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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85년 신학교를 간신히 졸업했는데 막상 오라는 데가 없어 일년 동안 구들장 신세를 졌다. 그때가 신혼 초였다. 한번은 충청도 어디서 오라는 데가 있었다. 그런데 나보고는 마음 변하지 말라고 해놓고 며칠 지나서 갑자기 오지 말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내가 시국에 관련한 설교를 했다는 것이다. 그 때 장로 중에 한 사람이 여당의 지구당 위원장으로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이사 가는 날짜까지 잡아놓았는데 문제가 터진 것이다. 기분이 참 더러웠다.

하는 수 없이 아내와 소꿉장난 하듯이 1년을 하릴없이 지내다가 친구가 다리를 놓아주어 강원도 정선 덕송교회로 가게 되었다. 6개월 동안 담임자가 없던 교회였다.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무조건 가고 보자였다. 교인들은 할머니 7-8분, 노총각 1명, 어린애들을 포함해서 중․고등학생들이 20명쯤 되었다. 동네라야 24가구가 전부였다.

▲ 민들레 홀씨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다.
ⓒ 박철
참으로 척박한 동네였다. 물을 댈 수 없어서 묵혀 논 논다랑이가 서너 마지기가 있을 뿐 모두 밭뙈기들인데 그것도 헤어진 옷을 깁듯이 여기저기 거의 비탈 밭이었다. 밭농사라야 감자, 고추, 메밀, 사료용 옥수수 등이 전부였다. 교회당은 15평 남짓했고, 담임자 사택은 방이 두 칸에 가운데 부엌이 있는 일자집이었다. 지붕은 달랑 슬레이트만 얹고 반자를 안 해서 여름이면 찜통이었고, 겨울이면 윗목에 놔둔 물이 얼 정도로 추었다. 방이 얼마나 작던지 아내가 시집올 때 갖고 온 장롱을 들여놓았더니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수가 없었다.

6개월 동안 비워둔 집이어서 사람대신 쥐새끼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한밤중 쥐새끼들이 찍찍거리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이 들 만하면 쥐새끼들이 연애를 하는지 사각사각거리다가 별안간 우당탕하고 뛰어다니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자다가 약이 올라 베개를 냅다 천정을 향해 집어던지면 잠시 조용해진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4년 6개월 동안 쥐새끼들과 같이 살았다.

교회마당 앞에 나가서 '이 아무개야!'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면 다 들릴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인정이 많고 선량했다. 전화도 없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여름이면 매미가 쩌렁쩌렁 요란하게 울어댄다. 겨울이면 산이 깊어서 밤이 일찍 찾아오고 한없이 고즈넉했다.

나는 그때 강단에서 뭐라고 설교를 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설교랍시고 했을 텐데 지금 생각은 그 시절 전국적으로 데모 열기가 한창이었을 무렵, 나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그것도 민중의 언어랍시고 그들의 삶과는 전연 무관한 얘기를 토해냈을 것이 뻔하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나의 삶은 거대한 자본주의의 모순과 군사독재정권의 권력남용에 대한 저항으로 일관했기에 어찌 보면 그 시절, 그럴 수밖에 없던 측면도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내 숨통을 트이게 해준 것이 바로 북산이 육필로 써서 보내준 '민들레교회 이야기'였다. '민들레교회 이야기'는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 준 창문 같았다. 우체부 아저씨가 우편물을 가지고 오면 제일 먼저 민들레교회 이야기'부터 찾았다. 첫 장부터 꼼꼼히 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내가 다 읽고 나면 그 다음 아내가 읽는다. 두 사람이 다 읽고 나면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철끈으로 묶어 몇 달치를 벽에 걸어둔다. 낮잠을 자고 나서 읽을 때도 있고, 심심해도 읽고, 잠이 안 와도 읽었다.

▲ 민들레 홀씨가 여행을 모두 여행을 떠났다.
ⓒ 박철
그때 나의 주변에 농목에 속해있는 친구들은 거의 '민들레교회 이야기'를 구독했다. 가끔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얘깃거리가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민들레교회 이야기'에 실렸던 이야기가 등장했다. 왜 그토록 '민들레교회 이야기'에 집착했을까? '민들레'가 품고 있는 상징과 정서가 그 당시의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 시절 가장 많이 쓴 말이 '민중'이라는 단어였다. '민들레교회 이야기'는 언제나 따뜻했다. 다 읽고나면 군불을 지핀 방이 따뜻하게 덥혀지는 것과 흡사한 느낌이 밀려 왔다. 북산이 지향하는 민들레는 격렬하거나 공격적이지 않고 맑고 순수했다. 조용한 산방(山房)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점점 더 '민들레교회 이야기'에 매료되어 갔다. 가끔 '민들레교회 이야기' 제호를 붓으로 써서 보내기도 했고, 시 나부랭이를 적어서 보내기도 했다. 북산이 그걸 실어주면 되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신학교 문을 들어설 때
    뒤늦은 결심이라 그래 나는 농촌 목회 하자
    온통 뒤틀린 심사로 선언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마디로 맘몬주의 빠진 서울이
    너무나 흉측했고 비위에 거슬렸다.
    박완서씨의 ‘휘청거리는 오후’처럼 한없이 휘청거리며
    독립문으로 영등포로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신학교 문을 억지로 나서면서 참 한심했다
    서울에서 개척을 하자니 도둑놈 심보같고
    어디서 오란 데는 없고 빈둥빈둥 구들장 신세만 졌다
    참 막막하기도 하지 그러다가 걸려든 곳이
    바로 여기 정선 아리랑 덕송교회
    다 해봐야 열 명도 채 안 모인다
    요즘은 농번기라 주일예배에 할머니 두 분이 참석하면
    우리 집사람까지 모두 네 명이 예배를 드린다
    진정한 삶의 복귀를 위해 농촌 땅을 밟았는데
    겉도는 걸 끝없이 맴도는 걸 어쩌란 말인가
    젠장 큰소리는 왜 쳤담 이제 와서 보따리를 쌀 수도 없고
    어사지간 세월은 가고 자꾸 우리 집사람 눈치만 보게 되니

