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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오릉 재실에 붙어있는 명릉 출입구, 회색 문이 자물통으로 단단히 채워져 있다.
ⓒ 한성희
서오릉 입구에 들어서면 주차장 앞에 재실이 있고 오른쪽으로 무정하게 생긴 회색 문이 보인다. 마치 금기지역을 위압적으로 막아놓은 철문처럼 회색빛 문을 자물통으로 굳게 채우고 있어 기와지붕이 날아갈 듯 아름다운 곡선의 한옥 재실과 영 어울리지 않게 버티고 있다.

'이거 무슨 교도소 문같이 삭막하네.'

이 회색 문이 숙종의 명릉(明陵)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명릉은 재실에서 가장 가까운 능이기도 하다. 명릉은 도로 옆에서도 뻔히 들여다보이는 왕릉이다. 올 5월부터 공개하기로 했지만 서오릉 중에서 지금까지 요지부동으로 비공개인 유일한 능이다.

재실 왼쪽으로 잘 포장된 도로가 재실을 지나쳐 명릉 뒤로 뻗어있고 오후 6시 이후엔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도로 입구에 세워져 있다. 저 도로 뒤에 뭐가 있기에 저런 경고문까지 붙어있는 것일까.

이 2차선 도로가 명릉과 재실을 서오릉의 다른 유적지와 둘로 갈라 분리한 주범이다. 그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명릉 뒤가 나오고 거기에는 왕릉과 상관없는 현대식 빨간 벽돌 건물이 버티고 있다.

▲ 명릉 인원왕후 능상 뒤로 보이는 빨간 벽돌 건물이 기무사훈련학교다.
ⓒ 한성희
명릉이 도로와 붙어있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비공개로 막아놓은 이유가 그 건물 때문이다. 그 건물은 바로 '기무사 훈련학교'다.

73년 이곳에 들어온 훈련학교는 서오릉 능역의 4천여 평을 차지하고 있고 공식적으로는 서오릉에서 임대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모든 군부대가 그렇듯이 임대료 따윈 내지 않는다. 유비가 형주를 빌리고 임대료는커녕 돌려주지 않는 심보와 닮았다.

미군부대 공여지도 필요하면 사유지라도 몇 십 년이고 공짜로 쓰고 필요 없어야 오염된 채로 돌려주는 판인데 하물며 군이 필요한 국유지야 말할 나위도 없다. 더욱이 문화유적지는 문화재청에서 누가 목소리 낼 사람도 없고 국가안보논리가 앞서니 훼손되든 말든 필요하다면 군에서 징발하는 것이 지난 날 우리의 현실이었다.

서오릉의 북쪽에서 서쪽에 걸쳐 권율부대가 능역을 잠식했고 권율부대로 인해 창릉과 홍릉이(그 이전에는 경릉까지 비공개였다) 비공개 능이었다가 작년부터 개방했다. 동쪽 끝의 명릉은 기무사 훈련학교가 있어 서오릉 양쪽을 군부대가 버티고 있는 셈이니 터가 세도 보통 센 터가 아니다 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군부대란 풍수에서 말하는 병영 터다.

▲ 숙종 능상에서 내려다 보면 큰 도로 두 개가 명릉 앞을 가로지르고 있다.
ⓒ 한성희
교도소문을 연상케 하는 자물통으로 굳게 잠긴 회색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속으로 심사가 뒤틀렸다. 문제의 훈련학교는 명릉 오른쪽에 있는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상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큰 도로에서도 훤히 올려다 보이는 곳이다.

이제라도 공개를 한다니 다행스런 일이지만 능역 가운데 들어앉은 기무사 훈련학교는 어서 이전하고 서오릉을 원상복원해서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문화재 관람할 권리를 되찾아 주어야 한다.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이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왕릉 복판에 군부대가 들어서 있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동원이강릉이야? 쌍릉이야?

