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름다운 이름자를 가진 작가 한강의 소설 <몽고반점>에서 형수와 시동생 관계는 처제와 형부 관계로 전이한다. <배따라기>에서 주인공인 형은 자신의 과오를 씻고자 평생을 '영유 배따라기'를 부르며 아우를 찾아다니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고 다닌다. 한순간의 오해로 빚어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회한과 속죄의 염은 참으로 깊고도 깊은 것이었다.

이제 8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 <몽고반점>의 주인공은 처제의 육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을 떨고 자위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포르노그라피에 가까운 촬영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육신을 돌아보는 주인공의 반성적인 자아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중년남성의 건조한 일상과 필연적으로 공존하는 혐오스러움이기도 하다.

듬성듬성 빠진 머리털과 불거져나온 뱃살과 무너진 몸매. 몇 달 동안 거른 아내와의 육체관계. 손에 잡히지 않는 반복적인 노동과 결실 없음, 그리고 무너져버린 미래. 여기서 그를 어떤 강렬한 출구로 몰고가는 것이 처제의 '몽고반점'이다. 서른이 넘도록 처제의 몸에 붙박이로 남아 있다는 몽고반점에 대한 열망으로 그의 '남성성'은 불현듯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살'은, 육체는 무엇인가. 거기에 더하여 우리에게 '영'은, 정신은 또 무엇인가. 소설 <몽고반점>에서 한강은 이 문제를 '가볍게' 제기한다. 두 가지 문제가 여기서 해결 가능하다. 하나는 강조된 어휘 '가볍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이며, 그 둘은 '제기'의 차원과 해결의 차원에 대한 사유의 궁극적인 목표지점이다.

자극과 감동과 쾌락이 결석한 나날의 삶을 이끌고가는 주인공의 완전히 말라버린 일상. 그런 일상의 건조함을 더욱 건조시키는 아내의 헌신적이며 흐트러짐 없는 자세. 그것과는 전혀 대조적인 양상으로 다가서는 처제의 강력한 자의식과 도발성. 거기에 덧붙는 원시적인 자연상태로서의 '몽고반점'. 망각된 과거를 환하게 밝혀내는 반점을 향한 주인공의 억제할 수 없는 그리움.

소설 <몽고반점>은 주인공의 이런 강렬한 지향을 해석하면서 저 바닥 모를 심연으로 침전하지도 않거니와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무거운 추를 휴대하고 있지도 않다. 여기서 작가는 그다지 자상하지 않다. 특히 처제의 내면을 그려내고 제시하는 장면들에서 소설가 한강은 지극히 인색하다. 우리는 처제의 깊은 고독이나 우울 혹은 불길과도 같은 정념의 시원을 알지 못한다.

억제할 수 없는 어떤 충동으로 그녀를 향하여 다가가는 주인공의 심리나 내면의 동요 역시 꼼꼼한 세밀화풍의 붓질과는 사뭇 먼 거리를 유지한다. 한강은 그저 냉정한 구경꾼 마냥 주인공의 행위와 심리적 정황을 담담하게 기술할 따름이다. 그리고 여기서 작가는 무거움이나 진지함보다는 오늘날 인구에 자주 회자하는 '쿨한' 자세를 시종 견지하고 있다.

이렇듯 가볍고 상큼하게 제기한 문제는 일시적인 오해와 우연의 병발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처제의 살과 형부의 육신이 하나로 뒤섞임으로써 매우 현대적인 양상을 획득한다. 거기에 추가되는 것은 두 사람의 적나라한 육신과 향연의 면면을 주인공의 아내가 목도한다는 점이다. 나신과 나신의 대면장면을 캠코더로 확인한 아내의 표정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떠오르는가.

'몽고반점'으로 표현되는 주인공의 유일한 출구는 비상구였는지, 적어도 비상계단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묻는 것은 소설 <몽고반점>의 마지막 장면을 무화하는 일이다. 설령 비상구나 비상계단이 애시당초 없었다 해도 주인공은 출구로 향하는 외길을 순순히 따라갔을 것이다. 숨통을 조여오는 현실과 먹빛의 미래는 결국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종국에까지 남는 문제가 있다. 처제와 주인공의 '영'과 정신은 그런 행위를 통하여 구원되었는가, 혹은 구원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다. 작가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에게는 그저 막연한 이미지만 다가온다. 어차피 출구가 없다면 막힌 출구 쪽으로라도 결사적으로 다가서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주인공은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편의 소설로 우리 시대를 온전하게 독서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한 마리 제비가 더러는 봄을 알리기도 하는 법. 만일 내가 소설 <몽고반점>에서 이 시대의 질적인 변화를 읽었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 금기마저 '가볍게' 파기해 나가는 우리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어찌 하겠는가. 그저 들여다 볼 밖에.

언젠가 게오르크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나그네들이 별을 헤아리며 그 별을 안내등불 삼아 밤길을 갔던' 기막히게 아름다웠던 시절의 향수를 노래한 적이 있었다. 김동인은 그 별을 아끼는 마음으로 옹졸한 주인공을 '영유 배따라기'를 부르는 떠돌이 가객으로 그려냈다. 하지만 이제 한강은 하늘의 별을 따다가 인간의 지상적인 욕망의 소비재로 치환해버렸다. 휴대전화 한 통 걸듯이.

아름다움을 그저 아름다움으로 향수하는 시간대가 마침내 21세기의 우리 시대 초두를 끝으로 영원히 먼길로 떠나버렸다. 이제 우리는 가슴 한켠에는 별을 헤아렸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른 한켠에는 그 별을 우리의 침상으로 인도하여 공존하는 비법을 스스로 터득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시간대와 맹렬하게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떠나버린 모든 것들에 가볍게 손을 흔들고서.

여러분의 건승과 승리의 자축을 기원하며...

덧붙이는 글 | 2005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대상수상작 <몽고반점> 외, 문학사상사, 2005.


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문학사상사(2005)

이 책의 다른 기사

한국문학의 오늘을 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터넷 상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고 싶어서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영화와 세상, 책과 문학, 일상과 관련한 글을 대략 3,000편 넘게 올려놓고 있으며, 앞으로도 글쓰기를 계속해 보려고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