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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약볕>의 연습장면
<뙤약볕>의 연습장면 ⓒ 한상언
한국 연극계의 가장 바쁜 연출자 김광보(41)가 극단 청우의 10주년 기념작 <뙤약볕>을 공연하고 있다. 1998년 <뙤약볕>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후 지금까지 그의 대부분 작품들이 연극팬들과 평론가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인류 최초의 키스>에서 최근 <에쿠우스>까지 그의 연출작은 대부분 흥행과 연출력 모두에서 성공을 했으며 여러 극단에서 그에게 연출을 의뢰할 정도로 현재 한국 연극계의 가장 바쁜 연출가다.

6월 15일 문예회관 예술극장 연습실에서 공연 준비로 바쁜 김광보 연출을 만났다. 그는 19일부터 공연되는 극단 청우의 10주년 기념작 <뙤약볕> 준비에 한창이었다. 배우들에게 연신 쏟아내는 주문은 김광보 연출이 극단 청우 10주년 기념작 <뙤약볕>에 느끼는 부담감을 느끼게 했다.

연습 중간에 시간을 내어 인터뷰를 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 극단 청우가 창단 10주년을 맞았다. 94년 극단을 세우고 지금까지 이끌어왔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
"94년에 연극을 하겠다는 젊은 시절의 열정 하나만 가지고 극단 청우를 만들었다. 90년 초 사랑티켓이 생기면서 관객이 갑자기 불어났다. 94년으로 접어들면서 3~4년 만에 대학로에 관객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94년부터 계속 들었던 말이 '사상 최악이다' '관객이 사상최악으로 없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 관객이 없는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해보니 연극하는 사람들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유행했던 연극이 가벼운 코미디, 벗는 연극, 섹스 코미디가 주류를 이뤘다. 그래서 연극이 연극다움을 회복하는 표현 방법을 찾고자 극단을 만들었다.

극단 청우의 10년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10년이었다. 서울에 바탕이 있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연극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지나온 10년을 웃으면서 회상할 처지는 아니고 살아남으려고 참 어지간히도 발버둥을 쳤구나하는 생각이다."

김광보 연출
김광보 연출 ⓒ 한상언
- 극단 10년의 역사는 김광보 연출의 연출자로서의 역사이기도 하다. 어떻게 연극에 입문하게 되었는가?
"단순하게 시작했다. 고3 겨울 방학 때 부산의 한 극단 앞을 지나가다가 워크숍 단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극단 문을 열고 들어간 게 계기가 됐다. 그게 도화선이 되어서 횟수로 22년째 프로극단에서 계속 작업을 해 왔다. 군대도 방위 출신이기 때문에 퇴근하고 난 후 연극을 했다.

돌이켜 보건데 인생을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인정 받았던 공간이 연극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연출 데뷔하기 전에도 연기를 잘했던 것은 아니지만 스태프로 두각을 나타냈다. 부산 시절에는 조명 디자이너로서 꽤나 이름이 있었다. 이 일을 함으로써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존재가치를 발견했다."

- 부산에서 활동하다 서울로 올라와 극단을 창단했다. 서울에 올라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도피다. 지독한 도시 빈민 출신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가정 환경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항시 내가 태어난 곳을 떠나고 싶고,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부산에서 28년 시간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입신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에 온 것이 아니라 부산을 떠나고 싶다는 욕망이 훨씬 컸고 서울에 작은 소극장 조명 담당으로 취직을 하게 되면서 과감히 부산을 떠나게 됐다."

- 배우로 시작하여 조명디자인, 이후 연출을 하게 되었다. 연출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는가?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 70년대 <한국연극>이었다. 극단 서재에 70년대 <한국연극>이 무수히 꽂혀 있었다. 유덕형, 안민수, 오태석 그런 선생님들의 작업이 <한국연극>에 소개되었는데 특히 오태석 작, 유덕형 연출의 <초분> 공연 기사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런 기사를 읽으면서 연출의 꿈을 키웠다.

유덕형 학장님의 인터뷰 중 연출가가 지녀야 할 덕목 중 조명 디자인에 관한 것이 있었다. '객관적인 상황에서 무대를 들여다보는 것이 조명 디자인인데 입장 자체가 연출가의 덕목과 맞닿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 시기에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다면 조명 디자인부터 먼저 시작해 보자 생각해 조명 디자인을 하게 됐다."

