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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두 달에 걸쳐 <상실의 시대> 여행을 마쳤다. '왜 이렇게 오래 읽었냐’하면 사색하면서 읽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무도 믿지 않을게 뻔하니 그냥 천천히 봤다고 말하겠다. 사실 독서를 하는데 있어서 빨리 읽느냐, 천천히 읽느냐는 개인 취향일 뿐이지만….

초반부는 사실 쉽게 읽히지 않고, 재미도 없기에 빨리 읽히지 않았다. 재미있다고 느낀 부분은 주인공 와타나베가 미도리를 만나고서 부터다. 주인공은 식당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는데 허물없이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흠뻑 빠졌다. 자신이 느낀 그대로, 표현하고 싶은 그대로를 내보이는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뒤에 미도리가 “난 살아 있는 피가 흐르는, 생기 넘치는 여자야”라며 와타나베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대사가 미도리라는 인물의 특성을 단정지어 준다. 자신에게 당당하면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남자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와타나베는 답답한 인물(이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와타나베는 생각이 많은 인물인 것같다. 와타나베의 그런 부분 때문에(궁금증을 일으키기에) 주위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좋아한다는 것과 궁금하다는 것은 다르지만 둘 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면에서는 같다. 관심을 가져야 좋아하게 되고, 그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는 건 관심이 있다는 말이고, 좋아하게도 된다는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는 얘기다.

사람이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선 궁금증이 선행되어야 한다. 대화는 물음과 대답으로 대부분 구성된다. 묻는다는 건 궁금하다는 것이고, 그렇게 서로 알아가면서 친해지는 거다. 친해진다는 건 좋아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건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여기서도 보면 흥미로운 인물인 나기사와 선배나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말을 걸고 친해진 건 궁금함에서 비롯된 일이니까 말이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번역본 제목은 <상실의 시대>이다.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을 참 잘 지은 것같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의 시대’에 산다. 아니 삶 자체가 상실로 점철되어 있다. 많은 걸 얻지만 그 모든 걸 상실해가니 말이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오래 전 신문기사에서 그의 그의 이름을 봤기 때문이다. 한 연예인이(아마도 신해철도 있었던 것 같다) 일본문학 중 무라카미 류나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관심을 가졌고, 언젠간 읽으려고 벼르다가 지금에서야 읽게 된 것이다. 더불어 미도리에 대한 궁금증이 때문이기도 하고….

종이로 구성된 소설책은 오랜만에 읽어봤다. 각종 실용서나 간간이 그림책(?)을 보긴 했지만 소설책은 참으로 오랜만에 봤다. 그것도 순수문학 책은…. 아무튼 재밌는 시간이었다. 요즘 같이 디지털이 득세한 세상이라도 책의 매력은 쉬이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자기 전 머리맡에서 조금씩 책을 읽는 시간은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고 좋은 시간이다. 책장을 넘기는 손맛은 디지털이 절대로 따라갈 수가 없으니 말이다.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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