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태종 이방원

▲ 태종 이방원이 묻힌 헌릉에서 바라본 풍광
ⓒ 이종원
역대 조선 왕 중에서 손에 가장 피를 많이 묻힌 왕은 태종 이방원이 아닐까? 아버지 이성계를 위해 위화도 회군을 주도했고 고려 충신 정몽주를 살해했던 것이다.

방원이 칼을 휘두른 이유는 아버지 이성계 때문일지 모른다. 조선개국의 최대 공로자가 방원임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둘째 부인 강씨를 편애했고 급기야 배 다른 이복동생 방석(11살)을 세자에 책봉했던 것이다. 26세의 열혈남아 방원이 그걸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형제들과 합세하여 동생 방석과 최대 정적 정도전까지 제거해 1차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끈다.

헌인릉 여행정보

1)대중수단:
지하철 2호선 강남역 6번출구 버스 239-1,66,900번
지하철 3호선 양재역 7번출구 버스 239-1,900, 66, 36


2)승용차
양재역에서 성남방향으로 직진하다가 좌측에 헌인릉 입구가 나온다.

3) 입장료
성인 5백원/청소년 3백원/ 주차비 무료

4).매주 월요일 정기 휴일
그 후 방원은 박포의 이간으로 넷째형 방간과 피할 수 없는 왕위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개성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이면서 방간의 병사를 꺾고 기어코 천하를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2차 왕자의 난인 것이다. 그러나 일말의 양심이랄까? 같은 어머니 배에서 나온 방간만은 죽이지 않았다.

형제들의 살육전을 지켜본 자식들은 어떠했을까? 왕자였지만 늘 불안했을 것이다. 세자에 책봉된 양녕은 궁중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사냥과 풍류를 즐겨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었고, 둘째 효령대군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쩌면 철저한 숭유억불의 추종자인 태종에게 반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 역사는 절망하지 않았다. 바로 세종이 뒤를 이으면서 혼란을 정비하고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이방원도 땅에 묻혀서는 어쩔 수 없나보다. 인적이 드문 대모산 자락에 누워 지난날 과오를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조용했던 곳이 권력의 핵인 국가정보원이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헌릉

▲ 홍살문
ⓒ 이종원
신성한 곳임을 알려주는 홍살문이 서 있다. 그 뒤에 참도가 이어지고 정자각 앞에서 길은 오른쪽으로 꺾인다. 귀신이 올라가는 계단이 왼쪽이고 사람이 올라가는 계단이 오른쪽이다. 다른 능과 달리 기단부 일부가 땅속에 묻혀있어 건물이 무척 낮아 보인다.

신도비

▲ 신도비
ⓒ 이종원
오른쪽에 태종의 신도비가 자리잡고 있다. 태종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적혀 있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신도비만 남아있다. 신도비의 이수와 비신은 한 돌이며 상당히 큰 규모다.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이 사실적이다. 고려 석조예술이 조선 초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 소나무가 왕을 향해 배알하고 있다.
ⓒ 이종원
헌인릉이 좋은 이유는 이렇게 봉분 근처까지 올라가 석물을 가까이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왕릉도 이렇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왕릉을 보는 맛은 당시 최고의 석공이 만들어낸 문무인상의 표정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의 기가 세서 그런지 소나무는 봉분을 향해 배알하고 있다.

원경왕후

▲ 좌측봉분이 태종이방원의 릉이고 우측이 원경왕후의 민씨의 릉이다.
ⓒ 이종원
왼쪽이 태종 이방원의 봉분이고 오른쪽이 부인 원경왕후의 봉분이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원경왕후 민씨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태종보다 두 살위인 민씨는 정도전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 태조와 함께 숙식하고 있는 방원을 몰래 불러 주의를 환기시켰고 결국 방원이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정도전은 왕자들의 사병을 철폐하고 무기를 불살라 버렸는데, 이때 민씨가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거사 직전 방원에게 내어준 것. 승리의 일등공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 민씨는 행복할 수 없었다. 후궁 문제로 태종과 다투기 시작했고 급기야 민무구, 민무질 사건이 터지면서 친동생 둘이 죽는 것을 보게 되었다.

본인도 폐위의 위기에까지 몰렸다. 어쩌면 방원은 외척의 권력을 막고 왕권강화를 위해 후궁 수를 늘였을지도 모른다. 12명의 부인과 29명의 자녀를 두었으니 말이다. 민씨. 한 여자의 욕망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죽어서는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가 보다. 이렇게 나란히 누워 있으니….

헌릉의 무인상과 문인상

▲ 유난히 광대뼈가 돋보이는 헌릉의 무인상
ⓒ 이종원
무인상이다. 둥글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졌다. 유난히 광대뼈가 튀어 나왔는데 둥그스럼하게 조각하여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입가에 머금고 있는 미소가 무척이나 천진난만하게 보인다. 머리가 어깨에 붙어있어 강인한 느낌을 준다. 두툼한 갑옷은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

태종의 성품을 반영해서 그런지 강인한 무인상에 비해 문인상은 연약해 보인다. 큼직한 귀를 보니 사찰에서 불상을 만들었던 석공이 문인상을 조성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길게 이어진 수염과 옷주름이 섬세하다.

▲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금강저가 병풍석에 새겨져 있다.
ⓒ 이종원
봉분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병풍석이 있는데, 그 면석에 12지 신상이 새겨져 있다. 구름 위를 날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왕릉의 십이지 신상은 다른 나라에는 나타나지 않는 우리 나라 고유의 것이란다. 병풍석엔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금강저가 새겨져 있다. 불교를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것이 이채롭다. 고려의 장제를 따랐던 결과가 아닐까?

▲ 왕릉를 수호하고 있는 석양과 석호
ⓒ 이종원
석호는 능을 수호하는 수호신이면 석양은 사악한 것을 피한다는 의미에서 봉분 주변을 지키고 있다.

▲ 인릉의 석물들
ⓒ 이종원
인릉

헌인릉의 또 다른 재미는 조선초기와 말기의 능제를 서로 비교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전반기의 석물의 기법은 후반기와 차이가 난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석조예술이 이어져 섬세하지만 후반기로 넘어갈수록 조악하게 변한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문인, 무인석은 당시 왕의 일생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의 석물은 힘찬 표정을 하고 있고,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장릉 석물들은 슬피 울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릉은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봉분의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둘렀다. 봉분이 하나여서 단릉처럼 보인다. 후반기에는 문무인상의 머리와 몸체는 1:4의 비율이 되면서 하반신이 길어진다. 그러나 어깨가 움추리고 있어 상자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진다.

순조는 참 운이 없는 임금이다. 재위기간 34년 중에서 19년에 걸쳐 수재가 일어났고, 서부지방에 전염병까지 번져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등 백성들의 고통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기 때문에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되고 각종 비기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사회혼란이 극심한 시기였다. 급기야 홍경래난을 비롯한 민란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에 서 있어 헌종, 철종대까지 수렴청정하면서 굳건한 권세를 누린 왕비이기도 하다.

▲ 데이트 코스로 참 좋다.
ⓒ 이종원
왕릉은 한적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예쁜 벤치가 곳곳에 놓여 있다. 산책길이 참 좋다. 하늘을 찌르는 권력도 죽음 앞에서 무의미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한때를 풍미했던 권력자들도 죽음 앞에서는 평등했다. 그들을 만나면서 역사를 되새겨 보고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역사 속에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보자.

오늘날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과연 어떤 길인가? 그 해답은 죽은 자를 통해서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종원 기자의 홈페이지:http://cafe.daum.net/monol4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