    (박철 졸시. 농촌목회)


▲ 불당안을 들여다 보고 북산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 박철
그러나 '민들레교회 이야기'는 열심히 읽었지만 북산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다. 한 번 뵙고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전화를 드렸다. 그랬더니 다음 월요일 감신대에서 축제를 하는데 형제교회 김영주 목사와 함께 만나자고 하신다. 북산을 처음으로 뵙고 인사를 드리기로 했는데 빈손으로 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을 선물로 드리면 좋을까 생각하다 '말린 메뚜기'를 드리기로 했다.

덕송리 마을에는 묵은 논이 서너 마지기 있었는데 메뚜기가 많았다. 아내와 나는 아침부터 어린애들처럼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았다. 그렇게 서너 시간 잡으면 1.8리터짜리 플라스틱 병 하나를 채울 정도로 잡혔다. 메뚜기를 잡아서 뚜껑을 연채로 놔두면 메뚜기들이 기진맥진해서 똥을 싼다. 그걸 꺼내 찜통에 넣고 살짝 쪄낸다.

그 다음 거적에 메뚜기를 붓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이틀정도 말린다. 그러면 끝이다. 양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먹을 때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살짝 튀긴 다음 소금을 살짝 뿌리고 먹으면 된다. 간식거리로도 그만이고 맥주안주로도 최고급이다. 며칠 잡은 메뚜기를 잘 말려 두 되박을 박스에 담아 포장을 했다. '이걸 북산이 받으면 뭐라고 하실까?'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선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타고 올라와 북산과 약속한 감신대 웰치기념관으로 향했다. 정확하게 약속시간에 도착했다. 그걸 어찌 기억하는가? 내가 시간 약속만큼은 칼같이 지켰기 때문에 아마 틀림없었을 것이다. 하필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그때 이정배 교수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기념강연회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북산을 처음으로 만났다. 김영주 목사도 나왔다. 전에 누군가로부터 북산의 모습이 꼭 소장수 같다는 얘기를 들은바 있었지만 실물로 대하니 그동안 글에서 받은 느낌과 사뭇 달랐다. 악수를 하는데 강한 악력(握力)이 느껴졌다. 완전 솥뚜껑 같았다. 북산과 김영주 목사는 잘 아는 사이로 보였다. 이정배 교수의 기념강연회가 끝나자 감신대를 빠져나와 근처 다방으로 들어갔다. 북산도 이정배 교수를 수년 만에 처음 만나는 것 같았고 얘깃거리가 풍성했다. 주로 북산이 화제를 끌고 갔다.

그런데 북산이 나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꿔다놓은 보리자루 마냥 우두커니 앉아 있었을 뿐 한마디도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때 이정배 교수가 입은 양복이 가운데 양쪽이 갈라진 것이 아니라 그냥 통짜라는 것을 알았다. 다방에서 한 시간쯤 앉아 있었을까? 다시 일행은 감신대로 가겠다고 한다. 나는 잠시 카메라 셔터 속도처럼 빠르게 생각했다. 이 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른 볼 일이 있어 가봐야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발길을 돌렸다. 감신대 앞에서 잠실 어머니 집으로 버스를 타고 오면서 속이 더부룩했다.

▲ 바람이 불자 민들레 홀씨가 여행을 떠나고 있다.
ⓒ 박철
'암만 그래도 그렇지! 강원도 정선에서 왔는데 눈길 한 번 안 주다니….'

한참 버스를 타고 가면서 갑자기 내 손에 들린 가방을 보았다.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메뚜기가 생각났다. 아뿔싸! 말린 메뚜기를 그대로 갖고 온 것이었다. 이럴 수가! 북산에게 말린 메뚜기를 전달하기 위해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그렇고, 이래저래 속이 편치 않았다. 지금부터 20년 전 이야기이다.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북산에게 말린 메뚜기를 드리지 못했다. 그 시절 30대 초반이던 내가 어느새 지천명(地天命)에 진입하여 중늙은이 행세를 하게 되었으니 세월이 참 빠르지 않은가.

내가 30대 초반이었을 때 북산은 40대 초반이었다. 서로 늙어가는 처지가 되었다고 말하면 북산 형님한테서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실제로 주먹이 날아오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어쨌든 북산에게 갈 메뚜기를 떼먹었으니 지금 와서 메뚜기를 잡을 수도 없고 대신 우래옥 냉면이든지, 구수한 보신탕이든지 북산이 좋아하는 것으로 대접하면 안 될까?

북산은 나에게 자유로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셨다. 내가 지금 어쭙잖은 목회랍시고 어디에도 기웃거리지 않고, 이만큼 나를 지켜내고, 민들레 마음을 품고 살아온 모든 것은 다 북산 덕분이다. 20년 세월을 통해 그간 580통의 '민들레교회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내 몸 안에 '자유혼'(自由魂)이 배었다. 그것이 내 인생에 보이지 않는 가장 큰 흔적이다.

나는 오늘 아침 산책을 하면서 수많은 민들레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북산이 뿌려놓은 민들레 홀씨가 가는데 마다 뿌리를 내려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자유의 의미를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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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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