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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옥 이현주 목사.
ⓒ 박철
내가 관옥(觀玉) 이현주 목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79년이다. 당시 관옥은 동해안 죽변 교회에 계셨다. 철필로 공들여 쓴 교회주보를 통해 이현주 목사 이름을 처음 대했다. 나는 관옥의 삶을 좀더 가깝게 느껴 보기 위해 그 분의 책을 다 구해 읽었다.

조촌에서 그 유명한 모과주 사건으로 고민하다 그 곳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쓰신 편지도 어떻게 해서 나에게까지 전달되어 읽을 수 있었다. 그 무렵 내가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교지 편집위원을 하면서 관옥의 글을 받아 싣게 되는 행운도 얻게 되었다.

그때 관옥의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목회자가 섬길 대상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 점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확인해 두지 않으면, 쉽사리 교회를 위한 종으로 전락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곧장 교회의 신격화를 초래하고 목사는 교회라는 우상을 섬기는 바알의 제사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목회는 더불어 사는 것이다. 하느님과 더불어, 그리고 인간들과 더불어 살면서 때로는 하늘의 언어를 인간에 통역도 해 주고, 때로는 인간의 앞에 서서 안내도 해 주고, 때로는 뒤에 서서 밀어 주고, 그리고 언제나 그들 복판에 서서 함께 걸어가며 함께 고민하고 함께 희망하는 그것이 목회다."

관옥은 수많은 저술 활동을 하셨는데, 책방에 책이 나오는 대로 구해 읽었다. 책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 잡지에 실린 글들도 다 찾아 읽었다. 그때까지 만해도 관옥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다. 그래서 뵌 적은 없었지만 애인처럼 흠모하게 되었다. 관옥 이현주 목사의 글에서 나는 그 분을 바람처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자유로운 분으로 느꼈다. 그 느낌이 편안하고 좋았다.

관옥이 직접 써서 만든 주보의 지렁이 같이 꼬불꼬불하고 다정한 필체가 마음에 들어 한동안 필체를 모방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강원도 정선에서 첫 목회를 시작한 후 드디어 오매불망하던 관옥을 직접 뵙게 되었다. 처음 관옥 이현주 목사를 뵙게 된 때가 1986년 8월초였다.

내가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활동한 '감리교농촌선교목회자회'에서 관옥을 강사로 초청했던 것이다. 글과 말은 사뭇 달랐다. 관옥의 말은 조금 어눌한 듯했다. 그래도 당신이 하고 싶은 말씀은 다 하신다. 묘한 매력을 준다. 작은 텐트 안에서 선배들 틈에 끼어 밤을 꼴딱 새우며 새벽까지 얘기를 나누게 되는 행운도 가졌다. 그 후에도 여러 번 관옥과의 만남이 있었다.

1992년 겨울, 계룡산을 등산하려고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대전에서 내렸는데 등 뒤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박철 목사, 자네가 여기는 웬일인가?" 관옥 이현주 목사셨다. 그 때 처음으로 관옥이 내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다. 너무 고마웠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그 분을 내 스승으로 모시기로 작정했다.

▲ 관옥이 우리집에 오셔서 써준 글
1994년 겨울, 화성군 남양 장덕교회에 관옥을 초청하여 신앙강연회라는 이름으로 2박3일 말씀을 들었다. 2박3일 동안 가까이서 관옥을 느낄 수 있었다. 관옥은 한마디로 조용하신 분이셨다. 당신이 즐겨 신는 하얀 고무신처럼 정갈하고 깨끗하셨다. 짬이 나실 때마다 글을 쓰신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하얗게 웃으신다.

내 첫 시집 <어느 자유인의 고백>(신어림) 발문을 관옥에게 부탁드렸는데 거절하지 않고 형편없는 시에 비하여 과분한 시평을 해 주셨다. 관옥이 나를 위해서 200자 원고지 40매가 넘는 글을 써서 인편으로 보내 주셨다. 관옥이 써주신 시집 발문 원고를 가끔 꺼내보곤 했었는데, 읽을 때마다 부끄럽다.

