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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그의 귀로 호곡성(號哭聲)이 파고들며 그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기괴하게 생긴 악귀(惡鬼)들이 사방에서 불쑥불쑥 솟구쳐 나와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환영(幻影)이되 그에게는 환영이 아닌 실체였다. 정신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당할 수 없고 송하령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그는 버티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상대가 사용하는 것이 법술(法術)과 공력이 가미된 염력이라면 그로서는 상대할 방법이 없다. 차라리 그는 자신을 옥죄어 오는 기운에 대항하지 않았다. 막을 수 없는 것이라면 저항하지 않고 흐름에 따르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인간은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참(眞)으로 보고 참으로 아는 것은 마음(心)이다.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그가 익힌 심법은 도가(道家)의 그것과 유사했다. 억지로 진기를 끌어 올리지 않고 마음으로 심법을 운용하다보니 어느덧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혈을 끊을 듯 다가오는 기파는 여전히 그의 전신을 그물처럼 옥죄어 오고 있었다. 그는 그 와중에서도 오직 힘겹게 한발 한발 나가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더욱 강해지는 무형의 기운은 그를 주저앉고 싶게 만들었다. 마음으로는 그냥 대자로 들어 누워 쉬고 싶었다. 그는 전에도 이렇게 지독한 무기력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과 자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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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라 할 수 있는 중년인이 요구한 마지막 세 번째 일을 마치고 왔을 때였다.

“너는 마지막에 나를 실망시켰구나. 너는 반드시 그 남매(男妹)를 죽였어야 했다. 특히 그 소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였어야 했다.”

그는 세 번째 임무에서 한 집안 열두 명을 죽였다. 하지만 이십이 안돼 보이는 소녀와 열 서너 살 정도의 소년아이만큼은 죽일 수 없었다. 자신의 집이 그렇게 되었고, 자신과 누이동생만이 살아남았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차마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간절한 눈빛을 보이는 두 남매를 죽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소녀는 미녀였지만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는 모두 죽이라는 임무를 받았지만 그것을 완수하지 못했다. 그는 두 남매를 두고 그 방을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후일 기회가 닿는다면 당신에게 은혜를 갚겠대요.”

그의 등 뒤로 들린 그 꼬마아이의 목소리였다. 한 가족을 몰살시킨 흉수에게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은혜를 갚겠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임을 그는 그곳을 떠난 후에야 깨달았다. 결국 세 번째 임무의 핵심은 그녀와 그녀의 동생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너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은 내 책임도 있다. 그런 상황이라면 네가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야 했는데….”

질책(叱責)이라기보다는 안타까움이었다.

“나는 세 가지 부탁을 모두 한 것으로 하겠다. 이제 너는 자유다. 네가 자신 있다면 지금이라도 나를 죽일 수 있다.”

그가 아홉 살 이후로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고독과 싸우며, 잠을 일각이라도 줄여가며 오직 이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다. 만약 지금이 아니면 시도하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에 그는 대답했다.

“지금 하겠소.”

그를 길러주고 무공을 가르쳐주었다. 몇 번 본적도 없고, 여러 명의 알 수 없는 전문교두들을 보내 무공기초서부터 무림에서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전문기술들을 습득하게 해 준 사람이다. 그러기에 더욱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후일로 미룬다면 차마 그에게 손을 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가 무공을 가르쳤다고는 하나 그가 무공을 펼쳐 보인적은 없었다. 단지 비급을 주고 설명했을 뿐이었다. 그 뒤에 익히고 안 익히고는 그의 몫이었다. 성취 또한 전적으로 그만의 몫이었다. 그는 웃었고,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한사람에게 말했다.

“광노제(廣老弟). 자네가 내 대신 해 주겠나?”
“…?”
“걱정마라. 이 사람이 네게 패한다면 나의 목숨을 너에게 주겠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그도 아닌 그를 호위하는 사람과의 결전. 그가 십이년 동안 기다렸던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전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났다. 광노제라 불린 인물은 그가 상대할 고수가 아니었다. 그는 무기도 없었고, 살의(殺意)를 가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검을 뽑아 든 담천의는 그의 앞에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날파리가 거미줄에 걸려 점점 빠져 들어가듯 그는 검을 쳐들 수도 없었다. 태산 같기도 하고 망망대해 같기도 했다. 숨을 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는 그 날 아끼던 검을 두 동강 내고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배웠던 무공 전부를 잊으려 노력했다. 자신의 삶을 팽개친 것이다.

그때와는 다른 기운이었지만 느낌은 같았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단 한번이라도 검을 쳐내고 싶었다. 전과 같이 또 한 번 검을 두 동강내고 무기력하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는 현심경의 심법을 운기하면서 그의 혀끝을 깨어 물었다.

일단 정신부터 산란해져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정신부터 차려야 했다. 핏물이 배어 나오는 듯 입에 찝찔한 느낌이 전해졌다. 이 정도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오직 한번이라도 공격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의 귀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찰---칵---!

헛것이었을까? 헛것이래도 좋았다. 그 소리는 기이하게도 그의 내부로 파고드는 무형의 기운을 끊는 듯 했다.

찰----칵---!
그 소리는 더욱 명료하게 들려왔다. 그에 따라 그의 내부를 진탕시키는 무형의 기운은 미세하나마 중간 중간이 끊기는 것 같았다. 힘겹게 버티던 정신이 점차 조금씩이나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좌측에서 두 사나이가 걸어 나오며 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찰----칵----!
이제는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담천의를 옥좨 오던 기파를 끊고 있었다. 목적은 분명했다. 최소한 좌측에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은 적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한 사내는 보통의 체격이었지만 또 한 사람은 머리통 하나 정도는 더 큰 거구였다. 거구라 하였지만 그의 체격은 잘 갈아놓은 칼날을 보는 듯 군살이 없었다.

찰----칵----!

검을 수련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모르는 한두 가지 버릇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 생각하거나,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 그 버릇이 나온다. 검의 수실을 만지작거린다거나 검을 톡톡 튕긴다거나, 아니면 발검 때 하는 특이한 버릇이 그것이다. 지금 거구의 사내는 걸어오면서 왼손으로 감집을 잡은 채 왼손 엄지로 한 치 정도 검을 튕기며 뽑았다가 놓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검을 뽑기 쉽게 하기 위해서 원손 엄지로 검을 감집에서 한 치 정도 튕기고 그와 동시에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 발검을 하는 것이다. 주로 쾌검 술을 이전하는 자들의 버릇이다.

찰―칵―!

그 소리다. 검이 감집에서 튕기다 다시 들어가는 소리. 그 소리가 종적을 잡을 수 없는 무형의 기파를 끊어 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버릇처럼 튕기고는 있으나 그것은 무형의 기운을 끊으려는 의도적인 행위다. 그 안에는 초절정고수 만이 가질 수 있는 내력이 있었고, 마음만으로 상대를 살상(殺傷)할 수 있다는 의기상인(意氣傷人)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할 수 없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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