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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안에 있는 기미독립운동 기념탑 정면 사진
낙안읍성 안에 있는 기미독립운동 기념탑 정면 사진 ⓒ 서정일
그러나 그런 옛날의 모습들만을 간직한 낙안읍성에 유독 하나,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세월 속에서 있었던 일을 기념하기 위한 탑 하나가 있다. 다름 아닌 기미독립운동기념탑. 1956년에 세워졌으니 바로 옆에 있는 임경업 군수의 선정비와는 무려 328년이라는 긴 세월의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의 객사와 기미독립운동 기념탑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조선시대의 객사와 기미독립운동 기념탑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 서정일
사적지로 지정되기 이전 1980년대 초의 낙안읍성은 초등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 그리고 시대상이 맞지 않는 갖가지 건축물과 조형물들이 혼합된 상태였다. 그러나 1983년 사적 제 302호로 지정되면서 대대적인 보수와 복원공사를 진행하게 되었고 현대사적 의미의 건축물과 조형물들이 모두 성 밖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런데 유독 기미독립운동기념탑만은 꿋꿋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연유는 뭘까?

임경업군수 선정비(앞)와 나란히 서 있는 독립운동 기념탑
임경업군수 선정비(앞)와 나란히 서 있는 독립운동 기념탑 ⓒ 서정일
"저 탑은 낙안면민의 혼입니다."
낙안태생으로 누구보다 낙안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있는 송갑득 선생은 '혼'이란 점을 강조한다. 낙안읍성에 관해 세권의 책을 집필할 정도로 꼼꼼히 하나하나를 챙겨내는 송 선생의 말속엔 나라사랑의 정신과 독립운동에 대한 낙안인들의 자긍심이 엿보였다. 그만큼 이곳에서 3·1운동은 각별하다.

사실 낙안이 3·1운동의 표본으로까지 인식된 건 시발지이기 때문이다. 탑골공원에서 33인의 독립운동가가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을 선언할 때 이곳 낙안에서도 똑같은 수인 33인의 서명으로 벌교 장터, 그리고 장좌리 ‘아랫시장’ 등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수차에 걸친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다. 수많은 부상자가 생겨났고 분노한 인근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지역이 크게 확대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낙안이 있었던 것.

정문앞 잔디밭엔 새롭게 만들어진 탑이 우뚝 서 있다
정문앞 잔디밭엔 새롭게 만들어진 탑이 우뚝 서 있다 ⓒ 서정일
1998년 3월 낙안읍성엔 자그마한 행사가 열렸다. 순천시 지원금으로 읍성 정문 앞 잔디밭에 낙안독립만세 운동 기념탑을 건립한 것. 이전에 작고 초라한 탑에 비하면 몇 갑절 커진 규모와 위용으로 우뚝 서 있다. 낙안이 민속마을로만 인식되어짐을 안타까워하듯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큰 외침으로 서 있는 것이다. 다분히 성안의 기념탑을 이전하려는 목적으로 성 밖에 세운 새로운 탑. 하지만 여전히 성안에는 3·1운동기념탑이 남아 있다.

사실 조선시대상을 재현한 낙안읍성과 근대사적 기념비인 3·1운동 기념탑은 어울리지 않는 약간의 어색함은 있다. 하지만 왜구에 맞서 성을 쌓고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조선시대 읍성사람들의 정신과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서러움에 복받쳐 울분을 토한 3·1운동 속의 근대 읍성사람들의 정신은 틀림없는 하나다. 그러기에 다른 건 모두 성 밖으로 옮겨졌어도 이것만은 형제처럼 함께 어울릴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덧붙이는 글 | 함께 만들어가는 낙안읍성 연재
http://blog.naver.com/pen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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