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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단처럼 깔려 있는 구름 아래로 보이는 호수와 강, 그리고 눈이 쌓인 듯 희뿌연 벌판. 오랜만의 길 떠남을 축복하는 듯한 풍경은 자연스레 어린 시절의 꿈을 되살려 낸다.
ⓒ 최승희
지난 14일 낮 12시 42분. 드디어 좌석이 움찔하면서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달 동안의 간직했던 설레임과 함께 그에 비례할만한 걱정이 이제 현실화 된 것이다. 기나긴 비행 끝에 도착할 유럽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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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시 17분. 좌석 앞에 설치되어 있는 모니터는, 현재 비행기가 우랄산맥을 넘어 상트페테르부르그 인근을 지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고비사막 위를 날고 있을 때가 언제인데, 5시간 만에 이미 유럽의 동쪽 끝에 다다른 것이다. 융단처럼 깔려 있는 구름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호수와 강, 그리고 눈이 쌓인 듯 희뿌연 벌판. 오랜만의 길 떠남을 축복하는 듯한 풍경은 자연스레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상기시켰다.

세계부도의 추억

월악산 아래 후촌이라 불리던 조그만 마을, 전교생이 2백 명 조금 넘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다. 그 무렵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지구본이다. 서울은 고사하고 가까운 충주 시내라도 한 번 나가봤으면 하고 갈망하던 소년에게 지구본은 세상 어디로든 떠날 수 있게 하는 그 무엇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꿩 대신 닭이라 했던가. 쉽게 가질 수 없던 지구본 대신 두 명씩이나 되는 누나들의 세계부도는 소년의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책을 통해 암만은 어디 있는지, 또 헬싱키는 어디에 붙어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간다.

산봉우리 사이로 느지감치 해가 뜨고 유난히 일찍 지는 산골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당시 물장난과 눈싸움 다음으로 흥미 있던 일은 세계부도를 깊이 연구(?)하는 일이었다. 자와 색연필을 가지고 어디에 운하를 뚫고, 어느 길로 가야 가장 빨리 파리까지 갈 수 있는지 등을 탐구하는 것이 소년의 최대 관심사. 때로는 간척 사업을 벌여 서해를 메우기도 하고, 한반도를 관통해 일본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 횡단 열차를 놓기도 했다.

▲ 거의 11시간만에 도착한 프랑크푸르트.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어두컴컴하다.
ⓒ 최승희
도착 안내 방송과 함께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거의 11시간을 날아왔을까? 조금 있으면 착륙이니 좌석 벨트를 꼭 매란다. 유럽의 첫발을 내딜 도시는 프랑크푸르트. '이코노미 증후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랜 비행이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고 하지만, 피곤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솔직히 11시간에 가까운 비행 시간이 그리 길었던 것 같지도 않다. 빨리 유럽에 오는 것도 좋지만, 그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을 시간이 줄어든 것이 오히려 아쉬웠을 따름이다.

"기봉아, 네 가방은 다 챙겼냐?"

어서 내려 유럽에 왔음을 실감하고 싶은가 보다. 해얼이 형이나 승희 형, 뒤늦게 합류한 샘 형 모두 가방을 챙기고 내릴 준비를 하는 폼이 사뭇 재빠르다. 그러나 비단 우리 일행만 착륙을 고대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유학중인 딸을 '응원'하러 간다는 아버지나 한국에서의 일을 마치고 귀국한다는 독일인 부부 역시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 파이닝거씨가 꼼꼼하게 확인하고 기록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너무한 것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 최승희
여권을 한 번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 입국 수속을 끝내고 들어선 입국장. 어디선가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독일어 안내 방송은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도착한지 채 몇 분이 되지 않아 아직 혼돈스러웠지만, 발걸음만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정신없는 와중에서 공항을 나오자마자 기억나는 전화 한 통이 있었다. 출국하기 이틀 전, 로마에서 걸려온 혜주의 전화였다. 혜주는 구두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몇 달 전 로마로 떠난, 정말 '쿨'한 친구다. 아직 이탈리아어를 배우느라 정신이 없을 테지만, 친구가 바다 건너 먼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에 없는 돈 들여 전화를 해준 혜주였다.