"예수와 다산(茶山) 만나는 자리서 나는 좀 더 농익고 향기로운 박철의 시편들이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환상을 본다. 왜 갑자기 다산(茶山)인가? 이 시집을 읽는 독자는 내가 갑자기 다산(茶山)을 들먹이면서 이 글을 마치는 이유를 아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몇 해 전 내가 사는 교동 북면 지역 4교회가 연합으로 이현주 목사를 모시고 2박3일 동안 신앙강연회를 가졌다. 승합차로 관옥을 모시러 배 터로 나갔다. 관옥이 탄 배가 육지에 닿는데,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강연회 첫 시간이 시작되었다. 관옥이 인사를 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좀 전에 들어오다 보았는데 현수막에 '이현주 목사 신앙강연회'라고 적어 놓았던데, 그거 지우시거나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찌 내 이름을 앞에 달고 신앙강연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첫 시간이 끝난 다음 현수막에 큰 글씨로 쓴 이현주 이름 지우거나 아니면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나를 초청해 준 박철 목사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안 하면 나는 한 마디도 말을 안 하고 가겠습니다."

관옥은 자기 이름을 큰 글씨로 적어 놓은 것에 대해 불편하게 느끼고 제동을 거셨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너무나 미안하고 송구스러웠다. 동네 입구에 걸어 놓은 현수막은 고칠 수가 없어 강연회 첫 날 내렸다. 교회 강단에 써 붙인 글씨는 관옥이 말씀하신 대로 고쳤다. 관옥의 그릇의 크기를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강연회를 끝내고 돌아가시는 날, 강사비 봉투를 드렸더니, 이렇게 많은 강사비는 처음 받아본다며 인근에 병환으로 고생하시는 선배 목사께 전해 주라며 봉투에 짧은 메모를 하시고 다시 건네주신다. 관옥 이현주 목사는 옆에만 있어도 느낌이 통하는 분이시다. 어른을 모시면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관옥은 조금도 그렇지 않다. 편안하다.

▲ 관옥이 단소를 부는 모습.
ⓒ 박철
좋은 차를 마실 때 느낌이라고 할까. 말씀을 하면서도 늘 조용하시다. 크게 말씀하시는 법이 없다. 그럼에도 마음에 큰 울림을 주신다. 작년 12월, 내가 그동안 써 놓은 글을 모아 책을 내기로 하고 또 추천사를 부탁했었다. 그때 관옥은 절필(絶筆)을 선언하신 이후였다.

"박 목사, 내가 써 주고 싶지만 이번에는 좀 어렵겠어. 내가 앞으로 일체의 글을 쓰지 않기로 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부탁은 거절하고 자네 부탁은 들어 주겠나? 그럴 수는 없지 않겠어? 미안하네."

관옥이 어떤 생각으로 절필을 선언하셨는지 그 속내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관옥의 성격은 거절을 잘 못하시는 분이다. 그 점은 내가 잘 알기에 오히려 고맙고 통쾌한 마음이 들었다.

작년 봄 거처를 동학사에서 동해 끝자락으로 옮기셨다가, 무슨 일인지 다시 서울로 옮기신 후 올해 초부터 묵언(黙言) 수행 중이다. 시간을 내서 찾아 뵐까 하다가 나까지 찾아가서 괴롭힐 일이 무에 있겠냐고 마음을 접는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침묵하며 자신을 좀 더 살피고, 내면에 계신 스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아마 당신이 앞으로 가실 길에 대해 진지한 모색을 하고 계시리라.

관옥 이현주 목사가 10년이 넘는 선배요, 형님뻘이지만, 이미 그분은 나의 스승이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 분이 역정을 내실지 모르지만, 그분의 그림자라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제자의 도리라고 믿고 더욱 정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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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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