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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라도 상대의 공격에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전신 공력 중 육칠 할 정도는 운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있다, 분명히 누군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젠 본능이 아닌 오감(五感)이 사람임을 확인시키고 있었다. 적인지 아닌지 모르고,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우측에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고 그는 그 외에 더 있을지 모를 보이지 않는 적을 찾기 시작했다.

상대는 치밀하고 냉정했으며 집요했다. 그가 열이틀을 쫒기면서 느낀 결론이었다.

(또 있다, 좌측.)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거리를 두고 있어, 미세하지만 좌측에 무엇인가 있음이 느껴지고 있었다. 만약 우측에 있던 적들이 습격해 오고 그것을 방어할 때 좌측의 적이 나타나 퇴로를 차단하면 송하령은 도망갈 길이 없다.

그는 자신이 취할 모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일단 부닥쳐 나가기로 결정은 했지만 그들이 무사할 확률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었다.

(선제공격!)

이제는 모험을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상대방의 움직임에 따라 대응하고자 했던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선제공격을 하더라도 성공할 확률은 높지 않다. 하지만 위기가 닥쳐오면 수동적인 것 보다는 능동적인 것이 더 효과적이다.

“송소저, 나는 말이오.”

송하령은 깜짝 놀랐다. 그녀도 이미 담천의의 움직임에서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말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이쪽의 위치를 상대방에게 모두 알려주는 어리석은 행위다.

“이제부터 내 삶을 사랑하기로 했소. 나는 그동안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모르오. 그 때문에 내 삶을 팽개치기도 했고….”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송하령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이 사람은 무언가 결심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미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는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송하령의 얼굴에 시선을 던지며 담담한 미소를 피어 올렸다.

“그래서 나는 소저께 감사하오. 아홉 살 이후 처음으로 내 삶이 행복하다고 느꼈던 열이틀이었소.”

쿵!
그녀의 가슴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마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엉뚱하게도 이 상황이 고마웠다. 그리고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혼자 도망갈 생각도 없었지만 이제는 정말 그를 이용해 피할 생각을 버렸다.

“저도, 행복했어요. 둘이 있던 이틀은 마음이 아플 정도로요.”

그녀는 이제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애써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확인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활짝 열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그녀의 모든 능력을 헤아려 보았다.

이제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할 때다. 집안이나 친지들이 위험에 빠지더라도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결심을 했다. 한때 자신이 죽는다 해도 감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까지도 그녀는 사용할 생각을 했다.

사랑이란 묘한 것이다. 사랑이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어느새 갑자기 불타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그것이 한번 튀어 나오면 자신의 목숨까지 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고맙소.”

그 역시 이제 그녀의 마음을 알았다. 비록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두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그녀의 가냘픈 손에도 힘이 느껴졌다.

(약 칠팔 장 정도!)

그는 거리를 계산하고 있었다. 일단 사정권에 들어와야 했다. 그것은 자신도 위험한 거리이기는 했지만 단 한번으로 일단 상대의 계획을 바꿔놓을 치명적인 공격이 되어야 했다. 그 한 번의 기회를 놓치면 정말 더 이상의 기회는 없게 되는 것이다.

(오장 정도, 조금만 더 가면….)

출수할 준비를 하는 순간 그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헉!)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전신을 파고드는 기이한 느낌. 그것은 살기나 경력(經力)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격공탄기(膈空彈氣)나 강기(剛氣)도 전혀 아니었다.

무공이 신화경에 들면 자신의 내력을 이용해 무형의 기를 형성하고 그것으로 일정거리를 둔 상대를 공격할 수도 있다. 더욱 초절정고수들은 강기를 만들어 더욱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다. 소림의 비기(秘技)인 탄지신통(彈指神通)도 일종의 강기를 형성해 지강(指剛)을 쏘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거리는 일이장 내에 한정된 이야기다. 이렇듯 오장의 거리를 격하여 강기를 발출할 자는 이 세상에 없다. 더구나 강기는 이렇지 않다. 부드러운 바람 같기도 하고, 전혀 거부감 없이 몸속을 파고든다. 상처도 나지 않고 흔적도 없으며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몸속에서 느껴지는 이 충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기혈이 들끓고, 대혈(大穴)마다 찢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 으헉!)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의 걸음은 눈에 띠게 느려졌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걱정이 되어 송하령을 바라보았다.

“…!”

송하령은 전혀 이상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이상한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일까? 이러한 종류의 무공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훅!”

마침내 그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이미 본신의 진기는 일으키기도 전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지를 휘젓고 다니며 혈도 곳곳을 터트려 버리려 하고 있었다. 이미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알 수 없는 기운은 마치 그물이 죄어오듯 더욱 강하게 얽혀 들었다.

(이건 무공이 아니야!)

그는 더 이상 발걸음을 떼어 놓기도 힘든 상황에서 이 알 수 없는 기운의 정체를 알고자 노력했다. 자신을 죄어 오는 이것의 정체를 모르면 대항하기 힘들다. 그는 본신의 진기를 끌어올려 대항하려다 포기했다. 진기를 끌어 올리면 올릴수록 혈맥이 팽창해 파열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건 기파(氣波), 아니 염력(念力)이다!)

정신력!

이 세상에는 기이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 나쁜 경우에는 기형이라고 하여 일반사람들이 기피하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가 하면 좋은 경우에는 그것을 하늘이 부여한 재능이라 하여 존경하기까지 한다. 염력은 하늘이 부여한 재능이라 할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상단전(上丹田)이 열려 있는 사람이 그것을 아는 스승을 만나면 그 능력을 개발할 수 있고, 아직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정신세계다. 하지만 탁자 위의 찻잔을 흔들거나 기껏해야 찻잔의 물을 엎지르는 정도, 늘어진 휘장을 바람이 부는 듯 살랑대는 정도만으로도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것도 속임수가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사람의 내부를 뒤흔들 수 있는 염력이라면 이미 염력이 아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염력을 개발한 후 본신의 진기와 혼합할 수 있다면 이럴 것이다. 무공 같지만 무공이 아닌 그 무엇. 염력 같지만 순수한 염력이 아닌 그 무엇.

“…!”

금창약을 바르고 동여매어 아물기 시작한 가슴의 상처가 터져 핏물이 배어 나왔다.

“공자, 왜?”

송하령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분명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는 있는데 자신은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모습을 보건데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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