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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 자신은 머나먼 곳으로 유배를 가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촌장의 아들이 와서 저 세상으로 간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도 얼른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점차 사실이라고 느껴진 것은 사람들의 행동이 예사롭지가 않았던 때문이었다. 촌장 아들의 친구는 밤마다 와서 자기 발을 풀어주거나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런 극진한 대접들이 저승으로 가는 사람에 대한 예우였던 것이다. 게다가 항구까지 영접 온 이 배도 그걸 증명했다. 죽음을 예고하는 검은 신상과 검은 사람들, 이 세상에서는 살지 않을 것 같은 작자들이 배를 몰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인가? 바다와 하늘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둥근 해가 그대로 떠 있는 하늘이지 않는가?'

적어도 저승으로 가자면 안개로 시작해 캄캄한 곳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처음 갑판에 올라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을 때, 그 검은 사람들마저 어디론가 사라졌을 때 그는 체념하고 그냥 주저앉아 잠을 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고 나니 태양이 있는 바다…. 저승사자 앞에 닿기도 전에 광명의 이 세상…. 그는 다시 일어나 선수 기둥을 살펴보았다. 그 기둥은 흰 천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그것을 걷어내면 검은 여신상이 드러날 것이다. 한데 이 여신상은 왜 또 덮었다 벗겼다 하는가.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저 갑판이었고, 검은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향이 바뀌었다? 검은 사람들은 사라지고 이 배만 홀로 항해 이탈을 한 것인가?

그는 선미 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거기 한 사람이 있었다. 긴 옷에 머리 수건을 쓴 그 청년이었다. 그는 맥이 빠졌고 그래서 그냥 돌아서려는데,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두어 시간 후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배는 홍해를 가로질러 멜루하 항구에 도착했다. 점심나절이었다. 부두에 정박한 배들의 숫자나 그 모습은 에리두와 비슷한데 거기서 짐을 부리는 인부들은 검은 얼굴에 입술이 넓고 머리가 꼬불꼬불한 사람들이었다. 에인은 아직도 확신이 가지 않았다. 그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청년에게 물어보았다.

"여기가 어디오?"
"멜루하에요."
"저승의 이름이 멜루하란 말이오?"
"아니에요."
"그럼 아직도 더 가야 한단 말이오?"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가 저 세상이라던 그곳인 것 같아요."
"하다면 저기 일하는 검은 사람들은 다 저승 사람들이란 말이요?"
"이 나라 사람들이겠지요. 우린 저 먼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온 것이구요."

저 먼 세상이서 이 세상…. 그러니까 니푸르는 이제 저 먼 세상이 되었고 이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면 역시 자신은 유배를 온 것이 확실했다. 따라서 자신이 타고 온 배의 사람들도 저승사자가 아닌 이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라 그처럼 다르게 생겼던 것이었다.

에인은 마음을 정돈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허리와 엉덩이에 흰천을 두른 사람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배에 과일 바구니를 싣고 있었다. 에인은 처음 보았으나 그것은 바나나였다.

그러니까 멜루하는 지하 세상이 아닌 검은 대륙의 한 왕국이었다. 이 왕국은 홍해 끝에 위치해 있으며, 일찍부터 해상교역이 발달해 그들의 배가 홍해 위쪽 메로웨, 부헨, 누비아, 이집트는 물론 에리두 항구, 더 멀리는 인더스까지 아니 가는 데가 없었다.

그들의 생산품인 상아 뼈바늘, 뼈 북, 영롱한 보석 등은 상당한 인기 품목이었고 그들은 그것들을 내다 파는 대신 부족한 금이나 청동제품 또는 채색도기를 사들이곤 했다.

에인은 검은 피부의 사람들이 이렇게 번창한 항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꼬불꼬불한 머리에 검은 얼굴, 거기다 콧구멍이 큰, 자기 고장사람들과도 사뭇 달리 생겼음에도 그 얼굴들은(우리의 고기에도 이 인종이 언급되었다) 턱없이 착해 보였다. 에인은 그 사람들 모습이 신기해서 언제까지나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서 오세요!"
혼자 앞서 갔던 닌이 저만치서 불렀다. 그녀는 이미 부두 입구 쪽에 서 있었다. 에인이 비로소 몸을 돌려 느릿느릿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닌은 부두 앞에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모부의 말대로라면 누군가가 마중 나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배를 몰고 왔던 사람들이 안내자인가? 그녀는 다시 부두 안쪽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배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자기들만 내려준 뒤 떠나버린 모양이었다. 닌은 그만 당황했다. 안내자가 오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쩌면 정말로 자신들은 이 낯선 바닥에 버려진 것은 아닐까?

그때였다. 저만치 마차 한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차양까지 씌워진 호화로운 마차였다. 그 마차가 그들 가까이 오면서 서서히 속력을 줄이자 닌은 문득 딜문에서는 전설이 된 한 남자를 떠올렸다. 멜루하의 공주와 결혼했다는 엔키 공이었다. 제후는 그저 멜루하에 간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그에게 보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마차가 그들 앞에서 세워지고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긴 머리를 정수리에서 묶은 것이 엔키 공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닌은 너무 반가워 그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닌은 본 척도 않고 곧장 에인 앞으로 다가가 먼저 영접인사를 올렸다.

"장군님, 먼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딜문 말씨였다. 에인이 그 말을 듣고 무척 놀랐는지 더듬더듬 되물었다.
"아니, 그, 그대가 어찌 나를 아시오?"
"예,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라니요?"
"장군님을 잘 모시라는 부탁을 받은, 바로 그 사람이란 말이지요."

유배지에 왔는데 자기를 잘 모시라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에인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뻔히 상대를 쳐다보고 있자 그 남자는 보다 더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어서 마차에 오르시지요."

그리고 남자는 등을 돌려 마차 문을 열었다. 그때 닌은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머리를 묶은 희고 긴 비단 천이 뒤 꼭지에서는 또 나비처럼 앉아 아래로 흘러내린 것이 엔키 공이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춤과 비파를 잘 타는 예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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