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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붓꽃
노랑붓꽃 ⓒ 이정남 화백
'초희, 내가 왔어. 이 못난 철민이가 왔다구. 미안해 이렇게 오려고만 마음먹으면 한달음에도 올 수 있는 것을 그동안 초희 혼자 외로움에 떨게 해서 정말 미안해. 늘 오고 싶었는데 마음은 항상 여기에 있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올 수가 없었어.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어쨌든 그동안 무심했던 나를 용서해. 아니 용서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미우면 밉다고 하고 화가 나면 때려도 좋아. 너에게서 도망쳐 보란 듯이 살아보려고 했는데. 역시 나는 너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더라구.

초희, 네가 옳았어 내가 어리석었다구. 너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끝까지 너를 붙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내가 바보 같았어, 바보 같았다구….'

"크게 인사나 하라니까 인사는 안 하고 왜 넋 나간 사람처럼 그러고만 있어. 왜 초희씨 볼 낯이 없어서 그래.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도 마찬가지지. 나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으니까. 야,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이제와 무얼 어떻게 하겠냐. 이제 그만 잊자. 툭툭 털어버리자구.

너도 그 정도면 됐어. 10년 하고도 한참을 수절했으면 됐지. 뭘 더 어떻게 해. 네 할 도리는 이미, 벌써 다한 거라구. 더 이상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니까. 야, 그만하고 이리 와서 술이나 마시자."

뒤를 바라보니 노진이 어디서 구했는지 소주 두 병과 마른 오징어 하나를 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어디서 났냐고 묻자 아까 오다가 휴게실에 들렀을 때 화장실 다녀오면서 산 거란다. 나도 노진 곁으로 가서 앉았다. 노진이 종이컵에 술을 따랐다. 반 컵이나 되는 것을 나는 단숨에 마셔버렸다.

"아, 쓰다 써."

"술이 쓰다구? 나는 달기만 하구만."

노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오징어포를 내 입에 물려주었다.

"내가 첫사랑의 맛을 보여줄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웬 뚱딴지같은 얘기냐는 표정이었다.

"이것 하나 입에 물고 어금니로 한 번만 살짝 물어봐라."

그러면서 나는 라일락 잎사귀 하나를 노진에게 건넸다. 그리고 나도 잎사귀 하나를 입에 넣고 살짝 깨물었다.

"아이구, 써라 써! 웬 잎사귀가 이렇게 쓰냐. 소주보다 훨씬 쓰다 야"

"그게 바로 첫사랑의 맛이라는 거다 알겠냐?"

녀석은 얼마나 쓴지 혀를 한참 내두르다가 그래도 안 되겠는지 소주를 한 잔 털어 넣었다.

"그래 내가 뭐랬어 한 번만 살짝 물어보라고 했잖아. 그렇게 꽉 깨무니 쓸 수밖에"

다행히 나는 살짝 물은 덕에 녹차 잎보다 약간 진한 라일락 잎사귀의 맛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쓴 듯 하면서도 야릇하고 미묘한 맛이 오랫동안 입안에서 감돌았다. '아, 이것이 첫사랑의 맛이로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 아까 차 안에서 뭐라고 했냐. 초희 얘기를 네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말했다고 했냐?"

노진이 갑자기 다른 얘기를 질문했다.

"응, 얘기했지. 녀석들이 좀 졸라대야 말이지. 그래서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나를 열어 보였지."

"어디까지 얘기했는데, 내 얘기도 했냐?"

"당근이지"

"뭐라고 했는데?"

"뭐라고 하긴 있는 대로, 사실 대로 다 얘기했지."

"좀 좋게 얘길 해주지. 그럼 한철이 그 녀석 얘기도 했냐?"

"음 필요한 부분만 적절히…."

"아이들 반응은 어땠는데? 모두들 소설감, 아니 영화감이라지."

노진은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지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자꾸만 물어보았다.

"아이들 반응? 지금 보면서도 모르냐?"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보면서도 모르다니? "

"애들이 너무 많이 울어서 이렇게 비가 되어 흐르잖니!"

"뭐야, 하하하"

"장장 세 시간 수업이나 할애해서 얘길 했어. 녀석들이 얼마나 깊은 관심을 보이던지. 세상에 녹음기까지 준비를 다 했더라니까. 덕분에 잘 되었지 뭐. 차마 내가 내 이야기라서 쓰지를 못했는데 어쨌든 음성으로라도 그렇게 기록을 남겼으니…."

"야, 너 예수님이나 공자님이 된 기분이었겠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왜 예수나 공자는 책 한 권 안 썼어도 제자들을 잘 둔덕에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 받잖냐. 야, 너도 네 제자들 덕분에 훌륭한 스승으로 기록될지 누가 알아."

"말이 그렇게 되냐! 하하하"

한참 동안 우리는 천수만을 바라보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들이 없음을…. 철새가 없었다. 정말 그러고 보니 철새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여름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린 것일까? 내가 이런 의문에 빠져 있는데 노진이 다시 초희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지금까지도 판단이 안돼"

밑도 끝도 없이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물었다.

