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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맛'의 어원 소태나무의 잎과 줄기
'소태맛'의 어원 소태나무의 잎과 줄기 ⓒ 김규환

아버지는 음식이 짤 때는 "뭔 음석(음식)이 요롷게 쓰냐? 소금 가마니를 턴 것이여? 올 가실(가을)엔 소금가마니 받지 않을 것이여. 적당히 짜야 뭘 먹어보지 원…. 소태보다 쓰당께"라고 하셨다. 그 소태가 무엇인지 나는 금방 알았다.

5학년 때 일이다. 아버지는 소 버짐이 올랐다. 처음엔 별 것 아니었다. 등짝을 몇 번 긁어달라고 하시던 아버지는 나에게 긁어달라는 말씀도 못하실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 학교 다니는 아들에게 옮을까봐 막가지를 꺾어 손수 긁적긁적했다.

그 때부터 나는 아버지와 더욱 멀어졌다. 밥 먹을 때 빼곤 당신 스스로 격리된 생활을 택했으니 말이다. 그 상태는 자식인 나도 차마 옆에서 보기에 측은할 지경이었다.

여름엔 파리 떼가 노출된 살갗을 괴롭혔고 겨울엔 그 추위에도 양말을 신을 수 없었다. 가까이 접근도 막으셨다. 암소 목덜미 부근에 일었던 마른버짐이 아버지에게 옮았으니 이를 어쩔 거나.

못 먹어서 얼굴에 핀 하얀 마른버짐과 달리 진버짐이 아버지 온 몸을 뒤덮었다. 2년여 고생이 시작되었다. 'PM'을 발라서는 도저히 차도가 없었기 때문에 급기야 아버지는 버짐에 좋다는 소태나무를 베러 가셨다.

우리 선산이 있던 긍내기 깊은 골짜기 귀목나무골 응달쪽에 있던 푸르스름하면서 타원형인 소태나무 잎사귀와 줄기를 한 짐 베어오셨다.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하실 생각이었나 보다.

"아부지 이것이 뭣이당가?"
"소태나무다 소태."

그렇게 쓰다는 소태나무를 처음 보았다. 그 뒤로 난 산에 갈 때마다 어머니와 형들에게 소태나무를 알려 달라고 졸랐다. 집안에 별 기괴하고 희한한 냄새도 냄새였지만 아버지가 고생하시는 모습을 차마 더 지켜보기 힘겨웠으니 여차하면 아버지 대신 나무를 베어오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가평 운악산 자락에서 발견한 소태나무 한 그루
가평 운악산 자락에서 발견한 소태나무 한 그루 ⓒ 김규환
아버지는 나무줄기를 잘게 쪼개 잎과 함께 삼태기에 담아 소죽솥에 물을 가득 붓고 불을 땐다. 한번 팔팔 끓자 나무를 건져내고 불을 줄여서 고아나간다. 몇 시간을 졸였을까 뽀글뽀글 거품이 생기더니 진한 갱엿보다 더 까맣게 굳어져 간다. 양은 대병 서너 병 가량으로 줄었다.

타지 않게 불을 끄집어내고 식혀서 가보1호 소에게 절반, 나머지는 아버지 온몸에 골고루 바르셨다. 소태나무 곤 물이 피부에서 말라비틀어지자 아버지는 영락없는 깡마른 갈색의 '엉클 톰' 아저씨다.

하루에도 두세 번 바르고 또 발라 덕지덕지 엉겨 붙은 그 약은 너덜너덜 붙어 있다. 자식인 내가 보기에도 사람 형상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것으로도 쉬 낫지 않았다. 그러기를 1년을 풀쩍 넘겼다. 'PM'을 들이붓듯 바르고 소태나무를 달여서 발라도 별 효험이 없었다. 그렇게 그냥 뒀다가는 아버지 창자에도 버짐이 옮을 거란 이야기까지 돌았다. 다른 수를 쓰지 않으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번엔 평소 홍어채나 오이냉국을 할 때 쓰던 강력한 순도 99%의 식초-빙초산 병을 사 날랐다. 코로 맡기도 힘들고 손에 한 방울이라도 떨어졌다가는 껍닥(껍질)을 확 벗겨버리고 마는 맹독성 식초. 몇 초도 안 되어 홍어 뼈도 녹이고 색깔도 변색시키는 빙초산의 짜릿한 신맛을 아는 사람은 그걸 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아버지는 식초병을 한쪽에 두고 나뭇가지로 찍어 손, 발, 사타구니, 겨드랑이, 목, 얼굴에 질질 흐르도록 바르셨다. 옆에서 그 고약한 냄새를 맡으면 숨쉬기도 쉽지 않다. 그걸 참아가며 발라가는 당사자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웬만한 피부는 PM만 발라도 껍질이 몇 번이고 벗겨질 텐데 그보다 독성이 열배, 아니 백배는 더한 빙초산을 녹여서 물도 섞지 않고 바르니 아버지 피부는 족족 벗겨져 흉측하게 변해갔다. 몽골족 특유의 뽀얗고 노란색은 온데간데없고 딸기우윳빛에 가깝도록 핏줄과 뼈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화상(火傷)도 이 정도면 3도가 넘을 것이다. 평소 자식들 앞에서 아프단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으~" 하시면서도 또 바르시면 "아부지, 며칠 있다가 바르셔요" 그러면 "뿌리를 뽑아야 헝께 어쩔 수 없다"며 마치 자신을 학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여름 빼고는 얼음처럼 얼어 있는 빙초산. 빙초산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 여름 빼고는 얼음처럼 얼어 있는 빙초산. 빙초산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 김규환
그 때 난 아버지가 처음으로 불쌍해 보였다. 그 버짐 앞에 속수무책이고 자식들도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관계라니. "아부지, 글면 물이라도 타서 바르지 그요?"하며 말려보았지만 뼈까지 드러난 발등을 보이시며 멈추지를 않았으니 내 살갗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아직도 지울 수 없다.

가까스로 2년여 고생을 하신 아버지는 빙초산으로 그 무자비한 균까지 죽여서인지 어느 순간 바르기를 멈추셨다. 다 나은 모양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PM과 소태나무고약, 빙초산을 바르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도 내 피부를 괴롭히는 몹쓸 것을 만나면 그 중 가장 독성이 강한 빙초산을 쓰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얼마 전 운악산에 가서는 소태나무를 보았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런데 아버지 생각이 더 간절한 일이 터졌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당시 4학년이었던 막내가 아버지 수발을 한 딸이라고 빙초산 하나를 사가지고 온 것이다. 4년여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 다녔던 아이였고 빨래와 밥 짓기를 마다 않고 고생깨나 했던 불쌍한 막내가 사온 것은 빙초산이었다. 어릴 적 맛이 당긴 것일까?

"이 거 왜 사왔냐?"
"그냥 진한 걸로 홍어를 무쳐보려고."
"참 오랜만이네. 그런데 다룰 땐 조심해야 한다. 아이들 손에 닿지 않게 알았지?"

며칠 바깥출입이 잦고 신발을 신고 있던 시간이 길었더니 없어진 줄 알았던 무좀이 괴롭힌다. 희석을 시켜서라도 발바닥에 바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 참에 미지근한 물에 타서 머리를 감아야지. 비듬까지 괴롭히니 정말 성가신 걸 넘어 환장할 노릇이다. 지금 나는 벌써 빙초산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금 무좀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지금 무좀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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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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