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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뒤에 영조의 우허제가 빈 채로 남아있는 홍릉 능상이 보인다.
ⓒ 한성희
서오릉 깊은 곳에 비공개 능으로 숨어 있던 홍릉 가는 길은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홍살문에 도착해 우선 사진을 찍으면서도 정자각 위로 솟은 능상을 무심히 봐 넘겼다. 보통 홍살문에서 바라보면 왕릉의 능상은 정자각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 이곳은 위로 불쑥 솟아오를 정도로 높이 자리 잡은 것이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신성한 곳으로 들어서는 경계인 홍살문을 들어서 정자각 뒤편으로 가서 능상을 바라보자 '으악!'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높이도 높이지만 보통 가파른 것이 아니어서 그곳을 올라갈 생각을 하니 비명부터 나온 것이다.

겨울철 왕릉의 사초지는 보통 미끄러운 게 아니다. 능침에 오르내릴 때 잔디가 미끄러워 엉덩방아를 찧고 미끄러진 경험이 여러 번이라, 속으로 저길 올라가려면 난 죽었다는 한숨부터 나왔다. 그래도 안 올라갈 수 없지.

이곳은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1692-1757)의 홍릉이다. 이 홍릉의 특징은 영조가 생전에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 - 살아 있을 때 미리 잡아놓은 묏자리)로 잡아놓았던 터가 비워진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왕비가 먼저 죽어 능을 만들 때 왕이 자신의 자리를 만들라 하면 산릉공사를 하면서 왕비 자리 옆에 터를 조성한다.

살아서는 왼편을 높이는 좌상우하(左上右下)를 고수하고, 죽으면 오른편을 높이는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에 따라 정성왕후의 오른편을 비워놓았지만 영조는 이곳에 잠들지 못했다. 왕비의 오른 쪽에 왕이 자리 잡는 것을 우허제(右虛制)라 한다.

쌍릉이나 합장릉일 때 왕비가 먼저 죽고 왕 자신의 자리를 같이 만들라는 전교를 내려야만 왕비 곁에 묻히게 된다. 그런 전교가 없을 때 죽은 왕비 곁으로 왕이 따라가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영조가 미리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음에도 정조는 영조를 이곳에 묻지 않고 103년 전에 효종이 묻혔다가 천장한 동구릉 파묘자리에 파묻어 버려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를 한다. 풍수에서 파묘자리는 혈이 파괴되어 맥이 빠진 자리라 하여 흉지로 친다.

백성들도 묘지를 잡을 때 기피하는 대표적인 자리가 파묘, 무당 터, 감옥 터, 병영 터 등인데,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를 절대로 이곳에 묻어줄 수 없을 만큼 증오한 것이다. 홍릉의 영조 우허제는 2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빈 채로 남아 있다.

▲ 엉금엉금 네 발로 무릎 꿇고 기어오른 홍릉 능상.
ⓒ 한성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정성왕후의 사초지는 가파르고 높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왕비님께' 올라가는 격이 됐다. 조심조심 잔디가 드문 곳을 골라 딛고 오르기 시작했다. 1/3 정도 올랐을까. 더 이상 잔디가 보이지 않자 차라리 사초지 곁의 숲 쪽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무심코 밑을 내려다보니 고소공포증이 왈칵 밀려온다.

저 길 도로 내려가려면 미끄러질 것이고 내려갈 자신도 없었으니 올라갈 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직도 까마득히 먼 데 언제 올라가나. 그때까지 왼손에 쥐고 있던 카메라를 파커점퍼 호주머니에 넣고 잔디를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사초지를 막아놓은 뾰족한 목책에 처박혀 뼈도 못 추리겠다는 공포심에 아예 무릎까지 꿇고 엉금엉금 기었다. 움켜잡은 짧은 겨울 잔디는 너무 힘이 없어 무릎까지 꿇어 네 발로 기는 꼴이 됐다.

왕비 뵙는 신고식 한 번 단단히 치르는구나 싶었다. 잔디를 움켜잡고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오르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그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먼저 올라가서 엉금엉금 기는 내 모습을 걱정스럽게 보던 서오릉 관리사무소 이남희양이 내려와서 손을 잡아줬다. 겨우 능상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더욱이 이곳은 효릉이나 예릉처럼 테니스장이 들어갈 만큼 넓은 곳이 아니고 탁구대 하나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사진을 찍다가 혹시라도 떨어질까봐 계속 밑을 보면서 조심했다.

▲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무인석.
ⓒ 한성희
영조33년 2월 15일 정성왕후가 66세로 죽자 영조는 자신의 자리를 함께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64세였던 영조로서는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영조도 자신이 83세까지 장수할 거란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왕이 묻힐 신후지지인지라 홍릉 산릉 공사는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문인석이 어딘지 영조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 한성희
홍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조심스럽고 어딘가 교활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다. 저것이 영조를 83세까지 장수할 수 있게 한 영조의 성격이던가. 어쩐지 의심 많고 신중했던 영조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 정성왕후 옆에 비워진 우허제로 남아있는 영조의 자리는 명당에서 보인다는 원훈이 나타났다.
ⓒ 한성희
빈 채로 남아 있는 영조의 자리는 명당답게 잔디가 둥글게 솟은 원훈현상이 나타난다. 풍수의 대가인 세조가 의경세자 묘로 잡은 곳이 서오릉이니 명당자리임에 틀림없다. 최초로 의경세자가 묻힌 이래 예종의 창릉이 이곳으로 왔고, 그 후 조선왕릉 경역이 된 것이다.

워낙 높은 곳이라 이곳에서 군부대가 빤히 내려다보인다. 저 군부대 이름은 '권율부대'다. 조선왕릉과 조선의 명장 권율의 이름을 딴 권율부대의 발복의 함수 관계가 있나 싶다. 작년까지 홍릉과 창릉이 비공개 능이었던 이유도 저 군부대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지역인 파주에서 자란 내 눈에는 그런 이유로 공개를 막았다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이다. 도로를 따라 군부대가 있어 낮은 철망 사이로 트럭이 몇 대 있고 훈련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도 뻔히 들여다보이는 게 요즘 군사지역 풍경이다.

이 권율부대가 들어선 터 역시 원래 서오릉의 경역이었다. 100만 평이 넘었던 서오릉도 한국전쟁 이후 군부대가 들어서고 이런 저런 이유로 빼앗겨 55만 평이 남은 것이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비공개 능을 공개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지만, 빼앗은 서오릉의 경역을 돌려주어 역사유적지를 회복시켜야 한다.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도심에 자리 잡고 있어 발전을 저해하는 군부대의 이전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군부대로 인해 발전 피해를 입은 파주시의 경우, 아직도 시청 뒤에 군부대가 버티고 있는 형편이다. 대한민국 어느 지역에 시청 뒤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 파주 말고 또 있을까 싶다.

공릉도 미군부대 캠프하우스에 19만 평을 빼앗겨 국방부 땅이 됐고, 작년 11월 미군부대가 이전하자 그 땅을 국방부에서 파주시에 사라고 하고 있는 판이다. 유적지 빼앗아 마음대로 쓰고난 뒤 팔아먹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관습헌법과 경국대전을 적용해야 할 일이 아닌가.

매국노의 후손 땅은 합법적이라며 친절하게 손을 들어주어 찾아주는 마당에 강제로 빼앗긴 왕릉 부지들을 되찾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 경국대전이 정말 필요한 곳은 이런 경우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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