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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개의 대야에 찰조, 팥등 낙안에서 나는 곡물을 진열해 놓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문앞에 앉아있다는 백정희씨, 이런모습이 우리의 사는 모습 아니냐며 반문한다
십여개의 대야에 찰조, 팥등 낙안에서 나는 곡물을 진열해 놓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문앞에 앉아있다는 백정희씨, 이런모습이 우리의 사는 모습 아니냐며 반문한다 ⓒ 서정일
열 일곱에 낙안읍성으로 시집와서 지금까지 이사 한 번 가지 않고 사는 집, 민속마을로 지정될 때 갈등도 있었다. 성문 밖에 나가서 살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정이 들대로 들어서 나가서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을 강조하는 백씨, 칠남매를 키웠으니 집에 관한 사연이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백씨의 표현을 빌자면 '쥐꼬리만한 논'으로 살아가기 힘들어 인근벌교에서 나는 해산물을 가져와 머리에 이고 팔았다는데 그게 장사의 시작인 떠돌이 어물전이었다는 것. 그후 빵장사 등 할 만한 것들은 모두 했다고 하니 지금 하고 있는 곡물전이 많이 팔리지는 않아도 장사하는 것이 몸에 밴 습관같다고 말한다.

우리네 인심은 됫박을 깎아선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틈날때마다 이렇게 수북하게 쌓아 놓아야 보기에도 좋고 담아주기도 편하다"면서 흘러내린 잡곡을 다시 됫박에 올려놓고 있다
우리네 인심은 됫박을 깎아선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틈날때마다 이렇게 수북하게 쌓아 놓아야 보기에도 좋고 담아주기도 편하다"면서 흘러내린 잡곡을 다시 됫박에 올려놓고 있다 ⓒ 서정일
이것 저것 묻는 기자에게 "내가 돈이 없어서 애들 공부도 제대로 못 가르쳤어"라면서 눈시울을 붉힌다. 옛날 못먹고 없이살때 대부분 우리네 가정이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탓인양 아이들 뒷바라지 못해준게 한이라고 말하는 백정희씨. "초등학교때 공부를 잘해 선생님이 노트하고 연필을 사주기까지 했었는데…."라고 말하는 백씨는 공부를 잘했던 큰딸이 생각나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옛일을 회상하는 듯 그저 고샅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씨, 모처럼 지나가던 관광객이 말을 걸어오자 '이것은 녹두 저것은 현미찹쌀' 하면서 줄줄이 설명을 한다. 하지만 여느 관광객들처럼 살펴보고만 지나간다. 그중 한 사람은 옆에 있는 아이에게 자연공부를 시키려는 듯 만져보게 하고 깨물어보게 까지 하지만 또다시 그냥 지나친다.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으련만 그저 담담하다. 그러면서 "애들이 우리네 농산물을 알고 가는 것도 좋지 않냐"며 웃는다.

"이 방이 아들 낳았다는 그 방이여"라고 말하며 2년전 부산에서 놀러왔던 젊은부부를 떠올리며 웃는 백정희씨, 문은 열어보이지만 아무에게나 함부로 열어주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 방이 아들 낳았다는 그 방이여"라고 말하며 2년전 부산에서 놀러왔던 젊은부부를 떠올리며 웃는 백정희씨, 문은 열어보이지만 아무에게나 함부로 열어주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인다 ⓒ 서정일
웃음이 명약이라고는 하지만 나이 앞에선 어쩔 수 없나 보다. 여러 가지 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4시엔 대야를 치워주기로 했는디 왜 이렇게 안오냐"면서 마실 갔다는 남편을 걱정반 원망반으로 기다린다. 다리가 아파 문앞에 대야를 진열하고 또 집안으로 들여오는 건 남편 몫.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향해 푸념을 한다.

그런데 어디서 말을 엿듣기라도 했다는 듯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담 너머에서 인기척이 난다. 그때서야 얼굴이 펴지면서 오랜 시간 함께 했던 기자에게 방으로 들어오라 한다. 커피라도 대접해야겠다며 부엌으로 향하던 백씨는 "이 방이 좋은 방이여 아들낳았다는 그 방이여"라고 묘한 말을 남긴다. 2년전쯤 이 방에서 묵어갔던 부산의 한 젊은부부가 어느날인가 전화를 걸어와서 "할머니 우리 그 방에서 묵고 간 후 아들낳았습니다"라고 했다는 것. 민박집을 하면서 기억나는 일중에 하나라고 한다.

힘들게 칠남매를 키우느라 장사가 몸에 밴 백씨는 "많은 관광객들이 오기에 질서있는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이런 모습도 '우리네 삶의 모습' 아니냐"며 문앞에 펼친 대야는 60년대 자식들 교육을 시키기 위해 모질게 살아왔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단속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 취재를 마치고 싸릿문을 닫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함께 만들어가자 '낙안읍성'
'낙안읍성 답사기'를 보내주세요

사적지로 지정된 지 20여년, 매년 수백 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가고 한 해에 두 차례 이상 전국적 규모의 축제가 열리는 전라남도 순천시의 낙안읍성. 하지만 남겨진 이야기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다. 성곽의 크기가 어떻고 집의 모양이 어떤지에 관한 학술적 자료는 넘치지만 정작 피부에 와 닿는 방문한 이들이 느끼는 여행기는 없는 실정.

을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년간 400만명에 달하는 관광객의 소중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낙안읍성에서는 홈페이지를 개편하는 등 의욕적인 출발을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 20여년간 이곳을 방문했던 관광객들이 내는 소중한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낙안읍성답사기'에 관광객들이 보고 느끼는 모든것을 담아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역사는 역사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듯 관광지는 그곳에 살고 있거나 주변인들만이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1983년도 여행기와 2005년 여행기가 같을 수는 없다. 그리고 한날 한시에 방문했다고 해도 보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은 천차만별.

그러한 것들이 모이고 쌓이면 큰 역사가 되고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함께 만들어 가는 낙안읍성, '낙안읍성 답사기'에 방문기를 남기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여러분이 느꼈던 소중한 것들을 기다립니다. 좋은점, 나쁜점, 지키고 가꿔 나가야 할 것 그 모든 것들에 관해 낙안읍성 홈페이지는 의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낙안읍성 공식 홈페이지 http://www.nagan.or.kr / 서정일

덧붙이는 글 | 함께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낙안읍성
낙안읍성 공식홈페이지: www.nag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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