"뭐가?"

"초희씨 말이야. 자살이었을까? 실족사로 인해 숨진 것일까? 정황을 보면 분명 실족사였는데 그게 말이야 난간에서 떨어진 게 실수였을까? 아니면 고의였을까?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그런데도 도무지 모르겠단 말야. 영원한 수수께끼처럼. 너는 어떻게 생각해? 단순한 실족이었을까? 아니면 고의성이 있었던 것일까?"

노진도 나와 같이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타부타 얘기를 해줄 수가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네가 모르는데 누가 알겠냐? 초희가 말해주지 않는 한…."

나는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종이컵에 술을 따라 단숨에 넘겨 버렸다. 그러자 목에서 불이 일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노진의 핸드폰 소리다.

"여보세요"

노진의 아내에게서 오는 전화였다. 언뜻 옆에서 들으니 어디인데 연락도 없이 지금까지 안 들어오느냐고 성화가 대단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의 집에 전화를 해준다는 것을 경황이 없어 그만 깜박 잊고 있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둘째가 많이 아프니 빨리 들어와요. 그리고 친정 아버님도 와 계시다고요. 택시라도 잡아타고 빨리 와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까지 들렸다. 녀석은 아무래도 가봐야겠다고 일어섰다. 아니 나더러 같이 올라가자고 했다. 나는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하루만 묵고 가자고 사정했다. 그럼에도 녀석은 먼저 올라가겠단다.

안 들어가면 경을 칠거라나. 그러면서 나한테 결혼 안 하고 혼자 살길 잘했다고 했다.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는 식상한 격언까지 들먹여 가면서. 또 녀석은 아무래도 택시잡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내 차를 좀 빌리잔다.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하지만 술을 먹고 운전을 할 수 있겠느냐며 내가 걱정을 하자,

"겨우 소주 다섯 잔 마셨는데 뭘. 내 주량이 얼마인 줄 아냐? 양주 한 병이다, 한 병."

그러면서 큰소리 뻥뻥치는 것이었다. 아무리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녀석이 술이 좀 들어가니까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 그럼 조심조심해서 중간에 쉬기도 하면서 천천히 올라가라. 내가 내일 대천까지 가서 메뚜기녀석한테 네 인사까지 마저 하고 오마. 노진아, 오늘 정말 고마웠고 또 정말 미안하다."

노진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출발하기 일보 직전,

"잠깐만!"

하고 내가 차를 세웠다. 또 깜빡 잊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승용차 짐칸을 열고 아침에 실어 놓은 상자와 그리고 학교에서 넣어 둔 기타를 꺼냈다. 노진은 부르릉 소리를 내며 힘차게 출발했다. 떠나 보내놓고 나니 괜히 걱정이 되었다. 비 오는 밤길에, 남의 차에, 술까지 먹었으니. 무사히 도착하야 할 텐데…. 보통 염려되는 것이 아니었다.

노진이 가고 나니 컴컴한 바닷가에 나 혼자 덩그렇게 남겨졌다. 정말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칠흑 같은 밤, 또는 암흑세계라는 단어가 꼭 들어맞는 밤이었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았다. 눈앞에 초희가 있었으므로.

나는 노진이 먹다 남긴 소주병으로 나발을 불었다. 그리고 오징어 다리 한쪽을 물고 초희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가만히 왼쪽을 살펴보니 작은 나룻배 하나가 혼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잘 되었다 싶었다.

나는 다시 뭍으로 올라와 상자와 기타와 그리고 내 몸을 가져다가 그 배 안에 실었다. 배는 노를 젓지 않아도 저절로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집어 던지고 대신 기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노래를 하였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 버린 긴 머리 소녀야 눈 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개울 건너 작은 집에 긴 머리 소녀야 눈 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

그랬더니 그녀가 나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언젠가처럼---

검은빛 바다 위를 밤배 저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흘러가네 밤하늘 잔별들이 아롱져 비칠 때면 작은 노를 저어 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 텐가 으음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물결이 점점 세게 뱃전에 와서 부딪혔다. 나는 그녀가 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그녀가 그렇게 한동안 노래를 하고 있었다. 빗소리, 물결치는 소리, 그리고 기타소리가 하모니를 이루어 천수만 밤바다를 음악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는 물건을 하나씩 꺼내어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사진, 편지, 일기, 손수건, 녹음 테이프…. 맨 마지막으로 물건들을 감싸고 있던 상자마저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비가 점점 많이 오는지 아니면 배에 물이 새어 들어오는지 시나브로 배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어느 새 물은 내 배꼽 위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차갑지 않았다. 나의 영원한,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사랑! 초희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모나리자의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내게 다가와서는 부드럽고 따뜻한 두 손으로 내 목을 감았다. 아주 힘껏….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김인기, 이정남 화백 및 그동안 뜨거운 관심을 보여준 독자여러분께 고개 숙여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올립니다.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행복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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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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