명릉에 들어서자 정자각 뒤로 쌍릉이 보인다. 19대 임금 숙종(1661-1720)과 제1계비 인현왕후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 한성희
숙종은 1674년 8월 18일 현종이 34세로 승하하자 8월 23일 14세의 소년왕으로 즉위한다. 보통 왕이 즉위하는 것은 선왕이 승하하고 대렴을 마친 5일 후다. 8월 15일에 탄생한 숙종의 나이가 우리나이로 치면 만 13세에 막 들어선 때였다. 전례로 보아 성년인 20세까지 대비가 수렴청정을 해야 마땅하지만 숙종은 곧바로 친정에 들어섰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성격이 거칠었으며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명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우명이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궐을 드나들며 궁녀와 사통해 임신한 사건인 일명 '홍수의 변'을 고변하자, 남인들은 김우명이 무고한 왕자를 죽이려 한다고 김우명을 벌주자 한다. 그러자 정청에 달려 나와 마루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며 울부짖어 대신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든 왕비다.

더 해괴한 일은 아버지 김우명이 홍수의 변을 고변했는데도 명성왕후가 두 왕자를 죽이지 않고 귀양만 보내게 하고 궁녀만 사형을 내리게 한 일이다. 궁궐의 여자는 왕의 여자니 종친이라도 건드리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데도 두 왕자는 귀양에 그치고 김우명을 벌주지도 못하게 한 무지막지한 왕비다. 이런 왕비와 같이 살던 현종은 마누라 위세에 눌렸는지 후궁 하나 두지 못했다.

이렇게 대가 센 어머니를 두고도 친정을 고수한 숙종의 능력은 노련한 통치로 나타난다. 숙종은 현종 시절부터 예송 논쟁으로 불거진 서인과 남인의 당파싸움의 연장선을 안고 있었고 오히려 그들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시킨 왕이다.

조선은 태조 이성계에서 시작해 순종황제에 이르기까지 27대 왕이 약 500년(1392-1910) 동안 내려온 왕조다. 그 27명의 왕 중에 숙종과 두 아들 경종(1688-1724), 영조(1694-1776)의 통치기간이 무려 102년이나 된다. 조선왕조의 약 1/5을 숙종 부자가 통치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숙종은 재위기간도 46년에 이른다. 인현왕후 민씨와 나란히 잠든 숙종의 능으로 올라서면 장희빈이 저절로 떠올라 복잡한 숙종의 가정사를 생각하게 한다. 권력 자체인 왕의 가정이란 어떤 것이든지 정치와 권력으로 연결되니 아내와 아이들과 오순도순 누리는 평범한 행복은 애당초 없는 셈이다.

▲ 크기를 가늠하려고 기자의 부탁으로 인원왕후 능의 문인석 앞에 선 서오릉 관리소 이남희양. 숙종과 인현왕후가 있는 쌍릉의 석물과 크기가 같다.
ⓒ 한성희
숙종의 쌍릉은 능상도 작고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 등 모든 석물이 아주 작다. 장명등도 옥개석이 팔각에서 사각으로 바뀌는 것도 명릉에서 볼 수 있다.

숙종은 단종(1441-1457)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를 240년 만인 1698년 복위했다. 단종의 장릉과 정순왕후의 사릉을 간소하게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도 간소하게 할 것과 부장품도 줄이라고 명한다.

▲ 이게 쌍릉이야? 동원이강릉이야? 왼쪽이 인원왕후가 잠든 곳이고 오른쪽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 한성희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쌍초상

숙종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1687-1757) 김씨의 능이 오른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인원왕후의 능을 보다가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조선왕릉의 오른쪽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요지부동 왕의 자리인데 어째서 제2계비가 차지하고 있을까?

왕과 왕비의 쌍릉에 왕비 하나의 능을 더 만들어 동원이강릉이라고 하는 형식의 왕릉은 조선왕릉 장법에 없다. 동원이강릉은 두 언덕에 왕과 왕비가 한 사람씩 차지하고 정자각 하나를 쓰는 형식이다. 그래도 명릉을 굳이 동원이강릉이라고 한다면 정자각을 두 언덕 중간으로 옮겨야 옳다. 그런데 명릉의 정자각은 숙종과 인현왕후를 위한 것이지 인원왕후를 위한 것은 아니다.

왕이 차지해야할 오른쪽 자리에 제2계비가 있고 쌍릉과 단릉을 뭉뚱그려 동원이강릉이라 하는 건 전혀 맞지 않는다. 두 왕비와 나란히 묻힌 헌종의 삼연릉(경릉)은 사실 안동 김씨 작품이고 의도적으로 조선왕릉의 장법을 능멸한 왕릉이긴 하지만 오른쪽만은 어김없이 왕의 자리를 고수했다.

