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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그림
김인수 그림 ⓒ 김형태
겨울 前 개나리꽃


호오오------
손발이 시려워 저절로 튕겨 나오는 입김
수목(樹木)의 잎사귀에서 푸르름을 야금야금 앗아간 추상(秋霜)은
어느새 여위어 가는 단풍을 매몰차게 地上으로 내몰고 있다 마구
한풍(寒風)이 비바람 몰아치듯 휩쓸고 지나가자
호흡하던 萬物이 벌벌 떨며 쥐구멍 찾기에 바쁘다
미처 피하지 못한 놈, 앉은 자리에서 사그러져 가고

겨울의 아침, 삭풍의 나루턱에
시절을 아는지 모르는지
과감하게 벙그러지는 한 떨기 개나리꽃

계절에 한 발 앞선 네 얼굴 보고는
사람들 입을 모아 한 마디씩 내뱉는다
정신 나갔다고
웬 청승이냐고

그도 그럴 것이
새봄도 아닌데 벌써 피어 야단이라고
날씨 감각 실종한 돌연 변이라고
값싼 동정을 하사하면서
차가운 침세례 퍼붓는다

너!
정말 모르니?
제대로 한 번 태양의 화사한 입맞춤
벌 나비의 무지갯빛 순정도 다시지 못한 채
동장군의 철퇴에 맞아
아사하리라는 것을

너는 시방
겨울이 가을을 겁탈하는 현장에서
성탄(聖誕)한 私生兒, 거꾸로의 人生別曲
<사람의 아들>처럼 죽기 위해서 만세를 부르는
키 낮은 나팔수이다 아니면,
낙원을 꿈꾸는 가난한 부자뱅이거나
잘못된 강물을 바로 돌이키려는 無能의 能力人이 아닐까

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死六臣을 위시한 이른바 호국 원혼(護國 寃魂)들의
소슬한 눈동자가 오버랩된다

이제 곧, 일을 끝낸 암사마귀가
숫컷을 자근 자근 씹어 삼키듯이
"샨"(겨울)이 "갈"(가을)을 맘껏 훔치고 들이키리라
깨물지도 않고 통째로

맙소사!
십자가가
역경(逆境)임과 동시에 양익(兩翼)이요
죽음이면서 아울러 생명인 것을
정확히 모르는 똑똑한 멍청이들

한여름 기세등등하던 녹음(綠陰)과
열녀문을 열두 번이나 수상한 국화(菊花)마저
어둠처럼 달려드는 한기(寒氣)에는 맥도 못 추고 나동그라져
꼭대기 한 점 이파리에 겨우 여운 남긴 채
겁에 잔뜩 질린 웃음으로 울고 있다
하염없이

불어라!
이 시대 마지막 양심의 보루, 애오라지 소망인
너의 선구적(先驅的) 사각나팔을 목청이 터지도록
음정이나 박자가 좀 틀리면 어떠리
다만당 햇병아리처럼 불어다오
아주 신명나게

어제 어느 고층 옥상에서
온몸을 불사르며 촛농처럼 떨어져 내린 꽃봉
아마도 너를 보고 용기를 냈으리라

누가 그와 너를 주검의 수렁으로 내몰았는가?
과연
그 누가!

너는 무참하게 짓밟혀 죽어갔지만
그러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산자들의 가슴 속에 불 일듯 용솟음하는
새봄으로 이미 뿌리내리고 있음을

거룩한 희생, 행복한 아픔, 자유스런 고독이
순교자(殉敎者)의 後光처럼 하늘에 사무쳐
너의 난장이 금관악기는 이제
몇 갑절 키가 큰 천사의 나팔이 되어
지축을 쩌렁 쩌렁 울리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개구리 수염 날 때까지

내일이 오면......



갈대에게서 1


그는 꺾이는 법이 없다
흔들리는 가슴을 가졌기에

꽃바람에 머리털이 살랑거리고
하늬바람에 다리가 하늘거리고
마파람엔 취객처럼 허리까지 비틀거리지

늘 바람 맞으며
흔들 흔들
흔들
카멜레온?