김광보 연출
김광보 연출 ⓒ 한상언
-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뙤약볕>을 하게 된 이유?
"연출자 김광보를 알리게 된 작품이 98년도에 극단 미추에서 했던 이 <뙤약볕>이다. 98년 내가 <뙤약볕>을 할 당시 극단도 거덜이 나고 생활도 거덜이 났다. 연극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할 때에 손진책 선생님이 거두어 주어서 미추에서 이 작업을 하면서 다시 연극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10주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10주년 기념 공연을 뭘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다가 내게 다시 시작 할 수 있게 근거를 마련해 준 이 작품을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뙤약볕>은 10년을 결산하는 무대가 아니고 우리가 앞으로 10년을 가기위한 제시다. 우리가 이 길을 다시 시작해 보려 한다는 의미에서 <뙤약볕>을 한다고 보면 된다."

-98년 공연과 다른 점 어떤 것이 있는가?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 당시는 연극의 원형성을 회복하고 무대 위에 생생한 집단 광기를 보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6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비디오 자료를 보니까 낯뜨거워서 못 보겠더라. 내가 얼마나 힘을 줬던지 배우부터 조명까지 쏟아 부어서 터질 것 같은 연극이었다. 쉽게 말해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꽉꽉 들어차게 연극을 만들었다. 숨 쉴 틈 하나 없는 그런 연극이었다.

이번 연극은 아직까지도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비우기에 주력하겠다는 생각이다. 연극의 형태가 완성되었을 때 그 형태 속에 주연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배우다. 스태프는 부가적인 것으로 도와 주는 것이지 스태프가 전면에 나서서 연극을 좌지우지하면 그것은 연극이 아니다. 배우로서 모든 것들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연극이다.

98년 <뙤약볕>에서 그 많은 것을 음악적인 요소, 안무, 집단동작 그런 것들로 해결했다. 그 당시 음악이 어떤 평가를 받았냐 하면 '난해한 박상륭의 작품 세계를 음악이 이해하게끔 해주었다' 음악이 이해하게끔 했으면 배우는 무엇이냐?

이번 <뙤약볕> 같은 경우는 그 모든 것들을 배우의 힘으로, 배우의 느낌으로, 배우의 입장으로 보여 주겠다. 그래서 음악은 최소한의 요소, 심리적 저항에 대한 효과, 파도 소리, 비 소리, 천둥, 바람 소리 그런 것으로 해결하겠다. 그리고 무대는 비우겠다. 조명도 극소수의 조명만 사용하겠다."

- 극단 청우뿐만 아니라 국립, 시립, 기타 민간극단의 작품도 의뢰 받아 연출했다. 외부 극단의 작품 연출시 그 극단의 고유한 특징을 감안하는가?
"감안을 한다. 대신에 100%를 감안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극단 청우의 작업은 제가 감안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하려고 하려는 목적을 끝까지 밀고 간다. 그러니 배우들이 고통스럽다. 대신에 외부 작업은 드라이한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시립이나 국립 같은 경우는 좀 다르지만 내가 연출 의뢰 받는 작품은 다분히 상업적인 코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코드에서 작품을 만들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가 100% 그 모든 것을 다 감안해서 철저하게 맞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대신 거기서 한 10% 정도는 내게 맞춘다.

우리 극단에서 할 수 없는 작품인데 외부에서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작품이 있다. 예를 들어 <헨리4세>의 경우는 우리 극단의 능력으로 그 작품을 할 수 없다. 대신에 한 90% 정도는 그 쪽 팀에 감안을 해주고 10% 정도는 내가 이런 것들을 한번 시도해 본다는 욕심을 가지고서 작품에 임한다."

<뙤약볕> 연습장면
<뙤약볕> 연습장면 ⓒ 한상언
- 많은 작품을 연출하다 보면 잘 만들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아쉬운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이 가장 아쉬움이 남는가?
"바로 <당나귀들>이다. <당나귀들>은 지금도 아쉽다. 재미있는 작품이다. 만약에 작가가 허락한다면, 국립극단이 허락한다면 그 작품을 우리 극단에서 한번 해 보고 싶다. 3주 반, 4주도 안 되는 연습 기간으로 공연이 올라갔다.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다시 한번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면 그 작품을 다시 해보고 싶다."