"야! 나 감기 걸려 며칠째 고생이야. 여기 엄청 추워!"
"무슨 소리야? 이탈리아는 그래도 따뜻하지 않아?"

한 여름에는 기온이 거의 40도 가까이 오르는 로마라고 했다. 유럽 땅도 동장군의 등장을 당하지는 못하는 걸까? 못으로 찔러도 끄떡 없을 혜주가 감기에 걸렸을 정도라면 로마의 날씨, 겪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런데 이곳은 로마보다 위도가 훨씬 높은 프랑크푸르트. 독일 시각으로 오후 4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공항 바깥으로 나오니 보이는 것은 이미 해가 진 하늘이요, 불어오는 것은 차가운 겨울 바람뿐이다. 비행기에서 본 하늘은 그렇게 눈부셨는데도 말이다.

물론 프랑크푸르트의 위도가 춥다고 익히 알려진 사할린의 그것과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다의 영향을 더 받는 대륙의 서쪽은 우리나라보다 따뜻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난 달 10일 신문에서 독일 남부 지방의 눈 소식을 읽기는 했지만, 우중충한 프랑크푸르트의 하늘이 그리 달갑지 만은 않다.

게다가 캠핑카에 싣고 다닐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불에 베개까지 공수해 오는 통에 한껏 많아진 짐으로 이미 어둑해진 독일 하늘처럼 기분은 우울, 그 자체였다. 도대체 이불과 베개는 뭐하려고 바리바리 싸 들고 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우리가 타고 다닐 캠핑카 '하이머-524'.
ⓒ 최승희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싼 요금에도 불구하고 짐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잡아탄 대형 택시. 곧장 10여 분을 달렸을까? 캠핑카 렌트회사 '하이머 렌트'에 도착하니 파이닝거씨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듣자 하니 예약을 하고 왔기 때문에 퇴근 시간을 한참 지났음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란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다른 상점들은 쇼윈도에만 불이 켜져 있을 뿐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하다. 특히나 오늘은 유럽의 휴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밤이 아닌가.

이미 한국에서 빌릴 차종을 정하고 비용도 지불하고 왔기 때문인지 차량 인수와 관련한 서류 절차는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정작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인수 전 차량 점검. 출국하기 전부터 여러 번 들어온 이야기라 해얼이 형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차 구석구석을 찍기 시작한다. 나중에 차를 반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막기 위한 것이란다.

파이닝거씨가 꼼꼼하게 확인하고 기록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꼼꼼하기 이를데 없다. 캠핑카 탁자에 난 작은 흠집 하나까지 기록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마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했을 터.

▲ 차창에 스치는 낯선 풍경을 놓칠세라 두리번거리는 해얼이 형. 30대 중반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즐거워 하는 모습이 완전 어린아이다.
ⓒ 최승희
'시티 캠프-프랑크푸르트' 캠핑장으로 향하다

아뿔싸. 차를 빌렸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차 안은 잘 데가 없었다. 베개와 이불은 있는데, 잠 잘 자리가 없다니 이거 원…. 캠핑카에 식수와 생활 용수, LPG 가스를 채워야 하는 일도 남았다. 또한 유럽 운전 경력이 이미 오래된 샘 형 역시 낯선 프랑크푸르트에서 그것도 야밤에 캠핑장을 찾는다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프랑크푸르트의 날씨만큼이나 우울한 기운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그냥 저를 따라오세요."

늦은 저녁까지 기다려 준 파이닝거씨가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선다. 자기가 앞서 운전할 테니 그냥 따라오라고 한다. '시티 캠프-프랑크푸르트' 캠핑장으로 향하는 길, 그토록 그리던 캠핑카를 몰게 된 샘 형이나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승희 형, 차창에 스치는 낯선 풍경을 놓칠세라 두리번거리는 해얼이 형. 모두 30대 중반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즐거워 하는 모습이 완전 어린아이같다. 역시 멀리 떠난다는 것,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뛰어드는 일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일인듯. 마치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꾸는 것처럼 말이다.

▲ 정신 없는 하루가 지나고, 캠핑장은 이미 어둑한 밤이다. 앞으로의 여정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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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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