그러나 등 굽은 솔이 선산을 지키듯
마음은 북극성

된바람이 겁탈하듯 허리를 꺾어놔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

새봄이 오면 다시 일어설 뿌리를 가졌기 때문


갈대에게서 2

그들은 혼자 살지 않는다
겁쟁이라서 그럴까
두레 두레 살아간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잡초, 잡어, 잡새---
약자는 늘 모여 살기 마련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가훈을 운명처럼 받드는 것은
주제를 파악하는 낮아짐인가
생존의 비법인가
그들은 난 체 하는 법이 없다
비바람 불어와 목을 꺾어 놓기 때문일까
꿀벌이나 개미처럼 왕을 세우지 않는다
오늘도 사사시대를 고집하는 이유
출애굽을 시킨 하늘의 뜻이기 때문


갈대에게서 3

나보다는 우리를 높이는 민족
한번 디딘 땅은 죽으면 죽었지 물러서는 법이 없다
황제도 군인도 없는 일벌 뿐인 동네이지만
이방인을 들여논 적이 없다 일찍이
척박한 땅에 집을 짓고 살지만
늘 흰 이를 들어내며 산다
기름진 너른 땅에는 잘난 수목들이 산다
눈떠 보지 않는다 그곳으로
분수를 지킬 줄 알기 때문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


수염족

시방인께 그렇지
첨엔 감히 나올 생각을 못 혔지
그저 물밑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당께
그러코롬 사는 기 우리네 팔자려니 혔지

근디 어느날 한번 나가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구
시상이 하도 깜깜해서 그랬을까이잉
좌우지간 밝은 세상을 보고 싶더라니께
그래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고만

글쎄 그게 무슨 큰 죄라고
체포, 구금, 구타, 가위질에
억울하더라구
오기가 생겼지

하나가 자빠지면 둘이 되어 나가고
둘 다 내동댕이쳐지면 넷이 되어 나갔지
가진 게 몸뚱이 밖에 더 있남
항민에서 원민으로 그리고 다시 호민으로

우릴 그렇게 만든 건 순전히 그들 탓이랭께
비누거품에 새파란 칼날 그것도 모자라 전기면도기로
머리털처럼 큰 키와 넓은 마당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는디
왜들 그란댜

차라리 우리를 뽑아 번지지
한번 뽑아봐 그럴수록 빠지는 건 머리털 뿐일 탱게
우리는 당신들 호흡이 멈추어도 자란당께
정말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더라구


그 즈음 돌아가는 시국을 지켜보면서 썼던 나의 시편들이다. 5.17, 5.18을 거치면서 그렇게 무섭게 타올랐던 시위도 그러나 6월로 접어들면서 한풀 꺾여 시들해졌다.

얼마 후 기말고사를 맞이하였다. 집회와 시위를 좇아다니느라 학과 공부를 게을리 해서 중간고사를 망친 나는 이번 기말고사야말로 지난번 잘못을 만회하는 기회라 생각하고 아주 작정하고 시험공부에 전념하였다.

나는 중앙도서관보다는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운 문과대 독서실에서 주로 공부를 했다. 내가 문과대 독서실을 선호한 또 하나의 까닭은 중앙도서관은 밤 10시만 되면 문을 닫았지만, 이곳은 24시간 개방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빈 강의실을 전전하는 초희가 안타까워 남들에게 미안한 짓인 줄 알면서도 그녀를 위해 늘 자리 하나를 맡아 놓았다.

시험이 내일이면 종료되는 날이었다. 보통 한 과목 내지 두 과목을 보는데, 그 날은 특별하게도 시험시간이 겹쳐 세 과목이나 치렀다. 그래서 대부분 우리 학과 학생들은 마지막 날 시험과목인 '국문학사'와 '소설론' 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나 초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마지막 시험이니까 '밤을 새워서라도 만반의 준비를 하자' 그렇게 마음 먹었다. 그녀도 두 과목 모두 전공 필수라 무시할 수 없다며, 오늘은 나와 함께 밤을 새워 공부하겠다고 했다. 천안까지 갔다 오면 너무 많은 시간을 뺏긴다는 것이었다.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35회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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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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