는 한 필자를 괴롭히는 콤플렉스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이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나는 전 대변인의 언어에 깃들어 있는 그녀의 영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