"저도 이 점이 좀 이해가 안가거든요."

안내를 하던 관리사무소 이남희양의 말에서 퍼뜩 생각났다.

"아아, 맞다. 그때 쌍초상이 나는 바람에 이 능이 도매금으로 넘어가 이렇게 미완성인 채로 만들어졌지."

인원왕후는 제1계비 인현왕후가 죽자 그 이듬해 15세 왕비로 책봉된다. 당시 41세였던 숙종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왕비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죽어야 능도 호사스럽게 단장하는 법.

숙종6년에 20세로 죽은 원비 인경왕후(1661-1680) 익릉이 서오릉에서 가장 호화판으로 조성된 것에 비하면, 의붓아들인 영조가 치른 인원왕후의 장례는 정자각과 능호도 받지 못해 가장 형편없이 국장이기도 했다.

▲ 인원왕후 장명등도 숙종과 마찬가지로 사각 옥개석 석탑이다.
ⓒ 한성희
영조33년인 1757년 2월 15일 왕비 정성왕후가 창덕궁에서 66세로 죽는다. 정성왕후의 국장이 한창 진행되고, 3월19일 나무를 베고 흙을 파는 홍릉의 산릉공사가 시작됐다. 더구나 이 홍릉은 영조가 자신의 신후지지로 만들라 명했기에 정성왕후의 능이라기보다 이후 영조의 능으로 초점을 맞춰 공사 중이었다.

그런데 영조와 불과 7세밖에 차이나지 않던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3월26일 71세로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쌍초상이 난 것이다. 알다시피 국장 한번 치르는 데 보통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칼자루를 쥔 영조가 계모를 위해 자신의 능을 소홀히 만들겠는가.

▲ 영조가 인원왕후 국장을 홀대하면서 조성한 홍릉의 신후지지. 영조는 이곳에 잠들지 못해 지금도 빈 채로 남아있다.
ⓒ 한성희
이미 숙종은 인현왕후와 묻혀있으니 인원왕후가 왕릉 법도를 어겨가면서 자기도 옆에 묻어달라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을 터. 원래 인원왕후는 현재 자리에서 400보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미리 자신의 자리를 점지했었다. 1보가 당시에 6척이고 지금의 길이로 보면 약 1.8m에 해당한다. 현재 위치에서 대략 서쪽으로 720m 정도 더 떨어진 곳에 인원왕후가 묻혔어야 한다.

국장 둘을 한꺼번에 치르자니 영조로서는 산릉부역군 조달과 초상 치를 비용문제에 봉착하는 난감한 지경이 됐다. 서오릉 동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산릉공사가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 바람에 인원왕후의 국장은 도매금으로 넘어가 버렸다. 마누라보다 의붓어머니를 헐값에 치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선 새로 산릉공사를 하느니 명릉 옆을 파고 시작하는 게 더 비용이 덜 먹히고 백성동원을 많이 안 해도 될 듯하니 오른쪽 산줄기를 선택한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인원왕후의 능호를 새로 내리면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 참도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 역시 눈 딱 감고 생략해버렸다.

▲ 숙종의 명릉은 아기자기할 정도로 석물이 작다.
ⓒ 한성희
그래서 인원왕후의 능은 능호도 못 받고 곁방살이 신세의 미완성 능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대왕대비까지 지낸 왕실 어른 능치고는 어지간히 홀대를 받은 셈이다. 그 결과, 조선왕릉 중 제일 초라한 능이 인원왕후가 묻힌 명릉이다.

그러나 영조도 이것저것 생략해버리고 인원왕후를 얼렁뚱땅 묻으면서까지 만든 홍릉 신후지지에 묻히지 못한다. 죽을 때를 못 맞추고 하필이면 며느리와 같이 죽는 바람에 쌍초상이 나서 찬밥 신세가 된 왕비가 인원왕후다.

인원왕후를 보니 남편 앞서 죽는 것이 여자의 복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복잡한 숙종의 여자관계가 죽어서까지 복잡하고 골 아픈 왕릉으로 남아 있는 게 명릉이다. 마누라 여럿 두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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