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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리 농악의 대가 김종대옹의 북채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평사리 농악의 대가 김종대옹의 북채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 서정일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 농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낙안면 평사리의 김종대(79)옹. 일곱살 나이에 무등을 타고 상고를 돌리며 마을아이들에게 꽹과리를 가르치기까지 했던 농악신동. 그러나 지금 그의 신들린 듯한 꽹과리 소리는 들을 길이 없다.

낙안에서 선암사로 가는 길목, 큰 길과 조금 떨어져 있는, 한 때 70여가구가 있었지만 30여호 밖에 남지 않은 겉보기엔 일반 농촌과 다름없는 한 마을이 있다.

그저 무심코 스쳐지날 수도 있는 이곳이 바로 대표적 농악마을 평사리다. 이곳 농악은 전시(戰時)에 고개를 넘어 낙안 읍성으로 진출해 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해서 군악(軍樂)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마을 주민들은 지난 1980년 KBS방송국 주최 국악전 농악 부문에서 최우수상, 1980년 소년 체전 국악 농악 부문에서 최우수, 1981년 남도 문화제 농악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더구나 상쇠 김종대옹은 개인 최우수 연기상을 수차에 걸쳐 수상했다.

그동안 수상한 상장과 상패를 하나 하나 설명해 주는 김종대옹
그동안 수상한 상장과 상패를 하나 하나 설명해 주는 김종대옹 ⓒ 서정일
지난 2일 평사리 205번지 김옹의 집을 찾는 발걸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고개 너머에 사시는데 지금은 연로해서…."
한 마을 주민이 얘기해 준 김옹에 대한 근황 때문이었다. 그 얘기는 정확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백발인 김옹의 모습은 힘찬 농악을 소화해 내기엔 조금 벅차 보였다.

"김씨에게 가서 물어봐" 하면서 자세히 약도까지 그려준다. 전수를 해줘야겠다 싶어 틈틈히 가르쳐 준 낙안읍성앞에 사는 김홍철씨를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어깨에 신명을 달고 살아간다는 상쇠꾼에게선 좀처럼 듣기 힘든 거절이다. 신명까지 잃어버린 것일까? 매우 아쉬운 거절이었다.

김옹은 요즘 소에게 정성을 쏟고 있다.
김옹은 요즘 소에게 정성을 쏟고 있다. ⓒ 서정일
소에게 여물을 먹여야겠다고 일어서는 김옹.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기자의 귀엔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옛다, 잘먹고 쑥쑥 자라거라."
농악의 맛이 살아있는 내지름이었다. 짧지만 가락이 있는 소리에 취해 한참을 서 있었더니 이윽고 집 뒷쪽의 헛간같은 곳으로 안내한다.

이러저리 뒤지더니 결국 먼지가 쌓인 북 하나를 내려놓는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북채가 있어야 소리를 내는 법인데 달랑 북 하나만을 내려놓고 앉는다. "둥두둥" 몇 번의 꺾임이 있는 소리를 손으로 들려준다. 그러더니 또 이내 멈추면서 탄식을 한다. 깊은 사연이 있음을 짐작케 하는 탄식.

김옹은 마을회관으로 초연히 발걸음을 옮긴다.
김옹은 마을회관으로 초연히 발걸음을 옮긴다. ⓒ 서정일
마을회관으로 가자며 앞장서는 김옹. 평사리 마을회관엔 주민 여럿이 모여있었다. 벽엔 농악하던 모습들을 담은 액자가 걸려 있다. 농악마을이라는 자부심은 대단했지만 그건 옛말이라고 얘기한다. '배우는 이도 없지만 제대로 평가를 해 주지 않았다'는 얘기.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각종 악기들이 창고에 뒤엉켜서 나뒹굴고 있다.

누가 김옹의 북채를 사라지게 만들었을까? 누가 북을 앞에 두고도 그저 맨손으로 허공을 휘젓게 만들었을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옛 것을 지키고 가꾸지 않는 민족은 미래 또한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뿌리요 출발지인 마을입구 회관에 '평사리 농악전수회관'이라도 짓는 것이 꿈이라는 마을주민들의 의견을 순천시와 전라남도는 결코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함께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다큐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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