- 연극을 하는데 큰 영향을 받은 선배 연극인이 있다면?
"대표적인 스승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이윤택 선생님이다. 이윤택 선생님이 보여준 투쟁력,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그 열정, 연극에 임하는 자세. 서울연극판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생존 전략을 그 선생님한테 철저하게 배웠다.

손진책 선생님은 그릇이 크다. 굉장히 열려 있는 분이시고 포용력도 큰 분이다. 그 분이 보여 주는 작품도 그렇다. 97년도에 선생님이 만든 <봄이 오면 산에 들에> 그 작품을 잊을 수 없다. 비어 있는 연극을 추구하는 결정적 동기를 마련해 주고 결정적으로 힘을 빼게 만드신 분이다."

- 같이 작업을 해보고 싶은 배우 혹은 다시 나의 작품에 출연시키고 싶은 배우가 있다면?
"내가 만난 배우 중 정말 좋은 배우가 <플루프>의 추상미다. 정말 사랑스런 배우다. 거의 동물적인 감수성과 본능, 거기에 수반되는 작품 해석 능력 이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다. 어릴 때 창고극장에서 추송웅 선생님의 <빨간 피이터의 고백>을 보았다. 그 선생님이 보여 주었던 광기도 가지고 있다. 어떤 작품이건 간에 배우 추상미라하면 100%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그 배우에 대해서 신뢰하고 애정을 가지고 있다."

- 이후 계획과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뙤약볕>이 두 군데 지방 공연을 한다. 밀양연극제와 거창국제연극제에 <뙤약볕>이 가고. 8월 말에 <웃어라 무덤아>를 올리고 10월에 <웃어라 무덤아>를 가지고 일본 공연을 간다. <플루프>를 12월에 하자는 얘기가 있다. <플루프>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플루프>라면 언제라도 내가 다시 하겠다는 마음이 있다.

15년째 숨겨 놓은 작품이 있다. 엄두가 안 나 못했는데 페르난도 아라발의 <천년전쟁>이란 작품이다. 아라발 최초 최후의 음악극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굉장히 격렬하고 과격한 연극이다. 이걸 해보고 싶은데 제작 여건이 안 되니까 정말 이걸 하고 싶어도 못했다. 내년쯤에 이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연출가 김광보
연극의 원형성을 중시하는 연출가

김 광 보(극단 청우 대표)

연극의 원형성을 중시하는 김광보는 철저한 대본분석과 완벽한 기초작업을 기저로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는 주목받는 젊은 연출가다.

* 연출경력

94년 지상으로부터 20미터(극단 종각)
95년 종로고양이/ 오필리어(극단 청우)/꽂뱀이 나더러 다리를 감아보자 하여(극단 즐거운 사람들)
96년 꽃뱀이 나더러 다리를 감아보자 하여(극단 즐거운 사람들)/ 처녀비행(극단 대학로극장)
97년 종로고양이(극단 청우)/ Musical love & luv(극단 환퍼포먼스)
98년 뙤약볕(극단 미추)/ 열애기/ 종로고양이(극단 청우)
99년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예술의전당)/ 공포연극제-꿈/ 흰색극/ 봄소풍(극단 청우)
00년 네 개의 악몽/ 종로고양이/ 오이디푸스-그것은 인간(극단 청우)/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극단 갖가지)
01년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극단 갖가지)/ 한 여름밤의 꿈(일본극단과 합동공연)/ 자베트/ 인류최초의 키스(극단 청우)/ 뮤지컬 바람의 나라(서울예술단)
02년 나생문(극단 청우, 일본 야키요시다이 국제예술촌)
02년 헨리 4세 -왕자와 폴스타프(서울시극단)/ 인류최초의 키스(극단 청우)
03년 산소(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당나귀들(국립극단)/ 프루프(루트 원)/ 웃어라 무덤아(극단 청우)
04년 에쿠우스(연극열전)

** 수상경력

1996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화체육부)
1998년 98한국대표희곡 선정(뙤약볕 - 한국연극협회)
1998년 올해의 연극 베스트5 신인연출상 수상(뙤약볕 - 한국연극협회)
1999년 백상예술대상 신인연출상 수상(뙤약볕 - 한국연극협회)
2000년 올해의 연극 베스트5 작품상 수상(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 - 한국연극협회)
2001년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작품상 수상(인류최초의 키스 - 한국연극평론가협회)
2003년 동아일보 선정 차세대 연출가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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